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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99화 (599/805)

599화

제클리스를 따라 들어선 하르탄의 작은 성 안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제클리스의 약혼녀이자 데브란의 하나뿐인 여동생 데르밀라가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기 무섭게 낯익은 마병단원 제복을 입은 이들이 펄쩍펄쩍 뛰며 환호를 질렀다.

“드디어 단장님이 오셨다!”

“유더!”

유더는 그중에서 가장 신나게 손을 흔들고 있는 꼬맹이 지미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인사를 돌려주었다.

동부 출신이자 부모님도 동부에 있는 지미는 이번 모집 인원에 지원하여 당당히 뽑혔다. 나이가 어리다 해도 해당 지역에 연고지가 있고 실력도 흠잡을 곳 없으니 충분히 단원 모집 시험 업무를 잘 해낼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결과였다. 걱정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간 올라온 보고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표정을 보니 역시 아주 잘 지내고 있었던 듯했다.

‘어쩐지 못 본 사이 키가 좀 더 자란 것 같은데.’

“있죠, 저 그동안 키 좀 컸어요! 바지 짧아진 거 보이죠?”

음, 역시. 유더는 바지 끝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싱글대는 지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뒤 단원들의 수다에 파묻혔다. 그간 보고를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보냈을 텐데도 얼마나 할 말들이 많던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묵을 방에 짐을 풀 수 있었다.

키시아르를 위해 마련된 방은 본래 영주가 사용하는 곳이었고, 나단 주커만과 유더에게는 그 바로 옆의 방들이 하나씩 주어졌다. 영주의 방을 내어 준 제클리스는 다른 층에 있는 영주 부인의 방을 쓰면 된다며 싱글벙글했다. 아무래도 본래 그 방을 사용했던 데르밀라와 이번 일을 핑계 삼아 더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게 기쁜 모양이었다.

“저, 마병단장 보좌님…… 오빠는 잘 지내고 있지요? 편지는 자주 주고받지만 그래도 역시 멀리 있으니까 걱정이 되어서요.”

짐을 모두 정리하고 나온 유더에게 데르밀라가 조심스럽게 접근해 말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페토 가의 재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진 안색을 보면 제클리스와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했다.

“네. 데브란은 잘 지냅니다. 그렇지 않아도 동부에 가면 선물과 편지를 전해 달라고 전달받았습니다. 받으시죠.”

유더는 데브란에게서 미리 받아 두었던 작은 봉투를 건넸다. 그 안에는 서신과 함께 고급스럽고 가느다란 은목걸이가 담긴 얇은 비단 주머니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것을 꺼내 든 데르밀라가 상기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오빠도 참! 바쁘신 분께 이런 걸 다 부탁하다니…….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선물은 직접 보내라고 제가 말해 둘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데브란은 제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동료이니 이 정도쯤은 당연히 전해 줄 수 있지요. 사과보다는 고맙다는 말 쪽을 데브란에게 더 전해 주고 싶군요.”

딱 잘라 대답하는 목소리 속에는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데르밀라는 오히려 안도했다. 그녀는 수줍음을 감춘 얼굴로 웃으며 마음을 담아 작게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유더는 그녀와 데브란의 아버지는 잘 지내는지, 돌아온 하르탄에서의 생활은 어떤지를 물었다.

“아버지는 잘 지내고 계세요. 따뜻한 곳에서 편히 지내시니 몸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마병단이 서부에서 큰 공을 세웠단 소식이 들려오고 나서는 제클리스의 다른 가족과 친척분들도 저희 사이를 더 반대하지 않으신다고 했고, 예전에 못되게 굴었던 사람들은 사과를 하거나 없는 듯이 지내서 마주칠 일도 없고 좋아요.”

데르밀라는 말이 약혼녀일 뿐, 성에서 일하는 이들이나 주민들에게는 이미 제클리스의 부인과 다름없이 인식되어 영주의 부인이 해야 할 일들을 모두 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존에 배우지 않았던 일들이 많아 처음에는 어려웠었다지만, 본디 똑똑하고 재치가 넘쳤던 덕인지 금방 모든 것을 익혔다.

게다가 이전에 그녀를 납치하여 가두었던 제클리스의 동생, 자카일이 벌을 받고 완전히 기가 꺾인 데다 오빠 데브란이 이번에 마병단 모두에게 주어진 ‘경’의 칭호를 비롯한 큰 상을 받게 되면서 신분 또한 이제는 큰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제클리스와 떨어져 있지 않아도 되고, 모두가 행복한 지금이 데르밀라는 가장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거짓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요. 다행이군요. 그래도 앞으로 혹시라도 지내다 어려운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데브란이나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

“말씀만으로도 든든하네요. 감사해요.”

