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화
“그리고, 이 책을 쓴 저자는 남국의 그 어느 부족보다도 그 부족을 굉장히 위험하게 평가하기도 했어.”
안수마 메흐트, 늑대의 눈 부족. 유더의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남아 있던 이름이 가케인의 설명을 듣자 선명히 떠올랐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안수마 메흐트 부족은 이 책이 쓰였을 당시에도 남국 내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는데, ‘모래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하는 다른 부족들에 비해 사막 이북인에게 한없이 친절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느꼈다고 해.”
“모래 전쟁?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친절한데 왜 오히려 위험하다는 거야?”
힌 엘더와 데브란이 동시에 물었다.
“으음, 남부 출신이 아니면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모래 전쟁은 몇백 년 전에 남국이 사막을 넘어 제국을 침범하면서 일어났던 전쟁이야. 그때 우리가 이겨서 맺은 조약 덕분에 남국이 사막 이북을 다시 침범하지 않는 거지. 남부엔 지금도 그때의 전쟁 유적이나 기념 동상이 많이 있어.”
가케인은 남부 출신이라 해당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제법 자세히 설명을 한 그는 말을 끝내기 전 약간 멋쩍은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때 사막에서 단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그 10배나 되는 남국군을 이긴 검은모래 전투의 명장, 주레리 볼룬발트 장군이 내 조상님이기도 해.”
“앗, 어쩐지 너무 잘 알고 있다 했어.”
“너…… 진짜 대단한 가문 출신이었구나.”
모두 신기해했지만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서 새삼스레 가케인을 멀게 느끼거나 분위기가 어색해지지는 않았다. 가문의 자랑을 하긴 했지만 내심 걱정했었는지, 가케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언젠가 남부에 놀러 오면 전부 소개해 줄게. 아무튼, 친절해서 더 위험하다고 느꼈다는 이유는…… 당시 이 사람이 왜 남국에 갔었는지를 봐야 이해가 쉬워.”
가케인의 말에 따르면 책을 쓴 사람은 당시 오르 제국에 있던 어느 상단의 말단 직원이었다. 그는 요즘 남국으로 사업 확장을 위해 떠나는 상인과 기술자들이 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운 사업의 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해 파견된 무리에 끼게 된다.
다른 부족 사람들은 그런 사막 이북인들을 꺼리거나 싫어하는 티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안수마 메흐트 부족 사람들만은 달랐다. 그들은 사막 이북에서 온 이들을 대체로 아주 공손히 대접했다.
사막 이북에서 온 이들이 여러모로 뒤떨어진 남국을 위해 상업과 기술의 발전에 힘써 준다면 그만한 부와 명예를 줄 수 있다는 대담한 제안에 많은 이들이 그곳에 남기로 마음먹는다.
저자가 일하던 상단 주인 또한 그 제안에 혹하여 새로운 상단 지부를 그곳에 세우기로 하고, 직원들은 남국인들의 요청에 따라 셈 방법이나 제국어 등을 가르쳤다.
글쓴이 또한 아이들에게 제국어를 가르쳤고 생각 외로 말을 가르치는 능력이 뛰어나 남국인 지인이 많이 생겼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소개로 차기 족장의 아들까지 가르치게 되는데, 그곳에서의 경험이 남국에 오래 머물려 했던 글쓴이의 생각을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자, 이 부분을 봐.”
유더는 가케인이 짚어 준 부분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족장의 아들 수르메를 가르치던 어느 날이었다. 족장의 집이 평소와 달리 시끌벅적했다. 싸우는 소리 같아 이유를 궁금해하자 수르메는 늘 있는 일이니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쉬는 시간에 몰래 그곳으로 향했다. 거기서 내가 본 것은…… 수년 전 우리보다 먼저 남국에 정착한 덕에 부자가 되었다 자랑하던 말라디 상단 사람들이었다.’
말라디 상단 사람들은 제국식 수도 시설이나 마정석 조명 시설을 남국에 들이는 사업을 하여 큰돈을 벌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글쓴이가 다시 만난 그들은 남국인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한순간에 모든 걸 잃게 되었다며 분노를 토한다.
