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600화 (600/805)

600화

‘…키시아르는…….’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둑했던 간이 침실과 달리 회의실의 큰 창을 통해 비친 해는 아직 지지 않았다. 그리 오래 잠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키시아르 또한 그곳에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 대상이 산처럼 쌓인 서류는 물론 아니었다. 유더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것이 낡은 전술 게임 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혼자서 게임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모든 패가 자리를 잡고 있는 육각형 판 위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단장님?”

“아.”

키시아르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원한다면 저 멀리서도 누가 걸어오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생각에 침잠되어 있었기에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도 눈치채지 못하는가.

유더는 슬그머니 차오른 의문을 내색하지 않고 그가 내려다보고 있던 전술게임 판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뭘 하고 계셨습니까?”

“음…… 그리 피곤하지 않아서 금방 깨어났는데, 할 일이 없어 이곳 내부를 좀 구경하다 보니 이걸 발견하지 않았겠나?”

키시아르가 낡은 판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전술 게임을 배웠을 때 사용했던 초보자용 게임 세트와 똑같아 반가운 마음이 들더군. 생각해 보면 그것도 동부에 있는 공방에서 만들었던 물건이었으니 아마 같은 장인이 제작했을 확률이 높겠지. 내 건 펠레타로 가기 전에 사라져 다시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

초보자용 게임 세트라고 해서 기존에 사용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저 패의 모양이 좀 더 작고 가벼우며 색이 화려할 뿐이었다. 물론 눈앞의 물건은 아주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알록달록한 색도 빛이 다 바랬으나 키시아르가 어린 시절 사용하던 물건과 같다는 말만으로도 어쩐지 시선이 갔다.

“가져가고 싶으시다면 제클리스 님에게 부탁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사용하지 않는 물건인 것 같으니 주실 것 같습니다만.”

“음,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지금의 내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니까.”

키시아르가 중얼거리며 패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그냥, 처음 전술 게임을 배웠던 때가 생각났을 뿐이라네.”

키시아르가 처음 전술 게임을 배웠던 때라. 분명 아주 어린 시절이리라.

몇 살 때쯤 처음으로 배웠을까. 저 작은 패를 손에 쥐는 것조차 버거웠던 나이었을까. 아니면…….

유더의 머릿속에 황궁에서 보았던 초상화 속 소년 키시아르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실물 자료를 보아 버린 덕인지 천사처럼 아름다운 금발 머리칼의 소년이 전술 게임 판을 앞에 둔 모습이 어쩐지 아주 잘 상상되었다.

‘나는 전술 게임을 처음 배울 때 이런 걸 왜 익혀야 하느냐고 짜증을 많이 냈었던 것 같지만…….’

아마 키시아르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울수록 오히려 좋아하는 성정이니까.

어렴풋이 그 모습을 상상하는 동안 처음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 느꼈던 한기는 점차 사라지고, 따뜻한 온기가 마음을 채웠다. 유더의 눈빛이 부드러워지자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전술 게임 판을 덮었다.

“자, 이제 곧 후안이 올 것 같군. 2차 시험을 참관하러 나가도록 할까?”

그가 자연스러운 손길로 유더가 벗어두었던 겉옷을 가져왔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데도 기어이 솜씨 좋게 옷 걸치는 일을 도와주더니만, 답례를 달라며 관자놀이 부근에 입을 맞추는 얼굴이 평소의 능글맞은 키시아르 그대로였다. 언제나와 다른 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옛 생각이 나서 전술 게임 판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생전 처음 겪는 제대로 된 발정기를 코앞에 둔 제 상태가 평소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일 텐데.

유더는 거기까지 생각한 뒤 키시아르와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

……하지만 어쩌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역시 유더 아일……. 나서자마자 순식간에 지원자들 실력이 바닥까지 드러나고 속내가 죄다 까발려지던 그 모습. 내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아니. 어제 마지막에 다른 각성자를 고용해 몰래 대리 시험을 치려 한 놈은 도대체 어떻게 걸러 낸 거였어? 너네도 봤지? 단장님 빼고 다 놀라는 거.”

“봤지 봤지. 단장님 따라서 원래 알고 있는 척 표정 관리하느라 혼났다.”

“너희들 그거 몰라? 유더가 단에 들어오기 전에 용병이었다던 소문. 어지간한 거짓 기술은 다 간파하는 게 그래서라더라.”

“진짜?”

“아니. 난 정체를 숨긴 소드마스터에게서 검을 전수받은 제자라고 들었는데?”

“무슨 소리야. 산골짜기에 은거해 살던 미친 마법사의 제자가 아니었단 말야? 그 마법사의 친척이 지금 마병단 본부에 있는 그 수염 긴 마법사라던데…….”

미안하지만 전부 다 사실이 아니다.

유더는 신나게 제 이야기를 해 대는 단원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언제쯤 그들이 수다를 멈출지 지켜보았다.

