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5화
키시아르가 머무는 숙소는 검소하고 고지식한 코엘트 남작이 소유한 오래된 저택에서도 가장 큰 곳이다. 여러 용도를 지닌 방들이 문을 통해 이어져 있어 구조를 잘 모르는 이는 빙빙 돌다 어느새 밖으로 나가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집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귀한 장치였다.
그런 곳의, 등불 하나 켜지 않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 작은 소리 하나에 의지해 나아가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겠지만 유더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대낮에 길을 걷는 이처럼 자연스럽게 장애물을 피해 걸었다.
마력의 혜안이 뚫린 이후로 그는 금색 눈동자로 변하지 않은 때에도 어둠 때문에 불편을 겪은 적이 거의 없었다.
딱. 또다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가 조금 가까워져서인지 이번에는 그 소리의 정체가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단단한 돌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찰나의 소음.
착각할 여지도 없이 그건 분명 전술 게임의 패가 판과 부딪치는 소리였다.
키시아르가, 혼자서 전술 게임을 두고 있는가?
‘어째서 이런 시간에. 혼자…….’
아니. 의문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접어 두자. 유더는 정신을 더욱 집중하며 기척을 한껏 죽였다. 기사들은 몸을 사용하여 자신의 기척을 죽이는 방법을 배우지만, 그는 필요할 때마다 힘을 써서 같은 효과를 더 훌륭하게 발휘할 줄 알았다.
- 휘이이…….
의지에 따라 끌려 나온 바람의 힘이 소리를 내지 않고 유더의 발과 몸 주변을 감쌌다. 주변을 흐르던 미세한 공기가 일제히 멈추는 듯한 감각과 함께 모든 소리가 멎었다. 이제 유더가 어떻게 움직여도 그의 기척을 눈치챌 이는 이 세상에 거의 없었다.
다시 돌아온 이후 이렇게까지 기척을 죽여 본 건 처음인데, 그게 하필 지금이라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키시아르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상이 생겼다면, 유더는 그것을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계속해서 걷는 동안 곤두선 감각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발처럼 허공을 더듬어 가야 할 방향을 찾아냈다.
그렇게 벽난로를 돌아, 벽면을 메운 긴 책장을 지나 세 번째 문을 넘기 직전.
마침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누군가의 윤곽이 보였다. 유더는 기민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을 삼킬 듯 잘게 빛나는 금발이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그가 누구인지 의심할 일은 없었다. 온몸을 흐르는 피가 그가 누구인지 몸부림치며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키시아르를 찾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유더의 추측과 같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달랐다.
육각형의 작은 판을 앞에 두고서 홀로 앉아 있는 사내는 어둠이 보이지 않는 듯 규칙적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손끝 너머로 딱, 딱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분명 평소와 같아 보이는 움직임. 그러나 무심한 침묵 속에서 그 손길이 만들어 낸 판 위의 형세는 조금 달랐다.
흰 패가 검은 패를 잡고, 이어서 또다시 검은 패가 흰 패를 잡는다. 한 번의 망설임조차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움직임이 그려 내는 궤적이 기이하게도 눈에 익었다.
‘저건…… 이전에 내가 두었던 두 번째 대국의 복기잖아.’
당혹스러운 감정에 저절로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키시아르는 단순히 홀로 대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유더와 함께 두었던 날의 대국을 그대로 재현하며 복기하고 있었다.
스스로 검은 패와 하얀 패를 번갈아 놓고 있는 손길에서 그때 그들이 두었던 패의 순서들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때 유더가 말을 움직이며 내보였던 찰나의 망설임조차도 완벽하게 재현하는 움직임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노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대국의 끝이 다가왔다.
여기저기 교묘하게 퍼져 있던 흰색 패들 사이로 마지막 열쇠 같은 패가 내리꽂힌 순간, 모든 빈틈이 메워지며 철저하게 계산된 아름다운 진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를 펼쳐 모든 것을 감싸 안는 것처럼 보이는 날개의 진형이었다.
적이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지 않는 완벽한 포위망.
두 번째 대국은 분명 그것이 완성되면서 끝이 났을 테지만…… 키시아르는 완성된 결과물에게 시선을 잠시 주지도 않고서 재차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패가 순서대로 제자리로 돌아가고 처음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 뒤에는 또다시 이전과 다르지 않은 움직임이 반복되었다. 다만 이번에 두고 있는 건 그들이 두었던 첫 번째 대국 때의 복기라는 게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그때쯤 되어서야 유더는 비로소 깨달았다.
저건 분명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대국 내용을 복기하는 것과는 달랐다. 키시아르의 손끝에서 재현되고 있는 건 게임의 정황만이 아닌, 그날 그들 사이에 오갔던 말과 감정의 모든 흐름이었다.
그때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외워 버린 게 아니라면 저런 식으로 복기할 수는 없다.
움직임은 분명 한없이 규칙적이고 우아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건 거기서 느껴지는 침착함이나 고요함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정함의 편린조차 내비치지 않는 침착함.
초조한 비명처럼 반복되는 고요함.
