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화
본래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치가 비상하게 빠르던 사내다. 키시아르는 마주친 시선만으로도 유더가 지금 막 여기에 나타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챈 듯 아무런 변명도 없이 침묵만을 지켰다.
유더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대면 전술 게임 판을 만질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서 멈추었다.
이곳에 머문 건 고작 일주일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을 뿐인데, 가까운 거리에서 본 전술 게임 판에는 미세한 자국들이 가득했다. 일정한 위치에만 특히 더 진하게 남은 그 자국들을 보자 누군가가 칼로 배 속을 찔러 후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더는 치미는 감정을 그대로 내뱉으려다, 마주친 붉은 눈을 보며 일순 멈칫 입을 다물었다.
볼 것을 다 보고 진실을 알게 된 건 좋다. 그런데 무어라 해야 이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말이 될 수 있을까.
왜 이러고 계십니까?
왜 저에게까지 숨기셨습니까?
전부터 수상하다 싶었습니다. 전부 보았으니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
아니. 셋 모두 키시아르를 상대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나는 추궁을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방금 떠올린 말들은 어디를 보아도 범죄를 저지르다 걸린 이에게나 할 법한 어투로 나갈 게 뻔했다. 말하는 재주가 없다는 사실이 이런 식으로 사무치기는 또 처음이었다.
스스로가 답답하게 여겨져 한숨을 길게 내쉬자, 마침내 키시아르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영 답답하다는 표정이군.”
“……정확하시군요. 제게 말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참입니다.”
“없어도 괜찮지 않나. 그냥 전부 말하게. 나는 얌전히 들을 테니까.”
“그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말하고 싶지 않기에 이러는 겁니다.”
“듣는 내가 그렇게 여기지 않을 텐데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어려운 문제군.”
유더는 희미하게 입술 끝을 올리는 사내를 바라보며 충동적으로 물었다.
“……단장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먼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내게 할 말을 나에게 구하는 건가?”
“그러면 안 됩니까.”
조금 시비조에 가까운 어투로 답한 뒤 유더는 잠시 짧게 후회했다. 속내가 좋지 않다 보니 실로 오랜만에 반항적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오히려 방금보다 더 짙은 웃음을 흘렸을 뿐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은 물론 없지.”
“…….”
“나라면, 글쎄. 대화를 나눌 이의 주변을 살피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군. 대화의 시작은 그렇게 하는 편이 좋으니까.”
유더는 앉아 있는 사내의 주변을 훑었다.
잠시 후 혈색 없는 입술 사이로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리고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등불 하나 켜지 않은 곳에서, 겉옷도 걸치지 않으셨군요.”
“…….”
“추우실 테니 일단 불부터 켜겠습니다.”
손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눈을 한번 깜박이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작은 벽난로와 여기저기 놓여 있던 등불에 일제히 불씨가 훅 켜졌다.
뒤를 이어 허공에서 생성된 가느다란 물줄기가 춤추듯 부드럽게 날아 비어 있던 두 개의 찻잔 안에 쪼르르 쏟아졌다. 한 줄기 바람이 근처에 있던 찻잎을 떠다 옮기더니, 잠시 후 따뜻한 김이 잔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유더는 완성된 차 하나를 키시아르의 앞으로 밀어 옮겼다.
“드십시오.”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키시아르가 이내 찻잔을 들었다. 그가 혹시라도 마시지 않을까 싶어 조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유더도 그제야 제 몫의 차를 마시기 위해 맞은편에 앉았다.
따뜻하게 우려낸 물이 들어가니 과연 들끓던 내부가 조금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도 더욱 맑아졌다. 키시아르의 대화 시작 방법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래…… 중요한 건 해결이지. 상황 자체가 아니라.’
유더는 몇 모금을 더 마시는 동안 마침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결정했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보이는 이상행동의 기저에는 자기 자신을 극도로 억누르는 습관이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스스로에게 한없이 가혹하지만 그런 어려움조차도 웃으며 넘겨 버릴 수 있는 긍정적인 성정과 강한 힘. 그게 바로 지금의 그를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이성과 인내의 보호막에 둘러싸인 모습만이 키시아르의 전부는 아니다.
그도 결국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견뎌 내기 어려운 것도 태연히 견뎌낼 수 있는 이라 해서 한계가 없다는 건 아니었다. 이번과 같은 일이 그 좋은 예였지만 유더는 그보다 더 완벽하게 한계를 맞이한 키시아르의 모습도 알고 있었다.
바로 이전 생의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이전에 전술 게임을 통해 제가 겪어 왔던 것들을 알려 드렸을 때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하고 넘어갔던 한 가지가 있었지요.”
다소 뜬금없는 말이라 생각했는지 키시아르가 눈을 조금 빠르게 두어 번 깜박였다.
“중요한 부분이 아닌 것 같다고 하셨어도 그때 말했어야 했습니다. 이전의 단장님에 대해서 말입니다.”
잔을 어루만지던 키시아르의 손끝이 멈추었다.
“내가 그것과 관련된 이유로 이리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지 않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예. 모든 게 확연해져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해 달라고 말씀하셨었지요. 하지만 다른 것도 그리 확연해서 먼저 말씀드렸던 건 아니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분명한 의지를 띤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금빛이 일렁였다.