‘-부족 사람들은 그 분노에도 아주 친절히 대응했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건 사기가 아니라, 동업을 시작할 때부터 명시된 조항의 결과로 그들이 책임져야 할 손실의 결과를 지게 된 것뿐이었다. 누가 보아도 부족인들의 말이 맞게 들렸다. 말라디 상단 사람들은 결국 며칠 뒤 도망치듯 남국을 떠났다. 그들은 곧 잊혀졌다.’
글쓴이의 동료를 비롯하여 남국에 머물던 사막 이북인들은 그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의 머릿속은 하루빨리 남국에서 큰돈을 벌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글쓴이는 차기 족장의 아들이 ‘늘 있는 일’이라 말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불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일이 두 번째로 반복되었을 때, 글쓴이는 생각해 보니 남국에 10년 이상 머물렀던 사막 이북인은 없다는 사실을 몹시 오싹하게도 깨닫게 된다.
‘-우연이라면 우연일 수도 있겠으나, 이상하게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런 나를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남국인들의 검은 달 신앙이 무서워서 그러느냐는 조롱이 나를 따라다녔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나의 느낌을 쫓아가라 말하셨던 어머니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글쓴이는 결국 그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건강을 핑계로 상단주의 만류를 뿌리치고서 홀로 제국에 돌아온다. 그리고 당시 썼던 일기와 기록들을 모아 여행기를 썼다. 그게 바로 이 책이었다.
‘자신의 육감을 무시하지 않는 현명한 놈이었군.’
유더는 가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15년 전에 쓰인 글이라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 책을 보면 정말 신경 쓰이는 점이 제법 많아. 내가 조사한 바로는 이때 넘어간 상인들은 글쓴이가 우려했던 대로 거의 모두 망해서 돌아왔어. 돌아온 상인들은 다들 사업 기반과 기술을 빼앗겼다고 억울하다 말했다더라고.”
“친절한 척하면서 빼먹을 것만 빼먹었단 거구나.”
“그래. 그리고 이 사람들이 믿는다는 검은 달 신앙도 신경 쓰여. 나도 경전에 나온 이야기 말고는 그쪽 교리는 잘 몰랐는데, 이번에 알아보니 옛날에 일어났던 모래 전쟁도 그 신앙 교리를 표면적 이유로 들어 일어났던 거였다더라고. 거기선 검은 달의 여신이야말로 정당한 세상의 주인이라 주장한대. 태양신이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았으니 도로 수복해야 한단 논리지.”
“알고 나니 이제 뭔가 그 남국인 상인들의 정체와 윤곽이 좀 더 확실하게 짐작될 것도 같네.”
칸나가 명쾌하게 말했다.
“지금 사막 이북 나라들에 적대적인 남국의 세력이 정체를 숨기고서 제국 여기저기서 한탕 해 먹으려 다니고 있다는 거잖아. 심지어 십수 년 전부터 내실을 다졌는데 외부에는 소식도 별로 퍼뜨리지 않았고 말야. 좋은 의도는 절대, 절대, 절대로 아니겠어.”
“설마 옛날처럼 전쟁을 또 일으키려는 걸까?”
데브란이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그것까진 아직 알 수 없네. 일단 알아낸 걸 보고했으니까 더 파 보는 수밖에.”
“가케인, 수고했어. 좋은 정보를 찾아온 것 같다.”
유더는 조용히 가케인에게 칭찬을 건넸다.
“그자들이 지금 타인 공작가와 나그란의 별에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어쩌면 몇 년 뒤쯤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들과 수교를 맺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 상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야.”
“설마 그렇게까지 되었을까……?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
지금은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겠지만 그건 이전 생의 오르 제국이 겪었던 일이었다. 유더는 자신이 죽은 뒤 오르 제국이 겪었을 일이 가케인이 가져온 여행기 속의 상인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전쟁이라.’
