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화
“그렇지만 저는 얼마 전부터 뭔가가, 자꾸 묘하게 느껴집니다.”
뭔가가 묘하게 느껴진다. 설명이라고 하기도 무엇한 수준이었으나 나단 주커만은 그게 뭐냐고 반문하지 않았다. 더 자세히 알려 달라는 요청 또한 없었다.
그저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 얼굴로 유더를 응시하다가 딱 한 가지만을 물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그러셨습니까.”
언제부터 그랬을까. 기억이 오늘을 넘어 어제로, 어제를 넘어 그 전으로 쏜살같이 거꾸로 흘러 넘어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건 수도를 떠난 다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만…….”
자다가 키시아르의 부재에 기이한 한기를 느끼며 처음 일어나 본 게 그때쯤이었다. 그렇지만 전술 게임 판이 키시아르의 곁에 붙어 있는 모습을 목격한 건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딱히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때로부터 따져 보아도…….
“……전에 보이지 않던 작은 변화는 그 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더는 나단 주커만의 시선을 마주하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제가 주커만 경의 조언을 받고 단장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그때 이후부터였던 것 같군요.”
그래. 함께 전술 게임을 두었던 날 이후부터였다. 키시아르가 그 판을 단장실에서 없애지 않고 계속 곁에 두었던 게 말이다.
“…….”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사실 제가 너무 과민하게 걱정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글쎄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나단 주커만이 빠르게 대답했다.
“아일 경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실제로 뭔가 있는 거겠지요.”
“주커만 경도 뭔가 느끼신 겁니까?”
“아뇨.”
약간 당혹스러울 정도로 빠르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제가 보기에도 평소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으셨습니다.”
“전술 게임 판을 전보다 자주 곁에 두고 있으신데도 말입니까.”
“그랬던 것 같기는 하군요. 하지만 그건 펠레타에 있으실 때도 간혹 하셨던 일입니다. 특별히 마음에 드는 대국을 하셨거나, 답을 오래 찾아야 할 만큼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는 며칠 내내 밥을 먹을 때도 전술 게임을 곁에 두고 계시기도 했었지요.”
“그러면 왜 방금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제가 이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해서 아일 경이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
“당신은 다르지 않습니까.”
당신은 다르다. 침착하게 흘러나온 그 말이 도리어 유더의 생각을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그간 보아 온 바, 아일 경이 주군의 이상을 의심한다면 당장 납득할 이유가 없다 해도 한 번은 믿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군의 속내와 생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키시아르를 지키기 위해 유더를 계속 의심하고 경계하라 일렀던 것 같은데, 눈앞의 기사가 하는 말만 들어서는 오히려 그 반대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짙은 군청색 눈동자는 당연한 명제를 말하듯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유더는 겨우 당혹을 갈무리하며 중얼거렸다.
“제가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쪽이 오히려 놀랍군요.”
“주커만 경이 있는데 제가 단장님에 대해 더 잘 안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군요.”
“글쎄요. 안다는 건 단순히 세월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0년간 검을 수련한 기사가 1년을 수련한 이들보다도 검에 대해 모르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키올레 다 디아카 같은 자의 혈압을 올릴 만한 대답을 한 기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흠 하는 소리를 흘렸다. 잠시 후 그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내려놓았던 과자 상자를 다시 들고서 눈짓을 했다.
“아무래도 이런 구석에서 이야기를 계속 나누기는 좀 그렇군요. 제 방에서 잠시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살다 보니 키시아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나단 주커만의 방에서 차를 마실 일이 다 생긴다. 유더는 제게 주어진 방과 다를 바 없는 구조를 지닌 깔끔한 손님용 방에 앉아 나단 주커만이 내민 찻잔과 과자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키시아르의 명으로 사 온 과자를 여기서 이렇게 바로 먹어도 될지 의심스러웠지만, 어차피 키시아르는 그런 정도로 무어라 할 이는 아니다. 알아서 하겠거니 싶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유더가 차를 입에 대는 모습을 흘긋 바라본 기사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라고 주군에 대해 모든 걸 잘 아는 건 아닙니다.”
“어린 시절부터 단장님을 모시지 않으셨습니까?”
