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4화
유더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밖에서 할 일은 끝났으나 그렇다고 곧바로 자지는 않는다. 곧 수도를 떠나야 하니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방 정리를 해 두어야 했다.
‘요즘 물건이 너무 쌓였어.’
말린 꽃이 넘치도록 꽂힌 병들은 그렇다 치고, 여기저기서 들어온 선물들로 서랍이 터질 기세다. 그중에는 물론 키시아르가 사다가 안긴 수많은 옷과 보석도 한몫했다.
이전 생에는 어디서 지내든 방이 좁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넘쳐나는 짐 때문에 제 방인데도 상당히 낯설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집을 구할 생각은 없으니까.’
유더는 단원이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는 기한이 지나도 가능하면 이곳을 떠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남는 건 짐 정리를 잘해야 한다는 강제적 선택뿐이었다.
키시아르에게 받은 물건들은 전부 저번에 옷장에 몰아 넣어 두었으니 새삼 다시 정리할 필요는 없다.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서부에서 돌아온 이후 쏟아진 선물들이었다.
유더는 대충 쑤셔 박아 두었던 물건들을 끄집어냈다. 우선 종류별로 구분한 뒤 작은 물건은 상자에 넣고 큰 물건은 각을 맞춰 정돈했다. 중요도가 높은 물건들은 따로 빼 두기도 했다.
‘이 브로치는 서부 마법사 연합에서 보낸 거였지. 그리고 이 펜은 재상이 서부의 관리들을 대표하여 보낸 물건…….’
미칼린 펀트가 보낸 서부 마법사 연합의 선물은 그들이 직접 가공했다는 노란 마정석이 박힌 브로치였다. 편지에 의하면 노란색은 서부 연합의 상징으로, 대삼림에서 연구를 할 때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보호 마법과 연합의 문장을 새겼다고 했다.
영구적인 사용은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특별히 공을 들여 만들었기에 쓸 만할 거라는 자랑이 편지에 쓰여 있더라니, 과연 그래 보였다. 적어도 예전에 2성 발현을 겪었을 때 알릭에게 받았던 1회용 보호 팔찌와는 비교할 수 없을 터였다.
여기에 쓰인 마정석이 나온 곳이 바로 이번에 발견된 사라인 대삼림의 마정석 광맥인 것까지 합해 의미 깊은 선물이라 할 만했다.
‘그 광맥 발견 덕에 오랫동안 유명무실했던 대삼림의 국경 분할이 제대로 다시 시작되었지.’
비상식적인 성장을 멈춘 대삼림은 요즘 대대적으로 벌채 중이었는데, 그게 끝나고 나면 삼림 내에 국경이 뒤섞여 있던 나라들끼리 모여 국경을 제대로 다시 나눌 예정이었다. 거대한 광맥의 소유권과 채굴권을 조금이라도 잘 나누기 위해 이루어진 각 나라의 협력은 아주 신속하고도 빨랐다.
그럴거라 짐작은 했지만, 역시 여태 타인 가를 비롯한 다른 공작가들 쪽과 역사적으로 좀 더 긴밀히 지내 왔던 서쪽 나라들도 막대한 돈을 벌 기회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거대한 마정석 광맥 채굴 지분을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 보려면 여태 힘이 없다 여겼던 오르의 황제 측에 머리를 열심히 숙여야 할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칠 케일루사 황제도 아니니 지금쯤은 알아서 발을 잘 넓히고 있으리라.
유더는 그 브로치를 단복 안쪽 옷에 달아 두었다. 쓸 만한 물건이니 수도 밖으로 나갔을 때 도움이 될 듯했다.
다음으로, 재상이 보낸 펜은 보통 사용하는 평범한 깃펜이 아닌 마법이 걸린 펜이었다. 재상이 쓰는 물건과 일부러 똑같이 만들었다더니, 펜촉 끝이 쉽게 닳지 않도록 강화시키고 그립감을 위해 중간에 천과 나무로 만든 깍지를 끼워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이 펜에 걸린 마법은 물을 잉크로 바꾼다고 했지.’
지금의 펜은 잉크 없이는 글을 쓸 수 없기에 늘 준비가 필요하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글 쓸 일이 많은 소수의 사람은 물을 잉크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이 걸린 펜을 썼다.
