소설리스트

터닝-608화 (608/805)

608화

“현자님! 현자님!”

황태자가 머무는 광휘궁.

현자를 부르며 조용한 중정을 질주하던 젊은 남자가 또 다른 이의 손에 뒷덜미를 잡혔다.

“무슨 일이야, 랭바튼. 여기가 어디인지 잊었어?”

“이거 놔, 네조. 난 지금 빨리 그분을 뵈어야 한다고!”

“현자님은 지금 황태자 전하와 만나고 계셔. 앞으로 반나절은 지나야 돌아오실 테니까 가도 소용없어.”

“뭐? 이런…….”

그 말을 듣고서야 젊은 사내, 랭바튼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걸음을 멈추었다. 네조는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레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 내게 먼저 말해 봐.”

“그게…….”

랭바튼은 눈치를 보다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다른 동료라면 몰라도, 가장 고참인 네조라면 이 소식을 먼저 전해도 괜찮다고 여겨졌다.

“저번에 우리 숙소에 누군가 침범한 흔적이 있었다는 건 너도 들었지?”

“그래. 왜. 그놈들의 꼬리라도 잡았어?”

며칠 전, 그들은 머물던 숙소에 누군가 강제로 침범했다는 신고를 뒤늦게 접했다. 머물던 이들이 황태자의 궁에 들어가 소식이 끊긴 터라 서류상 소유자로 지정되어 있는 디아카 측 사람에게 먼저 연락이 갔고, 거기서 다시 그들에게 이야기가 들어오기까지 시일이 걸리는 바람에 사태 파악이 아주 늦었다.

대담하게도 대낮에 침범했다가 물러난 범인들은 아직까지도 잡히지 않았는데, 그들은 분명 나한이 범인이리라 짐작했다.

현자가 현재 황태자의 궁에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나그란의 별들에게 철저히 비밀로 하여 얼마나 다행인가. 현자를 따르는 이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한 패거리를 먼저 찾아내기 위해 남몰래 노력하고 있었다.

“그건 아직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어?”

“아까 그곳으로 배달된 남부 거점의 편지를 찾아왔어. 어제 도착했나 본데, 내용이 심상치 않아. 아무래도 나한네 놈들이 우리 숙소에 침범했었을 때, 그쪽에서 보냈던 편지를 빼돌렸던 것 같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네조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걸 봐. 세라가 쓴 거야.”

랭바튼이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네조에게 내밀었다. 네조는 재빨리 쓰고 있던 안경을 치켜올리며 그것을 가까이 끌어당겨 읽었다.

순식간에 내용을 모두 읽은 네조의 얼굴이 분노와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이게 대체…….”

편지에는 대체 왜 이전 연락에 답신을 이리 오래 보내 주지 않느냐며 불안해하는 말들로 가득했다.

나한을 따르던 각성자들 때문에 요즘 남부 거점의 분위기가 얼마나 흉흉한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이 일어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거점을 떠나기를 희망하거나 이미 떠났는지도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편지에 의하면 거점을 떠나는 이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건 남부 거점뿐만이 아니었다. 서부 거점은 없어졌지만 중부 거점은 아직 남아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요즘 이탈자가 많이 발생하여 남부 쪽에 도움을 요청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이리 일괄적으로 이탈자가 많아졌다니. 나한 놈이 드디어 검은 속내를 드러내어 선동질이라도 시작한 건가?’

당연히 아니었다. 마병단원 모집 소식을 듣고 숨어 살기가 지긋지긋해진 자들이 낚싯대에 걸려들었을 뿐이지만, 나한을 지나치게 경계 중인 네조와 랭바튼의 눈에는 모든 것이 그 때문인 듯 느껴졌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무엇보다 황당한 부분은 따로 있었는데,

‘상황이 이러하니 이 이상 답이 늦어진다면 남국에서 온 상인들이 남부 거점을 보호해 주겠다고 건넨 제안을 아무래도 수락해야 할 것 같다’고 적힌 곳이었다. 네조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남국인 상인? 이놈들이 대체 누구야.”

“나도 모르겠어. 이전 편지를 언급하는 걸 보고서야 겨우 이전에 보낸 소식이 있었는데 우리가 받지 못한 것 같다고 추측한 거야.”

“……침입자 놈들이 숙소를 뒤진 뒤 없어진 게 잡동사니뿐만이 아니었던 거군.”

