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화
“음… 답하기 전에 내 기분과 별개로 이 질문은 먼저 해야 할 것 같군. …‘시기’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데 그 부분은 괜찮겠나?”
‘시기’로 지칭된 건 당연히도 발정기를 의미한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터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 2성 발현자와 계속 밤을 함께 보내겠다는 선언이 얼마나 위험하게 들릴 수 있는지는 유더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몇 달 전쯤의 나였다면 아무리 신경이 쓰인다 해도 먼저 이런 말까지 꺼내진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유더는 저를 걱정하는 말을 하며 동시에 신중히 얼굴을 살피는 사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새삼스러우시군요. 괜찮지 않았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덤덤하게 내뱉는 말임에도 그 안에 내포된 뜻은 결코 평이하지 않았다. 유더는 조용히 저를 바라보는 사내를 향하여 단호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니면, 혹 저를 계속 들이기 어려우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그럴 리 있겠나.”
결국 키시아르가 졌다는 듯 손을 들고 웃음을 흘렸다. 스스로의 얼굴을 쓸어내린 사내의 입술을 타고 긴 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보니 아무래도 내 보좌가 나를 반드시 곁에 두고 살피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야. 그렇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좋아.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게.”
키시아르가 선선히 수락의 뜻을 밝혔다.
유더는 당당히 원하는 바를 쟁취하여 그날 밤 곧바로 짐을 키시아르의 침실로 옮겼다.
“…그래서, 이후로는 별일이 없으셨습니까.”
다음날, 나단 주커만이 조용히 물었다. 그와 유더는 키시아르의 동태와 관련된 정보 교환을 하기 위해 재차 조심스러운 만남을 가진 참이었다.
유더가 키시아르의 침실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사는 그리 놀라지 않은 얼굴로 이후의 상황만을 간략히 물었다. 정보 교환을 위해 대화하기에는 참으로 좋은 상대였다.
“네. 평소처럼 일을 마무리한 뒤 저와 이야기를 나누다 주무시더군요. 새벽까지 자지 않고 확인했으니 확실합니다.”
“하지만 하루 정도로 안심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당연하지요.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
유더의 단호한 답을 들은 나단 주커만이 잠자코 테이블 위의 빈 디저트 그릇을 교체했다. 새로운 파이가 같은 자리에 또다시 쌓였다. 거의 없애도 없애도 계속 나타나는 몬스터를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주커만 경 쪽은 어떠셨습니까. 평소와 다른 부분은 없으셨습니까?”
“제 쪽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딱히 이상한 부분은 느끼지 못했습니다만…….”
“이상한 부분 외에 신경 쓰이는 뭔가가 있으셨습니까?”
“일 때문에 잠시 공작님 곁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 주변 힘의 흐름이 조금 바뀐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마도구를 사용할 때 주로 생기는 변화에 가까웠습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마도구라……. 그렇군요.”
지극히 공적인 대화가 몇 번 더 오고 간 뒤,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단 주커만이 빈 그릇들을 치우고는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보니 말린 잎을 빻아 만든 환약이었다.
“이건 뭡니까.”
“펠레타 기사단에서 밤을 새는 임무를 할 때 지급하는 회복제입니다. 어제도 그렇고 앞으로도 잠을 많이 자지 못하실 것 같으니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만…….”
“물론 나름대로 방법이 있으시겠지만 받아 두셔서 나쁠 건 없을 겁니다. 아일 경의 얼굴에 잠을 설친 기색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공작님께서 바로 눈치채실 테니 그냥 가져가시죠.”
키시아르의 이름까지 들먹이니 거절하기가 어려워졌다. 유더는 미묘한 얼굴로 감사를 표하며 그것을 받아 먹었다.
그리고 삼일이 더 흘렀다.
키시아르는 여전히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유더는 방심하지 않고 최대한 잠을 줄여 지켜보았으나, 더는 전술 게임 판에 손대지도 않고 얌전히 잠만 잘 뿐이었다.
덕분에 유더 또한 이전처럼 한기를 느끼며 갑자기 깨어나는 일 없이 평온한 밤을 보냈다. 잠이 조금 모자라긴 해도 이전 생에서 며칠씩 자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러 다녔던 걸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약과였다.
