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6화
다른 사람의 능력을 베낄 수 있는 능력자라는 말에 모두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가케인이 눈썹을 찡그린 채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그러니까…… 다른 각성자의 능력을 베낄 수 있다는 거지? 그게 제일 위험한 능력 아냐?”
“응. 그렇지. 그런데 가일과 두일이 말하기로는 약점이 있어서 그렇게 대단하진 않았다나 봐.”
“아, 복잡한 능력이라 제어가 어려워서?”
“그것도 있겠고, 그 사람이 베낀 능력은 원본에 비해 굉장히 약화된대. 예를 들어 가일과 두일처럼 검기를 쓸 수 있는 능력을 베끼면, 원본보다 약하면서 지속시간도 짧은 힘이 된단 거야.”
“아……. 그렇다면야 당연히 원본 능력을 지닌 사람 쪽이 이기겠네.”
“……그 정도면 일단 베끼는 과정부터가 그리 쉽지만은 않겠군.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힘들게 쓴다면 그 이상은 어림도 없을 테고……. 주변에서 그리 좋은 평을 받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끼어들어 말을 내뱉은 이는 유더였다. 그의 눈빛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평소보다 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럴 때의 유더는 단원들이 알 수 없는 어딘가 먼 곳을 보는 사람 같았다. 칸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도록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역시 유더네. 다른 건 몰라도 그 사람 평판이 그렇게 안 좋은 건 맞는 것 같았어. 동의도 안 받고 제 눈에 좋아 보이는 능력을 베껴서는 여기저기 나서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다며 가일과 두일이 진짜 싫어하더라고. 따라쟁이라는 별명도 있었대.”
“와. 그 별명을 들으니 무슨 느낌으로 싫어했는지 알겠다. 나도 만약 누가 우리 능력을 맘대로 베껴서 잘난 척하면 바로 대련 신청해서 훈련장으로 끌고 갔을 거야~!”
핀이 엄청나게 공감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접적으로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들도 머릿속으로 자신의 능력을 누군가가 베낀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는 듯했다.
자신이 지닌 무언가를 남이 마음대로 베껴 간다는 게 기분 좋을 리 없다. 그것도 완벽하게 복사해 가는 것도 아닌 열화판이라면 더 그럴 터였다.
더군다나 나그란의 별처럼 폐쇄적이고도 다양한 이들이 모인 단체 속에서라면 그런 능력이 환영받기 더욱 어렵다. 사용 여하와 발전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무서워질 수 있는 능력임에도 주변에서 그리 하찮게 취급한 이유가 대충 짐작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현자 일행 중 누군데? 어떻게 생긴 사람이야? 이름은 알아냈어?”
데브란이 숨 가쁘게 물었다.
“응. 한쪽 귀에 흉터가 길게 난 사람이래. 이름은 디에먼.”
‘역시.’
듣고 있던 유더의 눈이 한층 어둡게 빛났다.
지금의 디에먼은 유더가 기억하던 이전 생의 모습과 모든 게 달랐다. 새파랗게 젊은 데다 현재의 나그란의 별을 이끄는 진짜 현자의 곁을 소심하게 따라다니던 그자. 귀에 있던 큰 흉터가 아니었다면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으리라.
유더가 본래 알고 있었던 그의 능력은 사람의 기분을 조작하는 능력 정도였을 뿐인데, 이번 태양궁 침범 사건에 사용된 능력들에서 그 힘의 흔적은 조금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모든 걸 말이 되게 하려면 추측할 만한 이유는 둘뿐이었다.
하나. 디에먼이 지닌 진짜 능력이 사실 유더가 알고 있던 능력과 달랐다.
둘. 나그란의 별이 내분으로 망한 뒤 그놈에게 새로운 제2의 능력이 생겼다.
그리고 드디어 밝혀진 정답은 첫 번째 쪽인 듯했다.
‘타인의 능력을 베낄 수 있다면 젊은이가 늙어질 수도, 내가 기억하던 것과 다른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지. 정해진 능력이란 게 없는 셈일 테니.’
그렇다면 그놈이 유더에게 자신의 능력이 남의 기분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게 된다.
