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03화 (603/805)

603화

한 놈을 보기 좋게 날려 보낸 이후, 나머지 시험은 아주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잘 마무리되었다. 불합격 통지를 납득하지 못하겠다며 난리를 피우는 놈도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시험장을 둘러싼 공기의 온도는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본래 시험을 보기 위해 온 지원자들은 여태까지 시험장 구석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심사자를 그리 신경 쓰지 않았었다. 심사자들은 기존의 마병단원이란 사실만 알려졌을 뿐, 부러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그들의 인상착의 또한 지나치게 눈에 띄지 않게 잘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 중 한 사람이 그 유명한 유더 아일이었다.

‘맙소사! 평민 출신으로 황제에게 남작 작위까지 받았다는 바로 그 사람이 수도가 아니라 여기 있었다고?’

‘저렇게 거대한 힘을 편하게 다루는 사람은 처음 봐. 서부의 대삼림을 혼자 반쯤 무너뜨렸다던 유더 아일이 아니라면 누가 저런 힘을 다룰 수 있겠어…….’

‘무서운 힘이다. 저런 사람이 부단장도 아니고 그저 마병단장 보좌라니……. 내가 정말 마병단에 들어갈 수 있을까?’

바람, 그리고 땅. 하나도 쓰기 힘든 자연의 힘을 두 가지나 동시에 쓰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그는 심지어 주변의 그 누구도 말려들지 않도록 조절하면서 그 모든 일을 해냈다.

사람 하나를 거침없이 날려 보내고 나서도 땀방울 하나 비추지 않고 도로 제자리에 앉는 그의 모습은 제 영역을 지키는 맹수를 연상케 했다. 찔리는 게 있는 자들은 그 모습에 절로 소름이 끼쳤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경외를 느끼며 눈을 빛냈다.

그날의 시험이 마무리된 이후, 수많은 각성자들이 유더가 있을 심사석을 향하여 몰려든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어? 없어…….”

“방금까지 분명 앉아 있었는데 어딜 간 거지?”

“…….”

“다들 아쉬워하는데, 내려가서 조금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 않겠나?”

지원자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심사석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함께 심사를 했던 다른 마병단원들을 찾아 떠나는 동안 유더는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늘 위에 떠 있음에도 그의 몸 주변에는 바람 한 줄기 불지 않았고, 발아래는 땅을 딛고 있는 듯 안정적이었다. 바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면 아마 이렇듯 단단하고도 고요히 허공에 떠 있기는 어려웠으리라.

‘그리고 애초에 남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위로 올라오는 것도 어려웠겠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새총에 걸린 돌처럼 하늘 위로 쏘아져 올라온 힘.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 바로 지금 손을 잡은 채 곁에 서 있는 키시아르의 능력 덕분이었다.

유더는 지금 이 순간에도 땅에서 두 사람의 발을 밀어내고 있을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려간다면 그때야말로 단장님의 정체 또한 모두가 궁금해하게 되겠지요.”

“그도 그렇군.”

사람 둘을 균일한 높이로 밀어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힘을 쓰고 있을 텐데도 그의 얼굴은 그저 여유로워 보였다. 이 정도 힘쯤은 그릇이 충분히 견뎌 내는 모양이었다.

깔끔하게 미소를 지은 사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면 시험장을 벗어난 뒤 내려갈까? 무서우면 꽉 잡게.”

키시아르는 유더를 이끌고 평지를 산책하듯 유유히 걷기 시작했다. 발아래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를 따라 걸으니 무언가가 발바닥을 받쳐 주는 것처럼 밀어내는 감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땅과 계단이라도 존재하는 듯했다.

본래 바람을 밟고 뛰는 데 익숙했던 유더는 이 경험이 낯설긴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밀어내는 따뜻한 햇볕. 불편하지 않은 침묵 속에서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와 깍지를 낀 길고 흰 손가락이 하릴없이 흔들거렸다. 이토록 대단하고 소소한 산책을 즐겨 본 이는 아마 이 세상에 셋은 없었으리라.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유더가 낀 장갑 때문에 맞잡은 손의 온기를 바로 느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왜 자꾸 움직이지? 자세가 불편한가?”