‘나단 주커만이 준 회복제가 의외로 괜찮기도 하고.’
어차피 서부에서 보낼 날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유더는 필사적으로 시험에 임하는 각성자들을 놓치지 않고 응시하며 머릿속으로 그들의 잠재력과 능력, 정보를 모두 평가했다.
서부의 지원자들 중에는 자질이 괜찮은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더의 시선을 끈 이들은 마티와 함께 구출되었던 나그란의 별 서부 거점 출신 각성자들이었다. 그들은 마티처럼 본래 비각성자였으나 서부 지부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제정신을 차린 끝에 각성을 하게 된 이들이었는데, 겪어 온 경험이 만만치 않은 덕인지 제법 강력한 보호 관련 능력들을 얻었다.
그들과 마티 같은 이들이 잘만 성장해 준다면 서부 지부는 그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방어 능력을 지닌 지부가 되리라.
‘지부장인 에문의 능력도 어둠을 틈타 몸을 숨기는 은밀한 계열이니 그런 이들과 성향이 잘 맞을 거야.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되는군.’
이전 생에도 각 지역 지부별로 포진된 각성자들의 성향에는 제법 특정한 성질이 있는 편이었다. 이제는 각성자가 지니는 능력이 어떤 식으로 생기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기에 그런 성향 차이가 어떻게 고정되었을지도 짐작이 되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부분이 있으면 부정적인 부분도 존재하는 법.
서부 지원자들 중에는 불순한 의도를 품고 숨어들어 온 간자 출신들도 아주 많았다. 유더가 한 놈을 집어 날려 보낸 이후로 갑작스레 시험을 그만두고 도망친 자들이 많았는데,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린 놈들을 이후에도 몇 명 더 잡아냈다.
그들 대부분은 서부의 귀족들이 고용하여 보낸 용병 출신 간자로 밝혀졌다.
에문을 비롯한 기존의 서부 지부 단원들은 그런 놈들을 1차 시험에서 걸러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으나, 그 충격을 이내 분노와 오기로 승화하는 데 성공했다.
단장과 단장 보좌가 그들을 주저앉아 있을 틈도 없도록 사이좋게 잘 굴려 주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에문이 한 건 해주기는 했지.’
에문은 바쁜 와중에도 1차 시험조차 치르지 못하고 하마터면 거짓말쟁이로 몰려 쫓겨날 뻔한 어느 각성자의 자질을 알아보고 합격시키는 훌륭한 일을 했다. 그 각성자의 이름을 2차 시험 명단에서 본 유더는 과거 칸나 완드를 지원서 접수 장소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바로 그 사람이 지금 마지막 시험을 보기 위해 유더의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글로에입니다.”
성이 없는 평민 소녀 글로에. 지금은 고작 열여섯밖에 안 된 그녀는 이전 생에서 유더가 이끌었던 마병단의 정과 부단장을 가장 오랫동안 맡았던 사람이었다.
‘유랑 극단 출신. 어린 시절부터 카드점을 치고 돈을 받으며 살았다지.’
그래서인지 그녀의 각성 능력 또한 들고 있는 낡은 카드를 매개체로 발휘되었다.
“제 능력은 이 카드로 점을 쳐서… 미래에 필요한 축복을 드리는 거예요. 하루에… 한 번만 할 수 있지만…… 효과는 확실해요.”
얼굴을 대부분 가린 길고 부스스한 검은 머리칼과 음울한 목소리 때문에 축복이란 단어가 꼭 저주처럼 들렸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지 으스스한 얼굴로 팔을 문지르는 자들이 간혹 보였다.
“진짜일까? 안 믿기는데…….”
“미래에 필요한 축복이라니. 너무 명확하지 못한 능력이잖아? 1차를 어떻게 통과한 거야?”
“야, 에문. 너 뭘 믿고 저 분을 합격시켰어?”
단원 중 누군가가 에문의 옆구리를 찌르자 에문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보기나 해. 저 사람 능력은 진짜니까.”
‘그래. 진짜지. 그것도 아주 대단한.’
“지금부터 능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저에게 점을 받으실 분… 계신가요?”