‘그놈이 이전 생에 처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 능력 이외에 다른 힘을 쓰는 건 본 적이 없어. 아마도 그 능력 외에 다른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
그 사정이 뭔지까진 아직 모른다. 그래도 이제 놈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갔으니 미래의 재앙 같은 자가 나타나기 전에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가일과 두일이 알아낸 자는 디에먼이란 사람뿐이야?”
“한 명 더 있긴 해. 안경 쓴 사람. 아마 ‘네조’라는 사람일 거라고 하더라. 현자를 아주 예전부터 따라다녔던 측근 중의 측근이래. 형제들과 친하진 않았던 것 같아서 그 이상은 쓸모 있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
칸나는 그자의 능력이 멀리 보는 능력 같다고 전했다. 좀 더 많이 알아내지 못한 걸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이 정도로도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일단 어떤 능력을 지닌 이들이 있는지는 얼추 다 알아냈으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대응에 문제가 없을 터였다.
‘역시 정보에 특화된 능력을 지닌 사람 한 명의 도움이 다르긴 다르군.’
하지만 나머지 정보부원들이 칸나보다 못하다는 건 아니다. 칸나의 능력이라고 절대적인 건 아니니까.
칸나는 정보를 읽을 만한 자료가 충분히 주어졌을 때 그만큼 큰 능력을 발휘하지만, 반대로 읽을 만한 게 없으면 힘을 발휘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할 일도 많고 무력이 약한 그녀가 세세한 정보들을 하나하나 얻으러 밖을 쏘다닐 수는 없는 법.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을 발휘해 정보부를 키워 둬야 했다.
‘지금은 정보부 소속이 열 명도 안 되지만 지부가 생기면 거기서도 뽑게 되겠지. 그러면 제국 전역에 우리의 눈과 귀가 생기는 거고.’
다양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이 제국을 넘어 전 세계를 상대로 효과적인 힘을 발휘하며 온갖 정보를 수집해 오게 되리라. 지금은 그 시작점일 뿐이었다.
먼 미래를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한 얼굴로, 유더는 칸나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고마워, 칸나. 앞으로 할 일에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뭘. 여기 있는 사람들이 가져와 준 물건과 정보들이 없었다면 내가 이만큼 많이 읽어내지도 못했을 텐데. 어차피 같이 해야 할 일들이 얽혀 있으니까 서로 도우면서 일하는 게 좋지!”
역시 칸나도 자신의 능력 한계는 잘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더는 한결 부드러운 눈빛으로 칸나를 비롯한 정보부원들을 돌아본 뒤 유념해 둘 사항들을 전달했다.
“나도 그동안 알게 된 게 좀 있으니 여기서 전달해 둘게. 모두 오늘 들은 정보들은 절대 잊지 않도록 잘 기억해 둬.”
유더가 정보부원들에게 공유한 정보는 간결했다. 태양궁 침범 사건의 범인이 현자 일행이라는 걸 이제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으며, 그 뒤에는 디아카 공작 일파가 버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최근 직접적으로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는 사실 등이었다.
“와…… 역시 그랬구나.”
“잠깐. 그러면 최근에 카치안 황태자 쪽에서 태양궁 침범 사건 범인을 잡는 임무를 맡기로 했다고 발표가 나온 건……?”
눈치 빠르게도 유더가 말한 정보 이면의 일들까지 파악해 낸 이들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유더는 그들의 웃지 못할 심경을 고려하여 담담히 먼저 말을 해 주었다.
“자세한 건 말해 줄 수 없지만, 황태자 측에서 알고서 받아들인 건 아니야. 하지만 어쨌든 그 일을 하게 된 이상 디아카 공작가와 카치안 황태자 사이에 한동안은 계속 찬바람이 불겠지. 황제 폐하와 단장님께 나쁠 일은 아니라 생각하고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돼.”
디아카 공작과 황태자의 이름 앞에 모두의 표정이 제각기 다양하게 변화했다. 공통점은 그 안에 호의라고는 조금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아직 이들에게 정치적 문제는 어렵고도 먼 곳의 이야기지만, 지난번 마병단 파티에서 보았던 디아카 공작과 그의 측근들은 기억에 깊이 남았다. 얼마나 깊이 남았던지 그날 이후로 디아카 공작이란 이름은 마병단 내에서 거의 황궁기사단과 동급이 된 상태였다.
한마디로 훈련할 때 쓰는 표적이나 공에 이름을 변형해 붙여 줄 만큼 싫어하게 됐단 소리다.