“그래. 그러니까 당장 답을 보내야 한다니까. 앞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경로도 바꿔야 하고, 거점도 안정시켜야지.”

랭바튼이 조바심을 냈다. 서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네조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냥 우리가 먼저 작성해서 보내자.”

“응? 어? 하지만…….”

“지금 현자님께서 얼마나 바쁘신지는 너도 잘 알겠지. 어제 마병단의 그 괴물 같은 단장 보좌가 서부로 갔다는 소식도 들었잖아.”

“그래. 그놈이 렌보우 자작님 쪽에서 서부의 인맥으로 먼저 꽂아 넣어 봤던 놈들을 귀신처럼 다 걸러 내었다며.”

랭바튼이 소름 끼친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 사람들 쪽에 재차 연락을 넣으시느라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어. 거기다 오늘은 과중한 일로 지치신 황태자 전하의 마음도 어루만져 주시느라 하루 밤낮이 모자랄 판이야.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실 겨를은 없어.”

“그건…… 그렇기는 한데.”

“일단 보내고 나서 밤에 말씀드려도 괜찮을 거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걸 이해하실 테니까.”

네조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다행한 건, 현자님께서 마병단에 심어 넣을 사람들을 남부로 보내기로 하셨다는 거야. 그쪽을 통하면 연락은 전보다 빨리 주고받을 수 있겠지. 디아카 공작을 돕는 일과 우리 쪽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어.”

“아… 역시 네조 넌 똑똑해!”

랭바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러나 그때, 네조가 그의 입을 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깐. 방금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어?”

“어? 무슨 소리……? 못 들었는데.”

그러나 안심하지 않은 네조는 조심스럽고도 날카로운 기색으로 주변을 한번 돌고서 다시 돌아왔다.

“너무 지나치게 위험한 이야기를 밖에서 떠들었어. 다음은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다 꺼리잖아.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도 안 써.”

“그렇다 해도 조심해야 해.”

두 사람이 발소리를 죽여 사라진 뒤, 네조가 미처 다 돌아보지 못했던 구석진 그늘 뒤에서 한 사람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저 사기꾼들이 뭔 작당을 하고 있나 했더니, 뭐가 어째?”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은 듯 잔뜩 찡그린 얼굴로 나타난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키올레 다 디아카였다.

‘저놈들, 여섯으로 끝이 아니라 다른 곳에 패거리들이 더 있었던 거냐? 게다가 우리 아버지를 도와서 뭘 어쩐다고? 마병단원 모집에 사람을 심어? ……아버지가 그런 계획을 저놈들한테 맡기셨다고? 대체 뭘 믿고?’

의문과 분노로 가득했던 키올레의 머리에 문득 얼마 전 만났던 유더 아일의 말이 떠올랐다.

치료사들의 대장은 세뇌를 할 수 있는 정신계 각성자로 추정되니 결코 독대하지 말고 디아카 공작에게서도 평소와 다른 언행이 나타나면 잘 지켜보라던 그 말.

그때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했는데, 자연스럽게 제 아버지와 황태자 둘 모두를 도와 일을 하겠다는 말을 지껄이는 치료사 놈들을 보자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는 한 듯하다는 아주 불안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아버지가 걱정되네…… 마병단 쪽은 내 알 바 아니지만.’

그러나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귀신처럼 손에 남겨진 조그만 서약의 인이 발동하며 눈꺼풀이 미친 듯 무거워졌다.

“억……!”

키올레는 하마터면 단단한 벽에 머리를 찧을 뻔했다가 간신히 몸을 가다듬으며 벽을 짚었다.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벌렁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빌어먹을 놈의 서약이 또!’

요즘은 서약에 걸릴 수 있는 언행의 한계선을 거의 파악한 덕에 이렇게 급격한 졸음으로 쓰러지는 때가 거의 없었지만 딱 하나 예외가 존재했다. 바로 세 번째 조항인 ‘스스로 가능한 능력 범위 내에서 유더 아일을 돕는다’였다.

‘아니 젠장! 그 검은 머리 마병단 놈한테 도움이 되는 기준이 대체 뭐라고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건데! 왜 세 번째 조항의 힘만 날이 갈수록 더 강해지는 거냐고!’

그건 맞으면서도 틀린 생각이었다. 그가 걸린 서약의 조건은 사실 키올레 자신이 생각했을 때 얼마나 유더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지에 따라 갈렸다.