글로에가 주변을 슥 훑자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다른 곳을 보았다. 1차 시험에서 그녀를 합격시킨 에문은 참여할 수 없었기에 예외였다.
유더는 더욱 음울해지는 글로에를 바라보다 손을 들었다.
“저에게 해 주시죠.”
“아! 네……. 알겠습니다…….”
글로에도 유더가 누구인지는 알았는지, 일순 얼굴이 더욱 파랗게 질렸다. 안색이 물귀신처럼 음울해지며 주변의 온도가 일순 5도쯤 내려간 듯 변화했으나 유더는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섰다.
글로에가 낡은 카드를 테이블 위에 두고 이리저리 섞은 뒤 다섯 장을 뽑아 내려두었다.
“이… 다섯 장 중에서 한 장을 뽑아 주세요.”
유더는 서슴없이 가운데 카드를 골랐다. 뒤집은 카드 속에는 뾰족한 모자를 쓴 광대가 나팔을 불며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본 글로에가 조용히 카드의 이름을 읊었다.
“나팔광대의 축제.”
그 순간, 카드에서 희미하고 투명한 아지랑이가 솟아오르더니 유더에게로 스며들었다. 아주 따뜻하고도 신비한 기분이었다.
“당신의 몸을 노리는 위기를 한 번 막아줄 축복이 걸렸어요.”
“진짜야?”
“여기서 봐서는 모르겠는데…….”
“유더에게… 몸의 위험? 그런 게 올 수 있긴 해? 이거 아무래도 효과 확인을 못할 것 같은데.”
서부 단원들이 쑥덕거리며 축복의 진실성에 의문을 갖자 글로에가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보통은 거의 바로 확인 가능한 축복이나 하루 내로 알 수 있는 축복이 걸리는데……. 거짓말 아니에요. 진짜예요.”
“압니다.”
“네?”
“합격이란 뜻입니다.”
“네?”
“마병단에 일찍 지원해 줘서 오히려 고맙군요. 혹시 수도 쪽으로 올 마음이 있다면 에문 필랑에게 언제든 말하길 바랍니다. 바로 자리를 마련해 두죠.”
“……네?!”
글로에가 귀를 의심하는 사이, 유더는 그녀에게 한 가지 사항을 더 물었다. 답변을 듣고는 담담히 심사석으로 돌아와 앉은 그를 향해,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그리 대단한 이인가?”
“축복이라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지에 가깝습니다. 저 사람이 마병단에 이렇게 일찍 와 준 건 대단한 행운입니다.”
유더가 알기로 글로에의 카드가 거는 축복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고, 정도의 차이가 존재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어떤 축복이 걸리는지 미리 안다면 제게 어떤 위험이, 얼마만큼 강하게 일어날지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보좌는 마지막에 무엇을 더 물었지?”
“그 카드가 어느 정도로 강한 축복을 의미하는지 물었습니다.”
“답은 뭐라고 하던가.”
“현재 본인의 카드에서 나올 수 있는 축복 중 가장 강한 축복이라고 하더군요.”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듯, 키시아르의 눈빛이 일순 조금 변화했다.
“그건…….”
“아무래도 제가 서부에서 남부로 가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을 모양입니다.”
하지만 대비할 기회를 미리 얻었으니 어찌 보면 행운이다.
그리 생각하며 답했으나, 키시아르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크게 하루 내로는 결과가 나온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출발을 하루 미루어야겠군.”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괜찮아. 위험을 통제할 수 없는 외부보다는 이곳에 있는 편이 낫지 않겠나.”
결국 키시아르는 서부에서 출발할 날짜를 하루 미루었다.
‘음… 나단 주커만이 준 회복제도 이제 동이 났는데……. 뭐,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그러나 그날 새벽, 유더는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잠든 줄도 모르게 잠들었다는 사실에 당혹해하며 눈을 깜박인 순간, 어둠 속에서 어디선가 작게 딱 하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당혹감이 일시에 사라지고 서늘한 추위가 몸을 감쌌다. 반사적으로 매만져 본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유더는 지금이 바로 키시아르의 이상을 확인할 절호의 기회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