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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98화 (598/805)

598화

“목숨을?”

일순 키시아르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을까. 눈을 한번 깜박인 뒤 다시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목숨이 위험했던 순간이 많이 있었나?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그때일까.”

키시아르가 생각하는 ‘그때’가 언제인지는 뻔했다. 그가 꿈에서 보았던 유더의 마지막 날일 터였다.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기는 해도 현명한 이답게 정답이 어느 쪽일지는 이미 거의 확신하고 있을 듯했다. 유더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짐작하고 계실 그때입니다. 타국에 계신 분께 목숨 구명 시도를 받을 만한 일이 많지는 않으니까요.”

“많지는 않았다.”

키시아르가 유더의 마지막 말을 반복하여 혼잣말처럼 읊었다. 이렇다 할 표정의 변화는 없었으나 금빛 속눈썹 그림자가 드리운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져 보이는 듯해 유더는 빠르게 한마디를 추가했다.

“제대로 말씀드리자면 그때 한 번 외에는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혹 비슷한 일이 많았다고 오해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래.”

키시아르가 그제야 작게 웃었다.

“에제인 왕자가 인재를 알아보는 뛰어난 안목을 지닌 제왕감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군. 그 정도라면 빚을 갚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해. 충분히 이해했네.”

하지만 말이 끝난 뒤에도 유물과 마도구를 든 키시아르의 양손은 이전처럼 도로 움직이지 않고 계속 늘어진 상태였다.

“뭔가 더 궁금하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궁금하다기보다는…… 아니. 괜찮네.”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능수능란하게 알아내고야 말 사내가 드물게도 중간에 물러섰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히려 신경이 쓰입니다. 뭐든 괜찮으니 그냥 말씀해 주십시오.”

“……뭐든이라. 정말로?”

“네.”

“…….”

그런데 답은 돌아오지 않고, 키시아르의 눈꼬리가 도리어 침묵 속에서 휘었다. 뭔가 잘못 말했나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사내가 손을 내밀어 유더의 뺨을 매만졌다.

“음…… 새삼스럽지만 뭐든 괜찮다는 말은 너무 위험한 것 같군.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겠네.”

“단장님께서 묻는 건 뭐든 답해 드릴 수 있다는 게 왜 함부로입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키시아르가 희미한 쓴웃음을 섞어 답했다.

“그런 말을 들은 내가 정도를 모르게 되면 어쩌려고.”

“이상한 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다른 건 몰라도 정도를 모른다는 말은 결코 키시아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혹시 말하기 싫어서 화제를 돌리려는 수작인가 하는 생각까지 한 뒤, 유더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말을 바꾸겠습니다.”

“흠?”

“제가 단장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지요.”

그러자 키시아르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가는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유더의 앞에서 그 웃음은 한참 동안 잦아들지 않았다.

“아…… 내 보좌보다 진실을 자백하게 만드는 일에 능한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시면서 왜 웃으십니까.”

“항복이야. 말하도록 하지.”

두 손을 든 키시아르가 곧바로 항복하겠다는 표시를 했다. 그의 눈가에 걸린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내 생각 따윈 별것 아니었어. 우선 네가 맞은편이 아니라 내 곁에 앉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유더는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시아르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네. 그리고 또 뭡니까.”

한결 가까이, 그리고 깊이 느껴지는 시선에서 드디어 웃음이 사라졌다.

장난기를 잃은 사내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안고 싶다고 생각했지.”

그가 하려던 건 정말 그 말뿐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질문이 있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지금은 더 물어도 알려 줄 것 같지 않았다.

안고 싶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저 늘어져 있을 뿐, 먼저 움직이지 않는 키시아르의 양손을 바라보며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먼저 손을 올렸다.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이 키시아르의 어깨를 감싸자마자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선을 돌려 보니 그건 낡은 손거울과 소라 껍데기였다.