전쟁은 칼과 피로 이루어진다지만 적어도 지금의 남국인들은 돈이 칼보다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배운 것으로 보였다. 그들이 상단의 탈을 그토록 자연스럽게 쓰고서 제국 곳곳을 들쑤실 수 있었던 건 바로 저 여행기가 쓰인 시절의 일들 때문이리라.
유더는 기쁨을 숨기지 않고 붉어진 가케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계속해서 관련 사항을 조사해 달라 말했다.
“다음은 내가 보고할게.”
데브란이 가케인을 약간 질투하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간 훈련도 빼먹고 나그란의 별이 머물던 숙소 근처 가게에서 열심히 일을 한 그는 주변에 떠도는 소문을 열심히 주워들었다.
비록 황궁에 가 있는 현자 일행의 소문은 더 접하기 어려웠으나 그래도 성과가 있었다.
“주변 상인들이 그러는데, 요즘 5구역에 못 보던 수상한 놈들이 자꾸 돌아다녀서 무섭대. 아무래도 그놈들이 나한과 그놈 동료들인 것 같아. 난 놈들이 언제든 현자가 오면 알 수 있도록 5구역 근처의 어딘가에서 머물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해서 더 열심히 뒤졌지. 그 결과…….”
“아지트라도 찾았어?”
“그건 아닌데…… 그놈들이 자주 출몰하는 것 같은 과일 가게를 찾았어. 그래서 거기로 일을 바꿨지. 본래 일하던 가게의 주인 아줌마가 내가 나간다고 하니 정말 아쉬워하셨지만…….”
“데브란. 네 직업이 마병단이란 걸 잊은 건 아니지?”
“안 잊는다고! 아무튼 거기서 나한은 아니지만 각성자로 의심되는 놈들은 찾았어!”
제대로 된 정보는 아니나 그것도 큰 성과였다. 유더는 데브란에게도 공평히 칭찬을 건넸다.
다음은 엘더 남매였다. 그들은 현자의 숙소에 침범하여 가지고 온 물건들을 토대로 그간 칸나가 정보를 읽어내는 일을 도왔다고 당당히 말했다.
“가케인이 그때 찾아냈던 가죽끈 주인이 렌보우라는 귀족인 건 이제 알았으니까, 한동안은 그 작자를 미행해 볼 생각이야.”
“그럼 이제 드디어 내 차례네.”
칸나가 열심히 집어먹던 과자를 내려놓고 손을 털었다.
“너희가 숙소에서 가져온 물건을 통해 거기 있던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의 능력을 파악하는 데 대충 성공했어. 다만 이름까지는 못 읽어 낸 경우도 있으니까 참고해.”
이전보다 훨씬 정교해진 능력으로 칸나는 물건에 담긴 주인들의 정보를 읽어 냈다.
“우선 감염과 비슷한 방식으로 동물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자. 이 사람은 아마도 동물을 통해 사람까지 조종할 수도 있는 걸로 보여. 그리고 일정 장소를 보이지 않게 가둘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 이건 보호와 감금, 두 가지 모두 가능한 걸로 예상돼. 그리고 특정 대상의 시야를 빌려 먼 곳을 볼 수 있는 사람과, 서로 다른 능력을 일시적으로 합쳐 줄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
“허, 하나같이 대단하네. 과연 그냥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다 이건가?”
데브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남는데…… 이 사람 능력이 가장 정보 읽기가 어려웠어. 처음엔 아마 굉장히 여러 가지 능력을 가졌거나, 아니면 그런 것처럼 보이는 능력을 가진 사람 같다고 생각했었지.”
“그게 아니면 뭐야?”
“거기서 좀 막혀서…… 아무래도 내 능력만 믿기보다는, 여태까지 목격된 현자 일행들의 인상착의를 토대로 마병단에 머무는 가일과 두일한테 물어보고 검증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 힌과 핀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해 봤지. 근데 가일과 두일이 굉장히 흥미로운 능력을 가진 사람 얘기를 하더라.”
“흥미로운 능력?”
“응. 다른 사람의 능력을 베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