“지, 진짜요? 유더 형이 정말 그런……?”

‘……아무래도 더 냅뒀다가는 지미가 전부 믿어 버릴 것 같으니 안 되겠군.’

“적당히들 해 둬. 오늘 새벽 훈련 양이 모자랐어?”

유더가 그들에게 다가가며 조용히 말을 걸자 단원들이 일제히 움찔 어깨를 떨었다. 돌아보는 얼굴들에 어설픈 미소가 어렸다.

“어어, 유더! 무슨 소리야. 새벽 훈련 양이 모자랐다니?”

“동부에 온 뒤로 다들 체력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훈련 양이 그대로니 기운이 많이 남는 것 같아서.”

“아니, 무슨 소리야? 우리 지금 일어날 힘도 없어서 앉아서 입만 움직이는 게 안 보여? 여기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건 지미하고 너뿐이야!”

“그래!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일을 하면서도 훈련을 빼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린 한계야!”

“그래. 수도 쪽은 이미 훈련 단계를 더 높이고 왔는데, 싫다면 말고.”

훈련은 죽도록 힘들지만, 다른 녀석들이 앞서 나가는 건 더 견딜 수 없다.

그간 몸에 주입된 사상과 훈련을 통해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경쟁에 착실히 길들여진 단원들이 그 말에 무섭도록 빠르게 반응했다.

“뭐야? 그쪽은 이미 단계를 높였다고?”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뭔데! 우리도 알려 줘!”

“다음에 만났을 때 우리가 수도에 있을 놈들보다 더 처지는 건 절대 안 돼!”

그럴 줄 알았다. 단순한 놈들.

유더는 품에서 지금쯤 수도에 있을 단원들이 죽도록 이를 갈며 뛰고 있을 새로운 훈련 계획표 한 부를 지미에게 건넸다. 그것을 빠르게 읽은 지미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와. 대단해요! 기초 훈련에 이제 근력과 유연성 훈련을 두 배씩 필수로 넣고 능력별 심화 훈련을 사람별로 다 적어줬어요! 전 검 끝에 돌 매달고 안 떨어트리도록 노력하면서 교본 반복하기! 신난다!”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어려워진 훈련 내용을 보며 강아지처럼 좋아하는 지미와 달리 나머지 단원들의 안색은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이…… 이게 뭐야. 사람이 하라고 써둔 거 맞아? 그 뭐냐, 허황된 기사 소설 내용 뭐 그런 거 아니고?!”

“유더! 거짓말 마! 이걸 수도 놈들이 어떻게 해!”

“전에도 못 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다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젠장! 그치만!”

“엄살은 됐어. 어제 내가 알려 준 명단 잊지 말고, 훈련은 늘 하던 것처럼 열심히 해.”

“어…… 뭐야. 그러고 보니 너…… 어디 가?”

그제야 유더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단원들이 어색하게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더는 이미 떠날 채비를 모두 마치고 하르탄에 올 때 입었던 로브까지 걸치고 있었다.

“그래. 이제 갈 거야. 동부에서 할 일은 다 끝났으니까.”

“뭐? 그럼 단장님은?”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 인사 없이 먼저 가는 걸 이해해 달라고 하셨어. 내가 온 것도 훈련 계획표만 전하러 온 거야.”

“아니. 이렇게 빨리…….”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단원들은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미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일어나 유더를 꽉 끌어안았다.

“형과 좀 더 대련하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부모님도 하르탄 쪽에 사업 기반을 아예 옮기고 이사 오실 예정이라 가능하면 형을 뵙고 인사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다음에 보면 되니까.”

“알겠어요… 어차피 저도 수도로 돌아갈 거니까……. 어어, 그런데 형.”

유더의 가슴팍에 고수머리를 비비며 아쉬워하던 지미가 별안간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들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눈빛으로 발뒤꿈치를 든 소년이 유더의 귓가에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형한테서 향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혹시 몸이 안 좋아요?”

“…….”

기어이 감정이 격해졌을 때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조금씩 흘러나올 정도로 향이 강해진 모양이었다. 유더는 그 즉시 향을 갈무리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분명 그게 맞는 것 같은데…….”

아직 어린 녀석인데도 알파 발현자이긴 한 모양인지, 향 감지가 귀신처럼 빠르다. 누군가 제 향을 감지한다는 게 낯설기 짝이 없었지만 이것도 이젠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유더는 지미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해 눈만 껌벅이는 다른 단원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했다.

“그럼 난 이제 간다. 문제가 있으면 보고하고, 나중에 보자.”

“어, 으응. 그래. 잘 가!”

“감히 네가 가는 앞길을 덮칠 간 큰 몬스터나 산적 따윈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가!”

그들에게서 멀어져 하르탄 성의 뒷문 쪽으로 향하자 이미 말에 탄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 그리고 제클리스와 데르밀라가 보였다.