‘저 귀한 것들을.’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양손이 자유로워진 사내가 유더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깨죽지 위를 지그시 누르는 머리와 목을 간지럽히는 머리칼의 감촉을 느끼자 다른 모든 생각들이 일제히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도 키시아르에게 기대 버렸다. 고작 포옹일 뿐인데도 왠지 오늘 하루 내내 누적되었던 전신의 긴장과 피로가 일시에 씻기듯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논이 먹인 약 효과가 이제와서 들었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겠고.’

그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신도 이 순간을 내심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유더는 키시아르의 뺨을 매만져 고개를 일으킨 뒤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한참의 입맞춤이 오고 간 뒤 맡은 건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일어난 자신의 향이었다. 스스로 맡는데도 이렇게 확실하게 느껴질 정도라면 이제 정말 발정기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수도를 떠나기 전에 오면 좋을 텐데…… 어떨지 모르겠군.’

자신을 슬그머니 감싸고 도는 유더의 향을 기꺼이 맞이한 사내가 그 순간 혀를 더욱 깊이 얽으며 소파 위로 완전히 몸을 무너뜨렸기에 생각이 잠시 끊겼다.

“하아…….”

어제도 그랬었지만, 유더에게서 요즘 자주 제어를 잃고 불쑥불쑥 흘러나오는 향을 맡을 때마다 키시아르는 한참 동안 그것을 들이마시며 그를 품에서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스스로 맡을 때는 그저 멀건 단내가 나는 정도로만 느껴질 뿐이지만 알파 발현자에게는 좀 다른 느낌으로 인식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더는 얼마 전 새로 바뀐 소파에 더욱 깊이 묻히는 몸을 느끼며 저만큼이나 솔직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키시아르의 향을 느꼈다.

튀는 불꽃처럼 선명히 느껴지는 간절한 열망. 망설임을 잊은 손길 속에서 다른 모든 것들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수많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한 나날들이 지나고, 비로소 2차 마병단원 모집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일행은 키시아르와 유더, 그리고 나단 주커만뿐이었으며 마차 대신 말만 세 필 대기하는 조촐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지만 그들 각각의 힘과 능력을 아는 이들의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았다.

“유더. 잘 다녀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달려가겠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새벽을 택한 덕분에 그들을 배웅 나온 이는 세 명의 부단장, 그리고 타이스 율만의 제자 알릭 펠긴뿐이었다. 어스름 속에서 추위에 몸을 떨고 있던 알릭이 콧물을 훌쩍대며 유더에게 뭔가를 건네주었다.

“킁. 이, 이거 받으세요. 스승님과 마병단 약사님이 같이 개량하신 약하고, 제가 만들어 본 각성자 제어구 시험판이에요. 에헷취.”

“감기에 걸린 것 같은데 스승 쪽이 나오는 게 좋지 않았겠나?”

키시아르가 웃는 얼굴로 묻자 알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희 스승님께서는 아침잠이 많으시거든요. 그리고 저 때문에 약을 만드느라 밤을 새우셔서 피로하시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잘 길들여진 노예와도 같은 그의 어깨가 다소 쓸쓸해 보였다.

유더는 알릭이 준 천 주머니를 열어 약과 제어구를 슬쩍 살폈다.

‘1차 시제품은 한번 보았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었지.’

타이스 율만이 이미 만들었던 약에 이논이 힘을 더해 만들어진 2성 발현자 전용 발정기 안정제는 하얀 환약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약의 기존 효과를 좀 더 강화하고 안정시킨 1차 시제품을 때마침 발정기가 찾아와 쉬고 있던 알파 각성자 단원 한 명에게 동의하에 지급해 보았었는데, 무려 섭취 하루 만에 넘쳐나는 향과 비정상적인 흥분이 거의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발정기 자체는 완전히 끝날 때까지 며칠 더 걸렸다지만 일상생활에 불편이 없을 만큼 증상이 단숨에 호전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때문에 타이스 율만은 이제 거침없이 대량 생산을 위한 2차 시제품 연구에 들어간 참이었고, 유더는 그들에게 시제품 약간을 미리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해 두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스승이 열심히 약을 만드는 동안 알릭은 제어구 연구에 힘을 썼다. 그의 1차 시제품은 기존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던 목걸이 형태의 제어구를 고쳐 만든 것으로, 겉보기에는 평범한 액세서리처럼 보였다. 이전 생의 제어구가 가시가 달린 족쇄나 개 목걸이 같은 형태였던 걸 떠올려 보면 대단히 온건하고 아름다운 형태라 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을 위한 제어구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1차 시제품은 알릭의 힘을 절반 정도 깎는 효과를 냈다. 물론 유더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으나, 유더는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쓸만하다 판단하여 그것도 떠나기 전에 몇 개만 더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그것의 사용처는 자신이 아니라 앞으로 만날지 모를 다른 이들이 될 예정이었다.