“정확히는 아홉 살 때부터였지요. 여름을 나기 위해 남쪽의 별궁에 오셨던 2황자님께서 발 하나 제대로 씻기지 못하는 덜떨어진 하인이었던 저를 거두어 주신 게 말입니다.”
이전 생에도 나단 주커만의 얼굴을 제법 많이 보았다고 생각한다. 2성 발현으로 인한 사고 직후 수습을 맡아 준 것도 눈앞의 충성스러운 기사였으며, 키시아르의 말을 듣지 않고 거친 태도를 보였다가 그와 1대1로 대련을 벌인 적도 있었다.
‘양쪽 모두 상처를 입고 나단 주커만이 숨겨진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대단한 사고였지.’
하지만 이렇게 자세한 정보는 처음으로 들었다.
어쩌면 남에게 그리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일 텐데도 나단 주커만의 목소리에는 저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인에서 시종으로, 시종에서 다시 2황자님의 가장 가까운 수석 시종이자 검을 배우는 제자로, 펠레타로 가신 뒤에는 부관이 되어 계속해서 섬겼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가까운 곳에서 모신다는 건 그분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히 눈을 감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사는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말이 없었다. 머나먼 어딘가를 더듬는 듯한 시선이 연한 붉은빛을 띤 찻물 속에 꽂혔다.
“저는 그분이 가장 고통스러워하실 때 아무것도 도울 수 없었고, 죽음을 앞두신 순간에도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곁을 떠나 성의 모든 이들을 물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게 주어진 한계입니다.”
“…….”
“하지만 당신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으시지요. 뭐든 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 말은 일전, 금서를 빌렸던 키시아르에 대해 그가 유더에게 했던 말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들렸다.
유더가 마병단과 펠레타 기사단을 넘어 나단 자신과 키시아르, 그리고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이처럼 느껴진다던 그 말.
다만 그때와 달라진 건 이전까지 나단 주커만이 유더에게 늘 내보이던 복잡한 눈빛과 어떤 고민 같은 부분이 지금 이 순간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유더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하지만 확신 없이 뭐든 했다가, 단장님께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면 어떻게 합니까.”
기사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졌다.
“……그런 말을 아일 경에게 들으니 어쩐지 조금 신기하군요.”
“뭐가 이상합니까?”
“아닙니다. 뭐. 어쨌든 뭔가 있다 생각하신다면 제게 묻지 마시고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아일 경이라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군께 그리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키실 것 같지는 않군요.”
“…….”
나단 주커만에게 들으리라고는 생각한 적 없는 말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전 생의 그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그 과정에서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일단 들어 보고 도와드릴 수 있는 건 도와드리지요. 진 빚이 있으니까요.”
유더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일 듯 말 듯 한 아지랑이처럼 느껴지던 미묘함이 서서히 그의 가슴 속에서 형체를 가지고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을 완전히 정리하고 입을 여는 긴 시간 동안 나단 주커만은 잠자코 차를 마시며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그 적당한 거리감이 유더에게 마침내 확신을 주었다.
‘그래. 어쩌면 지금의 혼란조차도 키시아르가 내게서 무언가를 완벽히 숨기고 있기에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르지. 알아내면 전부 끝날 일이다.’
그는 반쯤 식은 차를 한 번에 모두 들이켠 뒤 어느샌가 사라진 빈 그릇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히 받지요. 일단 알아서 해 보겠습니다.”
“예.”
“다만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주커만 경이 보기에 단장님께서 저나 당신에게조차 속내를 숨기고 일부러 평소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면 가장 가능성 높을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이게 적당한 답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단 주커만의 묵직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제가 아는 한 주군께서 가장 가까운 분들께 평온을 가장하시며 뭔가를 숨기려 하실 때는 주로 스스로를 제어하기 어렵다고 느끼실 때였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제어하기 어려울 때.
그 말에 담겨 있을 많은 의미가 유더의 머리를 빛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여유롭고 배려심 있는 인간이지만, 단 하나, 한없이 완고해지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건 바로 키시아르, 자기 자신이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유더는 나단 주커만에게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다.
***
“다음! 439번 지원자, 시커!”
서부의 마병단 지원자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건장한 젊은 사내가 기합을 내지르자 그의 다리 근육이 폭발적으로 부풀었다.