계속해서 자동인형처럼 움직이는 손끝 아래 놓이는 패들을 바라보며, 유더는 가슴 속에서 불현듯 퍼지는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한순간 전신의 털이 바싹 곤두서는 듯했던 그 한기는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 불시에 사라졌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그 정체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자고 일어났을 때도 느꼈던 그것은 유더의 감각이 아니었다. 제 것이 아닌 짙은 감정이 저쪽에서부터 불쑥 치밀고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진 탓에 남은 잔상에 가까웠다.
조금의 따뜻함도 없는 그 한기. 아주 잠깐 느꼈을 뿐이지만 여파는 상당했다.
한계까지 곤두선 신경이 스스로를 난도질하고, 얼어붙은 긴장감이 육신의 내부를 때리는 감각은 키시아르에게서 느낄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성질을 띠고 있었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거리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사이 키시아르는 두 번째 대국의 복기도 마무리하고 다시 패의 위치를 정돈했다. 어둠에 가린 얼굴은 그저 평범하게 대국에 몰두한 평소의 그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저 모습이 그렇게 평범하게 비치지 않았다.
어떤 움직임은 너무나 느리고 평온해 보이기에 오히려 소리 없는 초조함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 초조함.’
믿을 수 없지만 겉보기에 더없이 조용해 보이는 저 사내는, 지금 누구보다도 초조하게 대국을 반복하여 복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전 생에 유더가 겪어 왔던 모든 경험들을 담아낸 그 대국들을 한없이 반복하면 무언가 몰랐던 것을 알아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물 위로 올라올 듯 말 듯 찰랑거리는 싸늘한 감정들이 날을 세운 방향은 분명 외부가 아닌, 키시아르 자신의 내부였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참지 못하여 물방울처럼 튀어 오르고 만 초조함의 결과였다…….
‘그날 이후로… 계속 이랬던 건가?’
제 말을 믿어 주어서, 받아들여 주어서 다행이라고만 여겼다.
괜찮아 보였고, 앞으로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깊이 안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세계를 정복하고 싶다고 해도 도왔을 거라며 웃던 얼굴에서 느껴진 진심도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저 소리 없는 초조함도 분명 그날 키시아르가 느꼈을 감정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이제 알 것 같았다.
그가 유더와 몸을 섞는 동안에도 마지막까지 잠가 두고 내보이지 않으려 했던, 스스로를 향한 무정한 완고함의 일부가 지금 여기에 있었다.
한없이 그날의 패배와 승리를 반복하고 있는 사내의 얼굴은 깎아 만든 조각처럼 반듯하고 아름다워서 오히려 가슴을 아프게 할퀴었다.
‘…….’
유더의 머릿속에 그간 보았던 키시아르의 모습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옛 생각이 난다며 전술 게임 판을 지켜보던 여상한 모습.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농담을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맞추던 때의 부드러운 눈빛. 바쁜 와중에도 단장실 책상 위에서 사라지지 않던 그날의 게임 판.
그는 유더 아일에게만큼은 한결같이 솔직하게 굴며 멀쩡한 모습을 지켰다. 그러나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부분에서만큼은, 아예 솔직하게 대답해야 할 필요성조차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의 감정을 철저히 짓밟아 감추었던 것이다.
그가 느꼈을 초조함과 부정적인 감정들이 아마도 유더에게, 그리고 이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참으로 이성적인 결론이다.
하지만 완벽한 결론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뜨거움이 가슴 속에서 미친 듯 치밀었다. 인두를 상처 안에 처넣어 지졌을 때보다도 더 뜨거운 무언가가 목 안쪽을, 눈을, 머리를, 그리고 또 알 수 없는 어딘가를 마구 그을리고 태우는 듯했다.
여태 키시아르를 향한 믿음으로 마음을 지나치게 놓고 있었던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내부를 난자했다.
유더가 입술을 더욱 거세게 깨문 순간, 키시아르의 새로운 복기가 또 끝이 났다. 그는 또다시 복기를 반복할 듯 손을 뻗었다가는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멈칫했다.
다음 순간, 사내가 천천히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손에 낀 반지 안쪽을 어루만졌다. 유더가 알기로 그것은 분명 얼굴을 변용하는 마도구였는데, 바깥쪽에 박힌 보석이 아니라 안쪽의 금속 부분을 어루만지자 손바닥 안쪽에서 희미하게 빛이 나며 빛의 가루가 뿜어져 나왔다. 금빛 마력이 키시아르의 몸 위로 사르르 내려앉았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거기까지만 보였을 테지만 유더는 혜안을 통해 그 마력이 빚어낸 결과가 키시아르의 몸에 어떻게 작용하는지까지 함께 보았다.
빛의 가루를 머금은 피부 안쪽이 희미하게 빛나며 혈색이 돌았다. 평소보다 조금 핏기가 없던 입술도, 메말라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도 모두 충분한 물기를 되찾았다.
마치 사제에게서 활력 증진을 위한 신성력을 받았을 때와도 비슷한, 어쩌면 그보다 더욱 효과가 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단 주커만이 어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키시아르의 주변에서 마도구를 썼을 때와 같은 흐름의 변화를 느꼈다고 했었지.’
그가 얼굴을 변용하는 마도구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잠시 시험했을 수도 있다 여겼지만 눈앞에서 보고 난 결과물을 보니 그게 아님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유더는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몸을 두른 고요한 바람의 힘을 스스로 거두었다.
그러기 무섭게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렸다.
두 개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마주쳤다.
“……이런.”
키시아르의 입술 사이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