“만들어 달라고 하셔서 제어구를 세 개 더 같이 넣긴 했는데…… 다음에 2차 시제품을 다시 만들면 그땐 더 제대로 된 걸 만들어 볼게요.”

아무래도 자신이 만든 시제품이 유더에게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직 충격이 큰 듯한 알릭의 눈에 오기가 가득 넘실거렸다.

“꼭 유더에게도 효과가 있는 걸 제가 만들어 보이겠어요.”

“이제 출발하면 될 듯합니다.”

말들의 상태 점검을 마친 나단 주커만이 다가와 키시아르에게 보고를 했다. 짐은 각자의 말 등에 이미 잘 실린 상태였다.

유더는 말에 올라 칸나와 에버, 스티버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각기 결의에 찬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세 마리의 말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배웅을 나온 이들은 마병단 앞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 갈 곳은 동부 하르탄이었지.”

“네.”

동부에서 2차 단원 모집과 지부 설립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은 유더가 이미 가 본 곳이었다. 데브란의 고향이자 나한을 처음으로 마주쳤던 그 작은 마을은 발전 상태에 비해 위치 자체는 좋은 편이었다.

동부의 중심지이자 디아카 가의 본영지인 오데퀴아에서 그리 멀지 않고, 근처에도 제법 발전한 도시가 많다. 위치가 좋은데도 여태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험준한 산세와 산적들 때문이었는데 저번 사건 이후로 산적이 싹 사라지면서 발전의 기회가 생겼다. 영주 대리였다가 새로이 영주가 된 제클리스 하르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길 정비에 힘을 쏟고 있다고 들었다.

영주가 마병단에 한없이 호의적인 지역이자 위치가 좋은 지역. 앞으로 건물을 많이 세워도 될 만큼 땅 여유가 많으며 발전 가능성이 큰 곳.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지부 설립 관련으로 사전에 물어보았을 때 제클리스 측에서도 흔쾌히 수락했기 때문에 동부 지부의 설립은 현재 서부를 제외한 그 어느 지역보다도 빠르게 진행 중이었다.

“다시 가게 되었는데 어떤가.”

“얼마나 바뀌었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합니다.”

누구 하나 힘들어하는 이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니 엄청난 속도의 이동이 가능했다. 예정보다 더 빠르게 하르탄에 도착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들끓는 많은 사람의 물결이었다.

“여기가 마병단원을 모집한다는 거기지?”

“저기 봐. 벌써 지부 건물을 세우고 있잖아!”

밭이 많아 고즈넉했던 마을에는 큰 여관이 제법 들어섰고, 그럴싸한 상점들도 늘었다. 사방에 깔아 둔 길을 정비하는 경비대원들도 예전과 같은 불친절함과 게으름은 간곳없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이었다.

유더는 그중 한 명을 붙잡아 영주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 요청했다. 그는 어두운 로브를 걸친 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으나, 유더가 내민 마병단 문장이 새겨진 단추는 바로 알아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번개처럼 영주가 머무는 성에서 뛰쳐나온 제클리스 하르탄이 깍듯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이리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병단에서 먼저 파견된 이들 또한 성에서 머무는 중이니 가면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따라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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