물론 그것도 영원하지는 않기에 사용량에 한계가 있다. 비싼 가격에 비해 사용 기한은 반년 정도가 끝이라 혹자는 대단한 낭비라 일컬었다. 그래도 재상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이라면 그런 귀찮음을 막론하고서라도 쓰는 쪽이 편하리라.
펜 윗부분에는 재상의 이름자와 가문의 인장이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었다. 이 펜의 존재만으로도 평범한 관리들은 유더와 재상 사이의 친분을 의심하지 못하리라.
‘그러니 이것도 당연히 가져가야겠군.’
유더는 펜을 챙겼다. 그다음으로도 몇몇 물건을 정리하다 보니, 작은 상자 위에 섞여 있던 서신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이건…….’
그것은 얼마 전에 받았던 에제인 왕자의 편지였다. 키시아르와 있었던 일로 정신이 없어 제대로 읽지 못했는데, 서랍에 넣은 뒤 다음에 읽는다는 게 그만 잊고 있었다.
유더는 에제인 왕자의 서신을 펼쳤다. 왕자답게 아름다운 필체가 나타나며 묘한 향이 아스라이 느껴졌다.
‘-나의 존경스러운 벗, 유더 아일에게.’
서신의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에제인 왕자는 넬라른 내에서 성공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한 듯 보였다. 그렇다는 건 조만간 나라 안의 모든 혼란을 정리하는 대로 그가 왕세자가 되어 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었다.
에제인은 이 모든 고난이 끝나고 넬라른의 백성들에게도 평화와 웃음이 찾아오는 날이 돌아온다면, 마병단과 같은 단체를 넬라른에도 만들고 싶다고 적었다.
‘이미 나를 따라 주는 충실하고 선량한 각성자들이 존재하지. 내가 마병단과 같은 곳을 만든다면 그들이 그 단체의 주춧돌이 되어 줄 거라 믿고 있어. 그때가 되면 마병단에 교류를 청할 예정이야.’
에제인은 이제 자신이 왕이 된 이후를 제대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편지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평온해 보였으며, 전에 없던 확신에 가득 차 보였다.
‘그 유명한 마병단의 단장 보좌이자 나에게 미래 이후를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 유더 아일 경이 이곳에 와 줄 수 있다면 넬라른의 각성자들도 많은 힘을 얻게 되겠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해.’
에제인 왕자가 마병단 같은 단체를 만들기 위해 제국에 도움을 청한다면야 그와 돈독히 지내는 쪽이 좋은 입장에서는 받아들이는 쪽이 당연히 이득이다.
정말 자신이 가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이전 생에도 넬라른에는 몇 번 가 보았기에 크게 낯설지는 않을 듯했다.
유더는 조용히 맨 마지막에 적힌 추신까지 읽어 내렸다.
‘추신. 얼마 전 갑자기 내가 열이 올라 모두가 당황한 적이 있었지. 독에 당한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2성 발현을 하지 않았겠어? 그렇게 알게 된 내 2성은 알파라더군. 아직은 2성이 생겼다는 사실이 낯설지만 곧 적응할 수 있겠지.’
에제인 왕자가 알파로 발현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글만 보아도 대충 각성자로서도 잘 적응하고 발전 중인 듯하니 앞으로도 그의 앞날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지금처럼 상황이 좋지 않았을 이전 생에도 능력 하나로 알아서 왕좌를 손에 쥐고 제국을 뛰어넘을 만한 나라를 일구어 낸 제왕의 싹이고, 이젠 거기에 더해 진짜 충심 깊은 부하들까지 얻었다. 그런 이가 여전히 유더 자신을 벗이라 부르는 건 좀 근질대긴 했지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할 시기는 이미 지나 버렸다.
유더는 편지에서 풍기는 마른 낙엽 냄새처럼 희미한 향이 어쩌면 에제인이 2성 발현으로 얻게 된 향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편지를 도로 집어넣었다.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느라 대부분의 냄새는 이미 다 빠졌을 텐데도 종이를 만질 때 피부를 통해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향은 후각이 아닌 피부로도 전해진다. 아무래도 에제인 왕자가 발현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편지를 쓰느라 그의 향이 서신에 몹시도 짙게 배어든 듯했다.
