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화
‘고작 말을 조금 했을 뿐인데, 3일 내내 훈련을 했을 때보다 더 기력이 빠진 것 같다.’
이야기를 다 끝내고 나니 어두웠던 창밖이 어느덧 부옇게 변했다. 입에 댄 찻물도 차갑게 식은 상태였다. 유더는 전신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피로감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지금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아시겠습니까.”
키시아르라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슨 뜻인지 아마 유더 자신보다도 잘 알 것이다.
“똑같은 자가 되지는 말라는 뜻인가.”
그리고 물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나온 말이 생각보다 조금 과격했다.
유더는 그의 말을 조금 순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시겠지만 저는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단장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가 여기까지 스스로 말하도록 만든 게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답을 알고 있을 사내를 향하여 유더는 단언했다.
“바로 당신이십니다.”
먼저 나서서 건네준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
이전에는 함께 나눈 적이 없었던 수많은 감정들.
그가 먼저 그 솔직함을, 열망을 내보이며 가르쳤기에 유더 또한 같은 것들을 내어 줄 수 있었다.
이전 생과 지금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거기였다.
유더는 파도처럼 일렁이는 속내를 감추며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스스로 말하기엔 그렇습니다만 욕심이 제법 많은 편입니다. 오기로는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지요.”
유더의 욕심은 돈과 보석, 귀중한 검이나 더 큰 권력 같은 것에는 발휘되지 않았다. 그의 욕심은 언제나 자신이 지닌 힘, 혹은 보다 효과적인 수련법의 발견, 싸워서 이기는 법 같은 부분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욕심내는 것들이 같지 않다 해서 그 크기가 적은 건 아니다. 유더는 한번 욕심낸 것들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 집념을, 살아서 유일하게 유더의 욕심을 불러일으킨 상대에게 쏟아부을 차례였다.
“이 이야기는 제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감추려 했던 비밀이자 최후의 벽이었습니다. 언젠가 말하셨던 대로 이쪽의 벽을 모두 무너뜨리셨으니, 저도 똑같이 해 드려야 수지가 맞지 않겠습니까?”
“…….”
“저를 모두 뒤집어 드러내었으니, 단장님께서도 ‘진짜’ 전부를 내주십시오.”
키시아르의 좋지 않은 면이라면 이미 충분히 겪어 보았다. 그릇에 금이 간 사내가 감추었던 고통도, 가차 없고 비밀스러운 일면도, 밤마다 찾아와 기어이 욕망 어린 손을 대고 마는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모습까지도 모두 보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키시아르의 전부를 원했다. 그가 억누른 인내의 저편에 있을 최후의 알맹이까지도 모두 까뒤집어 가질 자격이 제게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
말하면서도 단숨에 모든 걸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 당장 모든 걸 내달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단장님께서 그러하셨듯, 저도 벽을 무너뜨려 원하는 전부를 얻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유더는 입술 끝에 힘을 주어 위로 올렸다. 어색하고도 기묘한 표정이었지만 키시아르는 홀린 듯 시선을 떼지 않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대놓고 혼이 났다면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 같군.”
사내의 얼굴 위로 잠시 후 졌다는 듯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가진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부분들을 내어 놓으라 말했다면 얼마든지 가져가 달라 말했을 텐데, 원하는 게 오히려 그 반대라니. 어쩌면 좋을까.”
“그래서 기다리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실 별로 자신 없는 분야입니다만…… 한번 배운 건 잊지 않는 편이니 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키시아르가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도구를 사용하여 생기가 어렸던 얼굴 위로 드디어 깊은 피로와 초조했던 감정들이 얼핏 드러났다.
유더는 드디어 원하던 바를 이루었음을 깨달았다.
“……제가 드리고자 했던 말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제 벌을 주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방금은 내 전부를 달라고 말하더니, 이젠 벌을 내려 달라고 말하는군.”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니까요.”
오랫동안 키시아르를 죽인 사실을 고백한 이후의 반응을 생각해 왔다.
진실을 알게 된 사내는 과연 무어라 말할 것인가.
그가 누구인지 잘 몰랐던 시절에는 당연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저를 내치리라 여겼기에 앞으로 할 일들을 위해서라도 밝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를 알게 되고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그런 실리적인 이유와는 상관없이 생각만으로도 피가 식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떤가.
모든 걸 스스로 드러낸 지금은 오히려 마음속이 텅 빈 듯 고요했다. 그 안을 채운 건 풍랑 같은 고통이 아니라, 키시아르를 향한 각오뿐이었다.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이전 생에 죽었다는 당사자가 직접 나서야겠지.”
유더의 각오 어린 눈을 바라보며, 비로소 키시아르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가 여기에 있었더라도 네게 벌을 내리려 하지는 않았을 것 같군.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더더욱 그렇고.”
“그건…….”
“잘 모르면서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아.”
키시아르가 유더의 속내를 읽듯 담담히 대답했다.
“생각해 보게. 너의 말대로 붉은 돌 회수 임무 시점에서 이미 그릇에 재차 금이 갔었다면 그때의 키시아르 라 오르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을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고도 2년을 버텼다는 쪽이 더 놀라울 지경이거든. 암살을 당했다면 적어도 시체는 남기고 죽을 수 있었을 테니 오히려 호상이라 말하는 쪽이 맞아. 모르긴 몰라도 아마 나라면 같은 생각을 했겠지.”
