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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97화 (597/805)
  • 597화

    수도를 떠나기 전 이것저것 바쁜 일을 처리하는 동안 시간은 미친 듯이 빠르게 흘러갔다. 최소한의 수면 시간만 챙기고 있는데도 하루가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원들의 훈련 강도를 더 높이고 몸소 함께하며 상태를 봐주는 한편 타이스 율만의 연구 진행도 살피고, 마병단이 파티 때 상으로 받은 저택과 땅의 활용을 위해 시간을 내어 나가기도 했다.

    우선 저택들은 마법사들을 비롯해 마병단의 중요한 협력자들이나 공로가 큰 단원들의 사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6구역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저택엔 벌써 헬렘이 긴꼬리 검보라 펜펜을 데리고 들어가 사는 중이었으며, 그 근처에 있는 다른 저택에는 여태 낡은 빵집 2층에서 살던 스티버가 가족을 데리고 이사했다.

    또 다른 저택 쪽에는 조만간 타이스 율만과 알릭도 정식으로 보낼 예정이었다. 노마법사는 어디서 연구를 하든 상관없다고 했다지만 좀 더 넓고 살기 좋은 저택을 공짜로 받을 기회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부지는 지금의 마병단 본관 근처이자 황궁기사단 내부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땅이었기에 무엇이든 세울 수 있었다. 키시아르는 그 땅에 벌써부터 어떤 건물들을 세울지 모두 정해 둔 상태였고, 본관 건물을 세울 때 고용했던 기술자들을 발 빠르게 데려와 기반 공사를 끝냈다.

    유더는 건설 공사지 주변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비 걸 요소만 찾고 있는 할 일 없는 황궁기사단 단원들을 눈빛 하나로 전부 쫓아냈고, 그 뒤 이논을 찾아가 현자와 그의 일행들의 근황과 능력 정보를 전했다.

    이논은 정보부 일과 마병단 약사 일을 병행하는 한편 타이스 율만이 만드는 2성 발현자용 약까지 살피는 중이라 요즘 신경이 아주 날카로웠다. 그는 복수 대신 할 말을 모두 끝내고 돌아가려던 유더를 붙잡고 지독하게 쓴맛이 나는 기력 안정제를 먹였다.

    “…….”

    “쓰지?”

    안 쓰다고 답하면 가만두지 않을 기세라 고개를 끄덕였더니 정답이었는지 이논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타이스 율만이란 마법사가 만든 2성 발정기 안정제의 성분이 체력 회복용으로 써도 되겠다 싶을 만큼 제법 괜찮아 보여서 조금 참고했다.”

    “그걸 나한테 왜 주는데.”

    “왜겠냐? 어제 단장실에서 노닥대다 회의에 늦었다는 어느 놈이 뭘 하고 왔을지 너무 뻔해서가 아닐까? 엉? 이제 완전히 회복되어서 살판이 났나 보지?”

    “…….”

    대체 어떻게 안 걸까. 범인은 정보부원 중 하나겠지만, 이논도 결국 정보부원이니 회의에서 일어난 일을 공유한다 해서 이상할 일은 아니다.

    ‘……회의에 늦었다는 정보 하나만으로 원인을 정확하게 추측해 낸 이논 쪽이 오히려 대단한 거겠지.’

    이논은 유더가 키시아르에게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진실을 알렸다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 하지만 쳐다보는 눈빛을 보아하니 키시아르와 그 사이의 관계에 뭔가 변화가 있었단 사실은 이미 짐작한 것 같았다.

    ‘이야기를 하기는 해야겠지.’

    이논이 키시아르와 관련된 이야기를 사실 그리 즐겁게 들어 줄 것 같진 않지만, 그는 유더가 비밀 때문에 고민했을 때 스스럼없이 자신의 정체까지 밝혀 가며 도움을 준 이였다. 적어도 이번에 키시아르와 전술 게임을 둔 이후로 유더의 마음이 이전보다 한결 편해졌다는 사실 정도는 알려 주고 싶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너무 쓰다고 항의하는 거냐 지금?”

    유더의 눈빛을 무슨 의미로 판단했는지, 이논이 별안간 커다란 알사탕을 입에 휙 밀어 넣었다.

    “자! 됐지. 이제 가라.”

    “……잘 먹을게.”