“흐아압!”
땅을 박차는 쿵 소리와 함께 몸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주변의 많은 이들이 감탄의 소리를 흘렸다.
“오오…….”
거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뛰어올랐던 사내가 잠시 후 다시 제자리에 착지하자 엄청난 충격과 함께 바닥이 움푹 파였다. 그는 순수한 다리의 힘만으로 성벽만큼의 높이를 점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뛰어난 각성자였다.
‘……하지만 저 녀석을 붙이면 1년도 되지 않아 그만두고, 그 이후 귀족파에서 보낸 간자라는 걸 알게 되지. 성실해 보이는 얼굴로 지부의 1년 어치 정보를 들고 튀었었던가.’
사내를 한없이 서늘하게 바라본 유더는 이내 제 앞에 놓인 종이에 적힌 이름에 줄을 그었다. 시커는 이번에 마병단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가 그은 줄을 본 옆좌석의 키시아르가 여상히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불합격이군.”
“네.”
“동부보다 이곳에 걸리는 이들이 많군 그래.”
“아쉬우시다면 붙이셔도 됩니다.”
“내가 그럴 리가.”
키시아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유더는 그 화사한 미소를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그리고 자세히 쳐다보았다.
코엘트 남작의 저택에서 전술 게임을 앞에 두고 술을 마셨던 밤 이후로 키시아르가 같은 일을 한 적은 없었다. 유더가 그의 태도에서 미묘함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의도한 행동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뭘 물어볼 틈이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쯤 되면 사실 의도한 거라고 확신해도 되겠지.’
아침부터 뭔가 좀 오래 쳐다보거나, 제대로 된 말을 할라치면 키시아르가 생각을 끊을 만한 말을 하거나 농을 치는 일을 세 번쯤 겪었다. 유더조차 눈치채기 힘들 만큼 교묘한 화술의 결정체였다.
‘보라고. 지금만 해도…….’
“왜 그렇게 오래 쳐다보지? 이 변용한 얼굴이 설마 내 평소 얼굴보다 더 마음에 드는 건 아닐 테고.”
키시아르가 유더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리며 눈을 휘었다.
“……방금 지원자가 땅을 뒤흔들었을 때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셨습니다.”
“그래? 난 모르겠는데.”
몇번 성의 없이 빗더니 정리해 달라며 머리를 숙여 들이미는 움직임이 아주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뻗어 평범한 갈색이 된 머리칼을 매만졌다. 눈에는 푸석푸석해 보여도 손으로 만져지는 감각은 평소처럼 매끄러웠다.
얌전히 머리를 정리해 주고 있는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새삼 키시아르에게 참 약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나단 주커만까지 찾아가 물어본 거겠지만.’
확신 없이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건, 즉 키시아르에게 조금이라도 억측 때문에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자신 때문에 저 사내가 고통스러운 눈빛을 하는 걸 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유더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정말로 그뿐이었다.
“-내가 불합격이라고? 왜?! 내가 뭐가 모자라서!”
그때, 불합격을 통보받은 시커가 난동을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쿵쿵 땅을 구를 때마다 바닥이 무너질 듯 흔들리는 바람에 그들이 앉은 주변까지 마구 요동을 쳤다. 두려움의 비명 소리가 귀를 찢었다.
유더는 미간을 찌푸리며 곧바로 손을 올렸다.
바람과 땅이 동시에 유연하게 움직이며 그의 의도에 따랐다.
“우아아악!”
어디선가 날아든 흙바람에 눈을 얻어맞은 시커가 얼굴을 감싸며 땅을 구르는 사이, 요동치던 땅이 순식간에 바르게 정리되었다. 엄청난 힘의 움직임을 느낀 각성자들이 일제히 유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려움과 경외가 어린 시선 속에서 유더는 천천히 일어나 시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힘만 믿고 날뛰는 너 같은 놈은 마병단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 네 뒤에 있을 이들에게도 그렇게 전해.”
“무, 무슨……!”
“꺼져.”
“으아아악!”
유더가 손을 내젓자 시커가 바람에 휩싸여 담장 너머까지 날아갔다. 비명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지자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 또한 따라서 멀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