“저는 지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단장님께서는 뭐든 들어 주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그냥 들어 달라는 무언의 요청 앞에서 키시아르는 결국 더 말을 하지 못했다. 유더는 메마른 입술을 찻물로 축인 뒤 깊이 숨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이전 생의 키시아르에 대해 지금의 키시아르에게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키시아르와 관련된 한 무엇인들 유더의 마음대로 된 적이 있었던가.
시간을 되돌려 돌아왔음에도 눈앞의 사내는 단 한 번도 유더의 예측대로 되었던 적이 없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관계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모든 불확실함도, 두려움도, 깊었던 회한과 이제는 잊혀진 분노까지. 그 모든 것을 끌어모아 유더는 눈앞의 사내를 위하여 저만이 할 수 있을 말을 끄집어냈다.
설령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키시아르가 제게 깊이 실망하거나, 혹은 다른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렇다 해도…… 필요하다면 해야만 했다.
아니, 반드시 하고 싶었다.
“단장님께서는 지금의 저만을 아시겠지만, 저는 지금과 다른 단장님을 압니다.”
“…….”
“그분은 그릇에 재차 금이 가고, 주변 분들을 먼저 떠나보내셔야 했고, 단장 자리를 평민 출신 애송이에게 넘긴 뒤 물러났지만 끝내 스스로 세운 그 후계자의 손에 암살당하신 분이었지요.”
시간이 멈춘 듯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를 유더는 해묵은 고통 속에서 응시했다.
여태까지 주어진 단서와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은 했을 것이다. 때문에 지나치게 놀라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충격을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파도처럼 번지는 감정들이 그걸 증명해 보여 주었다.
“예. 그 후계자가 바로 저입니다.”
“유더.”
키시아르가 낮은 신음처럼 이름을 불렀다. 유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곳으로 돌아온 뒤 그때의 제 기억이 생각보다 확실치 않다는 걸 깨달았기에 알지 못하는 전후사정이 더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제가 그 일을 맡아 제법 성공적으로 끝마쳤던 건 확실합니다.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단 지금은 그때의 단장님이 어떤 분이셨는가 하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을 뿐이니까요.”
“…….”
유더는 눈앞의 패 하나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작은 시골에서 올라온 진짜 스무 살짜리 애송이가 어렵사리 마병단에 들어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단장의 첫인사였다.
“그때도 처음에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단장님의 그릇에 문제가 생긴 건 붉은 돌 회수 임무 이후였던 듯하니 그랬겠지요.”
하지만 그 이후로 키시아르는 단 내를 지금처럼 상세히 돌보지 못하게 된다. 그들이 이미 꿈으로 꾼 적이 있었던 검술 훈련 때의 개인적인 첫 만남도 그때쯤이었다.
“다른 단원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검술 훈련에 매진하던 저를, 밤 볼일을 다녀오시던 중에 마주쳐 가볍게 보아 주신 게 시작이었습니다.”
기가 막히게 트집을 잘 잡아대니 오기가 생겨 열심히 훈련을 했다. 그게 눈에 든 모양이었는지, 얼마 뒤 부단장 발표에서 이름이 불렸다. 귀찮게 느껴져서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내심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을 느낄 날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2성 발현과 동시에 사고가 터졌기 때문이다. 유더는 그 일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제법 오래 고민했으나, 결국 빠져나온 말은 간결했다.
“부단장으로서 단장님과 함께 의논을 하던 도중에, 갑자기 저의 2성 발현이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일어난 탓에 결과가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키시아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일주일쯤 지났고, 전에 없던 타인의 감정이 때때로 느껴지더군요. 단장님께서는 제게 그리된 이유를 찾아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아마 마지막까지 답을 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불확실한 어투인 이유는 그때의 기억을 이제 완전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뭐, 이후에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손쓸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몬스터 떼가 서부에 나타나 해당 지역의 대부분이 무너지기도 했고, 수많은 마병단원들이 죽거나 다쳐 단을 떠났습니다. 그 일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 저는 마병단장 후임으로 지명되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배웠지요.”
“…….”
케일루사 황제의 죽음도 그 일을 전후하여 일어났다. 카치안 황태자가 자리에 올랐고, 키시아르는 단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펠레타로 물러나신 후에도 조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반역 의도를 품고 있다는 소문이 빗발치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요. 그게 정말이었는지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제게 암살 명령이 떨어진 건 아마 의심의 여지가 없겠군요.”
키시아르가 물러난 지 일 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카치안 황제는 조용히 펠레타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황궁 기사들을 보내 간접적인 경고와 압박을 주는 것으로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소문이 강해지자, 그는 결국 유더를 불러 첫 번째 밀명을 내렸다.
유더는 그날 황궁의 정원에 숨겨진 비밀 통로 안에서 카치안 황제에게 받았던 검의 무게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임무를 성공시켰다는 보고는 따로 필요하지 않다. 내게 마병단의 존속이 필요할 이유를 증명해 보이도록 하라, 단장.’
키시아르의 목숨, 그리고 마병단의 미래.
둘 사이에서 유더는 후자를 선택하여 그 검으로 펠레타 공작의 암살을 자행했다.
고작 2년 정도나 될 법한 짧은 인연이 그렇게 끊어졌다.
“여기까지 들으셨다면 아시겠지만, 저는 그때의 단장님과 그리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알 수 없는 연결을 겪은 이후로 고통만을 안겨 준 상대.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사람.
그러나 그는 동시에 유더에게 모든 것을 가르친 스승. 마병단을 남겨 준 선임.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몸을 섞었던 상대이기도 했다.
유더는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해 보려 노력했지만 잘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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