    이논이 강제로 준 사탕에서는 레몬 맛과 단맛이 동시에 났다. 한쪽 볼이 불룩해진 채 케일루사 황제의 마지막 훈련을 위해 훈련실로 가니 시종장의 표정이 다소 묘해졌다. 그러나 그는 노련한 궁인답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유더에게 인사를 건넸다. 먼저 도착하여 미리 힘을 시험적으로 사용하며 몸을 풀고 있던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케일루사 황제는 마지막 7시간의 훈련을 받는 내내 힘들다는 말이나 짜증을 내는 일 한번 없이 모든 과정을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유더가 보기에 그는 흠잡을 곳 없는 학생이었다. 유더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일을 꺼리지 않으며 아무리 힘들어도 독하게 참아 내니 가르친 것 이상의 빠른 발전을 이루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덕분에 짧은 훈련 시간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실력은 이제 처음 마병단에 들어섰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일취월장한 상태였다.

    아마 이 정도만 할 수 있어도 원하는 대로 힘을 쓰지 못하거나 과도한 사용으로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으리라.

    “이제 예정된 훈련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후우.”

    유더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황제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렸다.

    “수고했네.”

    “백작님께서 고생하셨지요. 하지만 그만한 답을 얻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말이 맞다.”

    땀에 흠뻑 젖은 금빛 머리칼 너머의 눈동자가 배부른 성취감을 품고 서늘하게 반짝였다.

    “힘이란 게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한계를 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취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그 모든 답을 얻었지. 모두 경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더는 황제에게 마지막으로 몇 가지 조언을 남겼다.

    “여태 훈련을 하며 느끼셨겠지만 백작님의 능력은 감추면 감출수록, 한 번에 많이 쓰면 많이 쓸 수 있을수록 유리해지는 힘입니다. 힘을 쓰기 위한 매개체의 전달과 이동은 반드시 아랫사람들의 손을 이용하십시오. 그리고 귀로만 듣는 쪽이 눈과 귀를 모두 쓰는 것보다 훨씬 피로가 적으니 평소에는 귀만 열어 두는 쪽이 힘을 쓰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케일루사 황제는 물건의 종류와 상관없이 자신의 손을 거친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눈과 귀로 삼을 수 있었다. 그건 즉 앞으로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이 제국 내에서 그가 보고 듣지 못하는 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걸 잘 이용하려면 철저하게 힘을 감추고 유리한 조건들을 만들어 두어야만 했다.

    “경이 일을 끝마치고 돌아올 때쯤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중요한 1, 2개 정도의 매개체는 힘을 거두지 않고 잠을 잘 때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네. 스승에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으니 열심히 노력해야겠군.”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계속 말씀드렸지만 각성자의 힘은…….”

    “빠른 발전과 강한 힘보다는 능력을 더 잘 제어하고 자신의 한계를 확실하게 아는 자가 오히려 강하다. 이젠 외웠네.”

    “예. 그렇습니다.”

    “걱정 말게. 누가 준 새로운 삶인데 그리 쉽게 포기할까.”

    케일루사 황제의 얼굴에 드문 웃음이 떠올랐다. 키시아르와 닮은 듯 닮지 않은 그지만 그렇게 웃으니 아우와 놀랍도록 비슷했다.

    “새벽궁에 이제 막 주인이 돌아왔군. 저녁을 함께하고 싶으니 이만 돌아가야겠어.”

    홀가분한 얼굴로 중얼거린 황제가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황후를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에는 어느덧 힘든 기색이 씻은 듯 사라진 상태였다. 그가 오늘의 고된 훈련 도중에도 황후에게 연결해 둔 능력 하나만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유더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돌아왔을 때는 가르칠 이가 필요 없는 상태가 되시겠는데.’

    “마병단장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길 바라네. 그러면 다음에 볼 때까지 건강하도록.”

    케일루사 황제는 마병단을 떠나기 전, 시종장을 시켜 털실로 만든 고급스러운 작은 공 몇 개와 푹신한 벨벳 방석을 유더에게 주었다. 그건 새끼 고양이를 위한 황제의 작은 선물이었다.

    “단장님, 들어가겠습니다.”

    황제의 훈련을 끝으로 일과를 마친 유더는 단장실 문을 두드리고 나서 잠시 후 문을 열었다.