“마병단 동부 지부가 생길 중요한 곳을 책임져 줄 분이시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했음에도 데르밀라는 어쩐지 유더의 말을 반쯤은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농담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뭐, 심각한 일로 연락을 할 일이 안 생기는 쪽이 좋기는 하지.’

“유더.”

그때 옆방에서 마찬가지로 짐을 풀고 나온 듯한 키시아르가 유더를 불렀다. 유더는 데르밀라에게 인사를 건네고 키시아르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쉬지 않고 마병단 지부 건설 장소와 공사 진행 상황을 살피고, 1차 시험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 이동해 몰래 관전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은 유더의 기억에 없는 이들이었지만 몇몇 이들의 능력은 제법 눈에 띄었다.

키시아르는 멀찍이서 시험을 치르는 사람들을 보며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변용하는 마도구 팔찌를 낀 덕에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이는 이 자리에 몇 명 없었다.

“현재까지 1차 시험에 합격한 이의 숫자는 284명…… 꽤 많군.”

“저희의 기준이 특별히 유한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생각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동부 1차 파견대의 공식적 리더를 맡고 있는 단원, 후안 라레보가 기합이 잔뜩 들어간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신과 소속으로, 예전에 유더의 룸메이트이기도 했던 이였다.

“2차 시험은 내일부터라고 했었지.”

“네. 맞습니다!”

“그때부터는 나와 보좌도 함께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자리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후안은 순간적으로 속도를 아주 빠르게 높여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단원 모집 시험에서 자신의 힘을 탁월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본 주변 지원자들이 연신 감탄을 토해 냈다.

“저것 좀 봐. 어떻게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면서 정확하게 할 일을 하고 있지? 힘을 저렇게 조절하는 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거야?”

“미쳤군. 동시에 몇 가지 일을 하는 거냐? 저 정돈 되어야 마병단원이 될 수 있다고 미리 겁을 주는 건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있는 분신 능력자라도 되는 것처럼 단원 시험을 감독하고, 순식간에 움직여 동료들을 돕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키시아르와 유더에게로 와 안내까지 하는 그의 멋진 모습은 당연히도 마병단의 고된 훈련 성과였다.

그렇게 살펴볼 만한 모든 걸 둘러본 뒤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다시 하르탄 성으로 돌아왔다.

바쁘게 하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뭔가 지시를 하고 있던 제클리스가 재차 달려와 문제는 없었는지 궁금해했다.

“돌아보신 곳들은 어떠셨습니까?”

“질서를 잘 유지하며 진행되고 있더군. 마을을 중심으로 닦고 있는 도로 공사도 문제가 없어 보이니 그대로 진행만 하면 되겠어.”

“전부 공작 전하의 도움 덕분이지요.”

‘도움?’

제클리스가 마을 길 공사를 다시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키시아르가 끼어들 여지가 있었던가? 처음 듣는 소리라 눈을 깜박이는 와중, 키시아르가 시기적절하게 입을 열었다.

“도움이라 할 만한 것도 아니었지. 그저 예기치 않게 영주 자리를 물려받게 된 젊은 기사의 어려움을 담은 편지에 답신만 해 주었을 뿐이니.”

“아닙니다. 하르탄의 지리를 이용한 최적의 도로 경로와 공사 방법을 가르쳐 줄 기술자들을 수도에서 보내 주시고, 꽉 막힌 관리들을 상대하는 요령까지 모두 알려 주신 공작 전하의 도움이 없으셨다면 이리 빠르게 여기까지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들어 보니 키시아르는 아페토 가의 재판 건 때문에 시작한 제클리스와의 서신 교류를 여태까지 꾸준히 이어 오며, 그의 고민에 친절히 답을 해 주고 있었던 듯했다.

본디 기사로 살아갈 생각이었던 제클리스에게는 영주 자리를 받고 황제파로 돌아선 뒤 마주한 주변 지역의 견제와 마을의 낙후한 상황 정리 등이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다. 행정에 재능이 없던 그를 여기까지 이끈 건 타고난 귀족의 피가 아니라 키시아르의 조언, 그리고 데르밀라와 행복하게 살겠다는 강렬한 열망이었다.

‘……그간 그 많은 일을 하면서 진짜 하르탄의 발전을 위한 도움까지 주고 있었다고?’

황제파가 된 하르탄을 발전시키고 지키는 건 물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쪽에도 큰 이득이다. 하지만 키시아르가 이렇게까지 꾸준히 그들을 신경 써 주고 있었던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하루를 혼자 3일씩 사는 것 같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새삼스럽게 가슴이 크게 뛰는 감각이 느껴져,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것참. 그리 감사 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데도 그러는군.”