‘이전에 뒤르망 남작 놈의 사과문 같지도 않은 사과문을 표적으로 잘 썼더니 그 이후로 뭔가를 배워서는…….’
감히 훈련 표적에 그런 짓을 하고 있단 사실을 외부에 들킨다면 몹시 시끄러워지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실 유더는 단원들의 대폭 성장한 간 크기를 내심 나쁘지 않게 여겼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나는 곧 단장님을 모시고 2기 단원 모집을 돕기 위해 수도를 떠나게 될 거야.”
유더는 단단한 결심에 찬 눈빛을 한 정보부원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시선을 맞추었다.
“수도에 있는 적들의 움직임이 바뀐다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지만, 그러려면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 없는 동안 뒤를 잘 부탁한다.”
예전이라면 수도에 적들만 한가득 두고서는 이렇듯 편하게 뒤를 맡기고 갈 수 없었을 것이다. 키시아르가 없는 곳에 자신마저 없다면 마병단에 혹시라도 닥칠지 모를 위기를 해결할 이가 없다 판단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더가 없는 사이에도 이들은 분명 제각기 역할을 다해 주리라.
그러라고 그간 누구보다 혹독하게 굴리며 훈련시키지 않았던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기 전까지 훈련 메뉴를 몇 단계 정도 더 강하게 올려 두고 가야지.’
유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할 단원들은 그저 뒤를 맡기겠다는 말에 감격하거나 기분이 좋아져 크게 웃었다. 유더 또한 그들에게 필요할 새로운 훈련들을 생각하며 흡족해했다.
정보부 회의는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유더. 잠깐만.”
회의가 끝난 뒤, 칸나가 유더를 교묘하게 붙잡았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할 말만을 전달했다.
“내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다고 주장하는 갈론 백작 놈한테 던졌던 미끼에 뭔가 걸릴 것도 같아.”
“칼 엔파일에 대한 정보?”
“응. 그놈이 내가 건방지다며 화를 내려다가 체면을 생각해서 다시 절절매길 반복하던 모습이 얼마나 웃긴지 너도 봤어야 했는데…… 아무튼 확실해지면 알려 줄게.”
“알겠어.”
“아, 그리고 호산라 말야. 단장님을 뵌 이후로 생각이 많아진 것 같던데, 이대로라면 입을 여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아. 그래도 좀 더 자극해 볼까? 어떻게 생각해?”
“가만히 둬도 될 것 같지만…… 필요하다 생각한다면 해도 돼. 네게 맡길게.”
“으음. 믿어 줘서 고맙지만 결국 호산라를 흔든 건 단장님이라 섣불리 뭔가 더 하기가 좀 망설여지네. 하, 단장님은 어떻게 나조차 못 한 걸 그렇게 쉽게 해내셨지? 사실 설득 능력을 갖고 계신 게 아닐까? 단장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사실 호산라를 뒤흔드는 시도는 키시아르가 처음 나선 게 아니었다. 호산라를 여태 담당해 온 칸나가 당연히 첫 번째 시도자였으나, 별 효과가 없어 결국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이 나서는 방법 쪽을 택하게 된 것이었다.
‘키시아르가 직접 나선 이상 성공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한 적 없긴 하지만…… 그런 것치고도 효과가 좋긴 했지.’
“……아니, 유더.”
무어라 종알거리던 칸나가 별안간 유더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 믿지 못할 것을 본 사람 같은 눈빛을 지었다.
“너 지금…… 기분이 좋아진 거야? 설마 내가 단장님 얘기를 해서?…….”
“…….”
“아니, 아니! 대답은 안 해도 괜찮아!”
유더가 입을 열자마자 손을 들어 대답을 막은 칸나가 스르르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그녀는 할 일이 생각났다는 말과 함께 빠르게 인사를 건네고는 사라졌다.
“…….”
내가 기분이 좋아졌었나? 유더는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사실 그는 오늘 정보부 회의에 제일 늦게 왔다. 키시아르의 얼굴에 홀려 차를 마시다 말고 약간 농밀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늘 정시보다 빠르게 남들보다 일찍 움직이는 걸 모토로 삼고 있었기에 이런 일은 처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사랑이란 건 깨닫고 나니 두려울 만큼 이성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에도 키시아르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