    키시아르는 집무용 책상이 아닌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겉옷을 벗고 셔츠 팔 부분을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다소 방만하고도 시선을 끄는 차림새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 차림으로 키시아르가 하고 있는 일은 다소 희한했다. 그는 한 손에 반짝이는 뭔가를, 다른 한 손에는 소라 껍데기처럼 생긴 무언가를 들고서 이리저리 의미 없어 보이는 동작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 넬라른에서 온 유물을 살피는 중이었네.”

    유더는 그제야 반짝이는 무언가라 여겼던 물건의 정체가 이전에 슈덴 상단 지부에서 가져온 마도구, 진실의 거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울이 키시아르의 큰 손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탓에 멀리서는 표면에 반사된 빛밖에 안 보였던 것이다.

    “백작님께서는 돌아가셨나?”

    계속해서 양손을 휘적거리며 키시아르가 여상히 물었다.

    “네. 마지막까지 훌륭하게 마무리하셨습니다. 단장님께 안부를 전해 달라는 말씀과 함께 니폴렌에게 선물을 남기고 가신 참입니다.”

    “어떤 선물을?”

    “털실로 만든 공과 보라색 벨벳 방석입니다.”

    “이런. 다정도 하시군.”

    키시아르가 웃음을 흘렸다. 유더는 전보다 더욱 많이 단장실 바닥을 채우고 있는 2기 단원 지원 서류의 산을 익숙하게 넘어서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앞에 앉아 키시아르가 하고 있는 일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제 준 편지는 넬라른에 보낼 물건들과 함께 인편에 전달했네. 아마 늦어도 이번 달이 끝나기 전에는 받아 볼 수 있을 거라더군.”

    “아, 그렇군요.”

    “편지를 제법 길게 쓴 것 같던데 왕자가 기뻐하겠어.”

    “글쎄요. 고작 한 장입니다만…… 알파 발현을 하셨다기에 주의 사항을 몇 가지 써 드렸더니 내용이 조금 빽빽해지기는 했습니다.”

    “그래? 그건 나도 궁금한데. 나도 마침 알파 각성자이니 알고 있는 다른 지식이 있다면 들려주길 청해도 되겠나?”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요청이었다. 유더는 에제인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었던 내용을 그대로 재차 읊어 주었다. 어차피 내용 자체는 별것 없었다. 발정기를 피할 때는 수면제를 먹고 상대 2성 발현자를 멀리하라거나, 향을 감출 때 좋다고 알려진 향초, 향이 감정이나 몸 상태에 따라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 등의 정보였을 뿐이었다.

    전부 듣고 난 뒤 키시아르는 몰랐던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왕자가 자신의 미래를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던 게 기억나는군. 그때는 몰랐지만 너는 이전 게임의 그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거겠군.”

    “네.”

    “그는 어땠었지?”

    어땠었느냐라. 유더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소라 껍데기와 거울을 맞부딪치듯 움직이던 키시아르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

    유더는 이전 생의 기억을 돌이켜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섯 별이 따르는 은의 제왕. 방벽의 수호자. 해가 지는 곳의 지배자. 그것이 제가 기억하는 그분의 다른 이름들입니다.”

    붉은 눈동자가 유더의 말을 들으며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분은 그때도 넬라른의 왕이 되셨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피를 흘리고 나서야 오른 자리였습니다만, 철혈을 지닌 뛰어난 제왕이라는 평가를 받았었지요.”

    “철혈의 제왕…… 지금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군.”

    “그분이 다스린 넬라른은 전 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안전한 곳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지닌 능력을 아주 잘 사용하신 덕분에 누구도 그분을 물리적으로 해칠 수 없었고, 넬라른을 침범할 수도 없었죠.”

    “방어 능력 덕분에 말이지.”

    “네.”

    “대단하군.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나?”

    “있기는 했습니다.”

    이 말을 하는 편이 좋을지, 아닐지 잠시 고민했으나 유더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분께서는 제 말을 믿어 주진 않으셨지만, 그래도 목숨을 한 번 구해 주려 하셨습니다. 지금의 그분이 그때의 그분은 아닙니다만, 서부에서 약간의 조언을 드린 데에 그때의 빚을 갚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목숨을?”

    일순 키시아르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을까. 눈을 한번 깜박인 뒤 다시 마주한 붉은 눈동자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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