유더는 잠시 고민하다 종이를 꺼내 재상의 펜으로 답신을 적었다. 마병단장 시절 외우듯이 써 댔던 안부 문구를 쓰고, 그 밑에는 알파로 발현했다는 왕자를 위해 자신이 아는 주의 사항을 몇 가지 첨언하니 한 장이 꽉 찼다.
‘……이 정도면 이전 생에서 그가 나에게 보인 동정심 값 정도는 갚는 셈 칠 수 있겠지.’
보내는 건 도로 키시아르 측에 맡기면 알아서 넬라른 측에 보내는 서신 사이에 잘 끼워 줄 것이다.
유더는 보낼 편지를 테이블 위에 두었다.
다음 날, 그 편지를 전달받은 키시아르가 아주 화사한 얼굴로 잘 전달해 주겠노라 대답하며 권한 차를 마시다가 불현듯 지나친 아름다움에 홀려 예상보다도 훨씬 오랜 시간을 머물게 될 줄은 예상치 못한 채였다.
***
“자! 두 번째 정보부 정기 모임 시작!”
“박수!”
엘더 남매의 외침을 들은 휴게실 내부에 어색한 박수 소리가 퍼졌다.
“데브란, 더 크게 안 쳐? 가케인처럼 치라고.”
“유더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걸 왜 해야 하는데?”
데브란이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그냥 재미있으니까? 아무튼 오늘은 간식도 좀 가져왔으니까 먹으면서 얘기하자.”
“그래. 오늘은 특별 손님도 끼었잖아.”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오늘의 특별 손님, 칸나 완드에게로 향했다. 칸나는 싱글거리며 짐짓 귀족처럼 멋진 인사를 해 보였다.
“그래. 나만 빼고 이런 멋진 모임들을 하고 있었다는 게 좀 부럽지만, 오늘은 나도 끼었으니까 괜찮아. 힌이 날 위해 가져다준 버터 쿠키도 있고.”
“그거 맛있지?”
“진짜 맛있어. 어디서 산 거야? 5구역의 거긴가?”
“잡담은 그만하고, 이제 그만 집중해 줬으면 하는데.”
조용히 서류를 넘기던 유더의 말에 금세 주변이 조용해졌다. 유더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눈빛을 잃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진지한 엘더 남매와 특별 손님 칸나, 전보다 피로해 보여도 오히려 생기가 도는 가케인, 그간 햇볕에 얼굴이 많이 탄 데브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혼자 활동하는 이논을 제외하면 정보부의 모든 이가 모인 오늘의 자리는 2기 단원 모집을 앞두고 수도를 비우게 될 이들을 위해 마련된 중간 점검이었다.
오늘 정보를 주고받을 주제의 큰 축이 나그란의 별과 현자이기에 이 일에 밀접히 연관된 칸나를 특별히 초대했다.
“우선 지난번 모임 이후 모두에게 공유된 정보 이외에 새로운 정보를 얻은 사람이 있다면 보고해 줘.”
“나 먼저 말해도 되나?”
가케인이 약간 쑥스러운 얼굴로 손을 들었다.
“저번 모임 이후로 내가 너무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서 좀 열심히 움직여 봤거든. 현자에 대해선 별로 얻은 정보가 없었지만, 유더가 따로 더 조사해 보라고 말했었던 남국의 부족 문장에 대해선 뭔가 알아낸 것 같아.”
“진짜? 어떻게?”
“남국 출신인 분을 만날 일이 요즘 좀 있었거든. 혹시 남국에 대해 알고 싶으면 뭘 해야 할지 물어봤더니, 책을 하나 빌려주셨어. 15년 전쯤 남국에 다녀온 사람이 쓴 책이더라고. 지금은 못 구하는 책이래.”
“아, 정말?”
가케인은 그 책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낡디낡은 표지에는 제목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 유더가 그려 준 문장이 어느 부족 문장인지 알게 됐지. 그건 분명 안수마 메흐트라는 부족의 문장일 거야. 우리 말로는 늑대의 눈이란 뜻이래. 남국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큰 부족이었고, 예전에는 남국 전체를 통일해서 나라를 세우기도 했었다더라.”
그 바쁜 틈에 언제 두꺼운 책을 다 읽었는지, 가케인의 설명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저자는 남국의 그 어느 부족보다도 그 부족을 굉장히 위험하게 평가하기도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