“아뇨.”

유감스러운 마음이 몸에 적용된 모양인지, 키시아르가 걷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유더는 망설이다 깍지를 낀 손을 풀어냈다. 그리고는 키시아르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화하기 전, 한 손에 낀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가차 없이 쑤셔 넣으며 입을 열었다.

“장갑을 벗을지 말지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되었으니 다시 잡아도 되겠습니까?”

“아…….”

키시아르가 재차 웃었다.

“그런 거였군. 물론 나야 좋고말고.”

이번에는 유더 쪽에서 키시아르의 손에 먼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차갑지 않나?”

“괜찮습니다.”

보온 기능을 새긴 장갑을 끼고 있어 내내 따뜻했던 손이 키시아르의 서늘한 손과 맞닿자 확실히 차갑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단장님이야말로 제 손이 거칠어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그럴 리가. 그래서 더욱 멋지고 좋다고 내가 말한 적이 없었던가?”

키시아르가 농을 치며 웃었다. 유더는 마주 웃는 대신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그래서 오히려 좋다고 생각합니다.”

키시아르가 잠시 침묵하다가는, 잡은 손에 조금 더 지그시 힘을 주었다. 유더는 그보다 더 강한 힘을 돌려주었다. 맞닿은 손바닥의 오목한 부분 사이로 새로운 열기가 고였다. 그 어떤 차가운 바람도 침범할 수 없을 작고 따뜻한 공간이었다.

기분 좋은 침묵 속에서, 유더는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뭐라도 말하려면 지금이 적기이기는 한데.’

누구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 드높은 허공에 둘만 있는 상황이니 남의 이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키시아르의 미묘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지금이 가장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 미소를 보고 어떻게 그 속에 유더조차 모를 다른 어떤 뭔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유더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조금 다른 말이었다.

“서부는…… 언제쯤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2차 시험이 마무리되고 나면 곧 가야겠지. 그 전후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기는 하지만 3일을 넘기지는 않을 생각이야.”

키시아르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따로 더 해야 할 일이 있으십니까?”

“코엘트 남작이 바쁜 와중에도 감옥 4층에서 나온 자료들을 줄곧 조사 중이었다는 건 기억하고 있겠지?”

“초대 타인 공작이 연구했던 몬스터와 관련된 그림과 관찰 자료들 말씀이군요.”

“그래. 그걸 전부 읽으며 그가 가진 고대 언어 자료들을 토대로 살핀 결과, 초대 타인 공작이 연구한 몬스터의 부산물과 사체를 어떤 특정 지역과 장소로 모두 모아 보냈었다는 걸 알아냈다더군.”

일지에는 그리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았던 기록이었다.

“남작의 추측으로는 서부와 남부 사이에 있는 곳이야. 어차피 서부 이후에는 남부로 갈 생각이니 가는 도중에 들러야겠지. 그리고 그 근처에 들러야 할 곳이 하나 더 있네.”

“또 어디입니까.”

“황태자가 사람을 시켜 독버섯을 구해 오도록 했던 곳. 운 좋게도 먼저 말했던 장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지. 상당한 산골이기는 하다지만 우리의 이동 속도 정도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카치안 황태자가 레노어 샨 아페토를 죽이기 위해 몰래 구해 왔던 독버섯. 그건 유더가 미래의 정보로 버섯의 정체를 미리 파악하고 키시아르에게 알려 폭로한 뒤, 아페토 가와 황태자 사이의 거리를 영원히 벌리고자 관련 정보를 제공하면서 끝난 일이 아니었던가?

“그때의 일로 혹 또다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겁니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나 할까.”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부드럽고 차가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 독버섯은 그 지역에서만 나는 물건은 아니었는데, 황태자가 굳이 거기서 그것을 구하고 정제해 온 이유가 새삼 알고 싶어져서 말이네, 이번에 재차 조사를 명해 두었었거든.”

“그래서……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의심이 많은 이는 자신이 이미 걸어 본 땅만 걷는다는 말이 있지 않나?”