“인사는 잘 나누고 왔나?”

“네.”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렇게 조용히 보내드리려니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한시가 바쁘시니 어쩔 수 없지요. 여기 짐에 드실 식량과 야행에 도움이 될 물건들을 조금 넣었습니다. 받아 주세요.”

제클리스와 데르밀라는 어떻게든 인사를 꼭 하고 싶다며 하인들을 물리고 둘이서만 배웅하러 온 참이었다. 유더는 데르밀라가 건넨 작은 꾸러미를 사양하지 않고 받은 뒤 짤막하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부디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큰 문제가 없었던 동부의 단원 모집 건은 그렇게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그들이 향할 다음 목적지는 서부였다.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이젠 임시 지부장이 아니라 정식으로 서부 지부장이 된 에문 필랑! 인사드립니다.”

서부는 이미 지부가 있는 곳이기에 동부보다 더 살필 일이 적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지 얼마 안 된 낯익은 서부 사람들은 그들을 제각기 반갑게 맞이해 주었으며 제클리스만큼이나 정성을 다해 대접해 주었다.

그들은 수도 다음으로 많은 이가 몰린 서부 지원자들의 현황을 살폈고, 그간 서부에서 신기할 만큼 잠자코 일을 하고 있다던 전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 이야기를 들었다. 마티와 로벨도 만나고, 이전 사건의 뒷수습 이야기도 듣다 보니 시간이 참으로 금세 흘러갔다.

그리고 타이누의 새로운 영주가 된 코엘트 남작의 검소한 저택에서 자다가 문득 잠에서 깬 유더는, 또다시 어디선가 불현듯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눈을 번쩍 떴다.

‘…….’

뭐였을까. 머리를 문지르며 그 감각의 실마리를 잡아 보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망설이다 침실 밖을 나선 그가 마주한 것은 한창 밤이 깊은 시각인데도 불이 켜져 있는 키시아르의 침실이었다.

“……단장님.”

문을 두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난 사내가 잠옷 차림으로 미소를 지었다.

“음? 이 새벽에, 무슨 일이지? 혹 잠이 오지 않나?”

“단장님이야말로 왜 주무시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달이 밝은 날에는 술을 마시는 게 규칙이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농담이라는 건 알겠다. 슬쩍 시선을 향한 키시아르의 어깨 너머로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술과 잔이 보였다. 진짜로 그냥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잠깐만.’

“혼자 전술 게임도 두셨습니까?”

유더는 잔 옆에 놓여 있는 전술 게임 판 끄트머리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묻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등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음, 뭐. 할 일이 없을 때 생각을 정리하기 좋으니까? 코엘트 남작이 전술 게임을 좋아한다더니 방마다 하나씩은 가져다 둔 것 같더군. 네 방에도 있지 않던가?”

그가 그런 말을 했던 건 사실이다. 저녁을 함께 먹으며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유더의 방 구석에 위치한 손님을 위한 물건들 사이에 전술 게임 판이 정말로 하나 있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물론 유더는 별 관심이 없어 한번 시선만 주고 그대로 손도 대지 않았지만, 눈앞의 사내가 그렇지 않다 해서 이상할 일은 없었다.

없었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유더가 대답 없이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자 키시아르의 얼굴에 난감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혹 다른 거라도 하고 있었을까 봐 그러나?”

“……잠을 너무 적게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해 주는 걱정은 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적극적으로 발언해 걱정을 누그러뜨려 주어야 할 때군. 내 얼굴을 봐. 어딜 봐서 이게 적게 자는 사람의 얼굴이지?”

그건 맞는 말이었다. 술을 마신 덕에 평소보다 혈색이 오히려 더 돌고 있는 키시아르의 얼굴은 어딜 보나 밤을 손아귀에 쥔 유혹의 천사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이전에 잠을 설치던 때처럼 피부가 빛을 잃지도, 눈가에 묘한 그늘이 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뭔가 서늘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 건 어째서인가.

“음…… 아무래도 시기가 다가오니 기감이 예민해지는 모양이군. 그럴 수 있지. 나도 지금까지 각성 이후 두어 번 발정기와 주기를 맞이했었지만, 늘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거든.”

유더의 얼굴을 응시하던 사내가 작게 숨을 내쉬며 문을 좀 더 크게 열고 우아하게 손짓을 했다.

“자. 복도는 맨발로 서 있기엔 너무 차가워. 이리 들어와서 나와 한잔하겠나?”

술을 마셔 보았자 유더에게는 어차피 아무 효과가 없다. 하지만 같이 시간을 보내면 이 미묘한 기분의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유더는 수락했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들어가자마자 자연스럽게 전술 게임 판을 거두었다.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특별히 이상한 발언은 아무것도 없었다.

키시아르는 온갖 우스운 이야기로 유더를 기어이 희미하게 웃게 만들었으며, 그런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며 즐거워했다.

그렇다.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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