그가 마병단과 유더를 강하게 의식하며 사소한 정보에서도 그것을 떠올리는 빈도가 잦아지면 질수록 세 번째 조건의 힘도 더욱 강력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키올레는 오늘도 씨근덕대면서 괜스레 벽을 걷어찼다.

‘그래, 알려 준다, 알려 줘! 이 악마 같은 놈!’

그 시각, 그 악마 같은 놈은 누가 저를 욕하고 있으리라는 생각 따윈 하지도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부의 동료들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뭐? 유더가 벌써 간다고?”

“너무 빠르잖아. 아직 2차 시험이 다 마무리된 것도 아닌데 좀 더 있다가 가지 그래. 피곤해 보이는데. 단장님도 아직 쉬고 계신다며?”

피곤해 보인다는 말에도 유더는 꿈쩍하지 않았다.

“본래는 어제 떠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하루 더 머물렀어. 볼 사람은 이미 다 봤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잘 골라.”

“에이…….”

에문을 비롯한 동료들은 끝까지 아쉬움을 드러냈으나 더 붙잡지는 않았다. 그들도 단장과 단장 보좌가 얼마나 바쁠지 예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준 새로운 훈련 계획표는 절대 거르지 말고 그대로 해.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잘하고 있는지 확인할 테니까.”

“예에…… 누구 말씀이라고 감히 안 지키겠어요. 마병단의 정신께서 우릴 위해 몸소 하나하나 짜 주셨다는데.”

훈련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동료들의 얼굴은 수도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좋아 보였다.

“그런데 유더,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돼? 어제 네가 시험 참관 도중 카드 점 치는 각성자한테 축복을 받았었잖아. 그거, 어떻게 됐어? 발동된 거야?”

“아! 나도 그거 궁금해서 잠도 못 잤는데.”

“나도!”

반짝이는 눈빛들 속에서 유더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몰라.”

“뭐?”

“모른다고.”

“그럴 리가. 이미 발동되었는데 몰랐던 건 아니고?”

“모를 수 없어. 1차 때 나한테도 비슷한 축복이 걸렸었는데, 그 즉시 다른 시험 참여자가 실수로 떨어트린 돌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가 튕겨 날아가는 걸 봤거든.”

에문이 끼어들어 대답했다.

“그럼 뭐지? 하루가 지나서 발동될 수도 있는 건가?”

“여태까지 걸린 축복들이 대부분 그랬다고 해서 전부 하루 내로 효과가 나온다고 할 수는 없겠지. 축복의 이름은 어디까지나 몸에 닥칠 위험을 한 번 막아 준다는 것뿐이었으니까.”

이전 생에 지금보다 훨씬 능력이 출중했던 글로에의 축복은 시간과 상관없이 발동되었다. 지금은 아직 능력이 미진한 상태라 하루라는 시간이 능력 발동의 한계치일지 몰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아닐 수도 있었다.

유더의 대답에 모든 이들이 김이 샌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정말 궁금했는데.”

“발동되면 나중에라도 알려 줘!”

“그런데, 마티와 로벨은?”

유더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질문을 했다.

“아, 그분들하고 먼저 인사하고 온 게 아니었구나? 마티는 오늘 감옥 재건 공사장 쪽에 갔을걸. 마티가 있는 곳에 로벨도 있을 테니 거기로 가 봐. 아니면 우리도 같이 갈까?”

“됐어.”

깔끔하게 잘라 답한 뒤 유더는 곧 타이누의 지하 감옥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서부 지부 건물 바로 근처에 위치한 그곳은 나한과 그의 동료들이 거침없이 부수었던 흔적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장소였다.

재건은 해야 하지만 범죄자들이 잡혀 있는 곳이라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어 어려움을 겪었는데, 해당 장소를 부순 장본인들의 손으로 직접 복구하게 한 뒤로는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그렇다고 들었는데…… 왜 지금은 사람이 없지.’

점심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사람이 없는 공사장으로 들어선 유더는 주변을 훑었다. 가볍게 바람의 힘을 불러내어 탐색하자 곧 어디선가 웅성대는 소리가 증폭되어 날아들어 왔다.

‘어떻게 하지?……. 런 상황에서…….’

‘…란한데…….’

유더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공사장 구석에 모여 있는 이들을 발견했다.

마티와 로벨도 그곳에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어, 유더 님 오셨군요. 그게…… 여기서 일하던 사람 중 두 명이 갑자기 2성 관련으로 좀 일이 생겨서요.”

유더를 발견한 로벨이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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