오래된 말을 인용한 대답을 들은 순간 유더는 그가 무엇을 알기 위해 조사하려 했는지 곧바로 깨달았다.

‘황태자와 본디 연이 깊은 땅이었기에 그곳에서 굳이 버섯을 구했을 거라 생각하여 재조사한 거군.’

그리고 굳이 직접 가 보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분명 어딘가에서 관련된 꼬리를 잡아낸 것이리라.

유더의 생각이 맞다는 걸 증명하듯 사내가 말을 이었다.

“황태자가 처음 수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디아카 공작은 그를 동부 출생이라 소개했었네. 정확히는 공작의 사촌이 낳은 딸의 자식이라고 했었지. 부모는 일찍 잃었으나 공작가의 도움을 받아 곱게 자라 온 훌륭한 방계 핏줄 도련님. 그게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카치안 라 오르였네. 당시 다른 황태자 후보들과 비교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는, 바꿔 말하자면 특출하지 않은 출신이었다는 뜻이지.”

그리고 그 말대로라면 황태자는 서부의 깡촌 따위와는 전혀 연이 없는 인생을 살아왔어야 말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했던가.

유더는 카치안 라 오르가 얼마나 의심이 많은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쥐여진 모든 것에 대해 남김없이 알기를 원했고,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들키지 않고 사람을 죽여 키시아르를 함정에 몰아넣을 음모를 꾸미면서 잘 알지 못하는 지역의, 알지 못하는 독을 쓸 리 없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그 지역은 황태자가 이전부터 잘 알고 있는 곳이었으리라.

“해당 지역이 디아카 가와 어떤 연관이 있는 곳은 당연히 아니겠지요.”

“그래. 아무런 연관도 없네. 황태자가 굳이 그곳에서 독버섯을 얻은 이유가 실은 내 추측과 다를 수도 있겠지. 또 다른 이가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고, 알 수 없는 어떤 요인이 작용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단장님의 추측이 맞고, 그 증거를 혹 저희가 잡아낼 수 있다면…… 엄청난 일이 되겠군요.”

“맞아.”

키시아르가 흔쾌히 답했다.

“이번에 재조사를 하면서 독버섯을 정제한 마을 근처를 전부 샅샅이 뒤진 결과, 몇 년 전에 어떤 귀족들이 그 마을에 여름을 보내기 위해 들렀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네. 참 재미있게도 디아카 공작가의 방계 가문 이름이 거기서 갑자기 튀어나오더군. 이 정도면 우리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볼 만하지 않나?”

과연 그럴 만했다. 아랫사람들만 시키면 어떤 빈틈이 생길지 몰라도, 키시아르와 제가 직접 나서는 이상 그럴 확률은 극히 적어질 터였다.

“대체 언제 그런 조사까지 다 하신 겁니까.”

“나도 재조사를 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네. 운이 좋았을 뿐이야.”

겸손하게도 운에 모든 공을 돌리는 자연스러운 한마디.

하지만 그 한마디가 흥분으로 잠시 열기를 띠었던 유더의 이성을 도로 가라앉혔다.

‘…….’

무언가 묘한 기분이 느껴져 재차 바라본 키시아르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자, 코엘트 남작의 집까지 다 왔군. 오늘은 시험을 감독하다 말고 힘까지 썼으니 저녁 식사 이후 바로 쉬게.”

“단장님은 안 쉬십니까.”

“물론 나도 쉬어야지.”

유더는 그의 대답을 들으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폈다.

“……정말 쉬실 생각, 맞으시지요.”

“이런. 가짜로 쉬기라도 할 것 같아서 그런가? 슬프게도 아직 그런 재주는 없는데.”

사내가 넉살 좋게 고개를 저었다.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고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변용한 마법에 가렸어도 변함없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두 눈. 물어보면 무엇이든 솔직하게 대답해 줄 것 같은 입술이 유더를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가 찾아가서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야. 언제든 환영이네.”

“내일도, 그다음에도 계속 단장님의 침실에서 자도 괜찮겠느냐는 뜻입니다만.”

그러자 키시아르의 표정이 처음으로 조금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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