이전 생의 자기 자신에 대한 말이라기에는 너무나 차가운 말이었다. 그러나 키시아르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니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하지 말게. 같은 일이 두 번 반복될 일이 없도록 만들면 그만이니까.”
그건 이전 생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더에게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와 등에서 기력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속이 상하지 않으십니까.”
이전 생의 키시아르는 처절하게 실패했다. 유더의 실패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모든 걸 잃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기분 좋을 리 없었다.
“그래. 상하기는 하는군. 하지만 그건 기억에도 없는 이전의 일 때문이 아니야.”
그러면 왜냐고 물으려 했던 순간이었다.
키시아르가 유더보다 먼저 입을 열어 조용히 중얼거렸다.
“힘들지 않았나?”
“…….”
“다시 시작하자마자 마병단으로 들어와, 결국 내 곁에 서게 되었던 것. 쉽지 않았겠지.”
별것 아닌 질문 같은데, 이상하게도 곧바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키시아르의 시선 때문인 것 같았다.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나라면 아마 나 같은 녀석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았을 텐데. 마음은커녕 웃음 한 조각 내어 주지도 않았을 거야. 수작질을 할 때마다 엉덩이를 차서 내쫓았겠지.”
엉덩이를 차지는 않았어도 그 비슷한 일을 많이 하기는 했기에 마음이 조금 찔렸다.
“단장님이 뭐가 어때서 그러십니까.”
“얼굴만 조금 잘생겼을 뿐, 실은 아주 음흉한 놈이지. 이렇게 말하면서도 실은 제가 재차 기회를 받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아 머리가 새빨개질 만큼 욕심낼 정도로.”
부드럽고도 서늘한 목소리가 제 심경을 솔직하게 고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너를 안고 싶다고 말한다면 역시 이상하겠지.”
“이상하지 않습니다.”
“너는 네가 무슨 얼굴을 하고서 말하는지 모르니 그러는 거야.”
유더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매만졌다.
“……제 얼굴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키시아르의 눈썹이 허물어지듯 쳐졌다. 그는 웃음을 흘리며 유더의 얼굴 위로 손을 뻗었다.
“아니. 없어.”
“…….”
“지금 그쪽으로 가도 되겠나?”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아르가 곧 다가와 그를 꽉 끌어안았다.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숨을 쉬는 동안 긴장감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체온이 섞여 따뜻해졌다.
드디어 키시아르와 제대로 다시 맞닿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은 유더의 머리 위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가슴 속에서 바람이 부는 것 같았어.”
자장가처럼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그 차가운 바람에 몸을 맡기면 그날 느꼈던 모든 게 무뎌지고 네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잠을 자기가 싫었지. 무뎌진 칼은 쓸모가 없을 테니까…….”
“…….”
“어디서든 잘 무뎌지는 게 장점이라 생각했으면서, 이제는 무뎌지기가 싫다니 우습지 않나.”
키시아르의 이마가 닿은 어깨 위로 흐린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바로 내가 비밀스럽게 계속 복기를 반복하고 잠들지 못한 얼굴에 마도구를 사용하여 감추려 한 이유라네.”
우스울 리가 있겠는가.
가슴이 먹먹하게 차올랐다. 유더는 키시아르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오늘의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죄를 지은 건 사실이라 생각하면서도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싫어서, 지레 물러나며 겁을 냈었습니다.”
자조하고 싶을 만큼 한심하고 어리석은 모습이었다.
“우습다면 그런 제가 오히려 더 우습겠지요.”
“그만큼 내가 좋아졌단 말 아닌가. 그건 오히려 기쁜데.”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면 되겠습니까?”
“한 방 먹었군.”
이제 바깥이 완전히 밝아졌다. 멀리서 일찍 일어난 이들이 움직이는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본래대로라면 지금쯤 일어나 움직여야겠지만, 유더는 저를 안은 사내의 팔을 두드리며 눈짓을 했다.
“오늘 드린 말씀을 듣고 생각하신 바가 더 있으시겠지만, 다음에 잇도록 하고 지금은 주무십시오.”
“졸리지 않은데. 그냥 이렇게 조금만 더 있으면…….”
“주무십시오.”
세 번은 말하지 않았다. 유더는 먼저 일어나 키시아르의 팔을 부축해 끌어당겼다. 코끝을 울리며 짧게 웃은 사내가 스스로 일어나 유더의 손에 이끌려 침실로 들어갔다.
유더는 그를 눕히고 이불까지 덮은 뒤 곁에 앉았다. 이렇게 있으니 대삼림에서 떠나기 전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도 아마 키시아르를 잠들게 하려고 이 비슷한 일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나만 자는 건가?”
“전 단장님보다 훨씬 많이 자고 일어난 몸입니다. 당연히 나가서 수련을 하고 떠날 준비를 해 두어야지요.”
“이게 진짜 벌이었군.”
그렇게 말했지만 키시아르는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한 손에는 유더의 손을 쥔 상태였다.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변했으나 유더는 손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지켜보았다. 말로는 곧 나갈 거라고 했지만 워낙 위장에 능한 이다 보니 방심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가 천천히 머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오랫동안 맴돈 한마디는 역시나 마지막 즈음에 들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힘들지 않았느냐……라.’
자신의 죽음을 듣고도 결국 내뱉은 건 그런 말뿐이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가슴 속 어딘가가 깊이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유더는 그것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가, 문득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검은 머리칼의 남자는 몹시 지쳐 보이는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키시아르가 왜 제 얼굴에 대해 이야기했는지, 어쩐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