“늘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직접 다시 뵙게 되었으니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동부에 계신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불편함이 없도록 모실 테니 맡겨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제클리스는 아직 영주라기보다는 기사에 조금 더 가까워 보였지만, 그래도 전과 달리 제법 든든해 보였다.

“동부까지는 언제 살피고 계셨습니까.”

“살폈다기보다는 답변만 한 거래도. 그리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야.”

영주의 회의실로 들어서자마자 내뱉은 유더의 말에 키시아르가 난감한 미소를 흘렸다.

“아무튼, 1차 시험을 지켜보는 동안 혹 눈에 띄는 이는 없었나?”

“글쎄요. 잠깐 보고 온 터라 딱히 신경 쓰이는 이는 없었습니다만……. 서류로 본다면 알게 되겠지요.”

유더가 2차 단원 모집에 반드시 따라와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미래의 정보를 토대로 마병단에 도움이 되거나, 혹은 되지 않을 이들을 최대한 골라 두고 갈 생각이었다.

‘아무리 다른 단원들이 걸러 냈다 해도 애초부터 작정하고 들여보낸 간자 같은 자들이 어딘가엔 섞여 있겠지. 한편으로는 마병단에 붙지 못해 다른 길로 빠진 능력 있는 이들도 있을 테고…….’

유더는 회의실을 가득 메운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수도보다는 훨씬 적지만, 그래도 양이 상당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가 제일 위에 놓인 한 뭉치의 서류를 집어 들자 키시아르 또한 옆의 서류를 가득 집어 자신의 앞에 놓았다.

“오자마자 또 일 시작이군. 나단에게 맛있는 것들이라도 좀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이미 가져왔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나단 주커만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짐을 풀자마자 어디를 갔나 했는데 아무래도 그는 그 나름대로 바빴던 모양이었다.

“역시 너는 훌륭한 부관이야, 나단.”

“공작님께서는 제가 검을 쓸 때보다 과자와 차를 가져올 때 더욱 흐뭇해하시지요.”

“당연하다마다. 검은 실생활에 쓸모가 없거든.”

“…….”

유더는 평온한 목소리들을 뒤로 하고 나단에게 감사의 눈인사를 건넨 뒤 서류를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밤을 새워 꼬박 일을 한 끝에, 유더는 눈에 띄는 지원자들의 서류 몇십 장을 골라 따로 분류하는 데 성공했다.

나단 주커만이 가져온 과자 쟁반 16개, 찻잔 23잔이 쌓인 뒤 얻은 쾌거였다.

“다 끝냈나?”

유더보다 먼저 서류를 모두 살핀 키시아르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드럽게 물었다. 유더는 약간 푸석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네. 오른쪽에 분류한 이들은 과거에도 오래 마병단에 있었던 이들이거나 좋은 능력을 지녔다 판단되는 이들, 그리고 왼쪽에 분류한 이들은 특별히 주의해야 할 자들입니다. 이들은 불합격되더라도 근황을 계속해서 뒤쫓을 필요가 있습니다.”

조건하에 따라 사람은 크게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조건이 달라져도 변함없이 같은 길을 가기도 한다.

그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이자 미래의 기억만으로 사람을 분류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유더만의 판단력이 아니라 키시아르의 판단력도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가 설령 무언가를 잘못 판단했다 해도 이번에는 뒤에 키시아르가 있다.

그라면 정보에 의한 편견 없이 사람을 보아 줄 수 있을 터다.

“수고했네. 그러면 오후에 시작될 2차 시험 참관 때까지 잠깐 눈을 붙이는 건 어떻겠나.”

키시아르가 유더의 뒷목을 주무르며 나긋하게 물었다. 유더는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그의 손이 닿자마자 급격히 피로가 쏟아지는 기분이 들어 결국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단장님께서도 함께 쉬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래야지.”

전혀 피곤하지 않은 얼굴로 사내가 웃었다.

회의실에는 옆에 이어진 너른 침실이 붙어 있었다. 일을 하다 피곤하면 바로 잘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자연스럽게 그곳에 누워 눈을 감고, 숨을 한번 내쉬기도 전에 잠들었다.

그리고, 잠들 때와는 달리 시린 냉기를 느끼며 다시 눈을 떴다.

‘……뭐지?’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잠시간은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멍한 머리 때문이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니 그제야 그가 왜 여기서 자고 있었는지, 잠들기 전까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두 생각이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본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키시아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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