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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93화 (593/805)

593화

황제가 훈련실로 들어간 뒤 3시간.

바깥에 앉아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안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들어갈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의 유더 아일이었다.

“훈련은 끝나신 겁니까?”

“예. 끝났습니다.”

“백작님께서는……?”

“그분께서는 안에서 쉬고 계십니다. 배웅 없이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고 말씀하셨기에 저는 먼저 자리를 떠나려 합니다.”

“아, 그렇군요. 훈련은 좀…… 어떠셨습니까?”

황제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첫 훈련 진행도 만만치 않게 궁금한 사항이다. 하지만 훈련실 안에는 대체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인지,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시종장의 애타는 마음을 담은 질문을 들은 유더는 순순히 답을 해 주었다.

“훌륭히 모두 끝내셨습니다. 솔직히 3시간 내로 전부 끝내지는 못하실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만…… 제가 너무 염려했던 것 같다는 반성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랬군요!”

시종장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평소에는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 보였던 주름진 눈가에 물기가 조금 어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노련한 궁인답게 감정을 갈무리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예. 그러면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인사를 돌려준 유더가 이내 조용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쳐 사라졌다. 기쁜 기색으로 훈련실로 들어선 시종장은 바닥에 널브러진 잡동사니 사이로 멍하니 누워 있는 황제를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폐……, 백작님? 거기에 왜 누워 계시는 겁니까?”

케일루사 황제가 1황자로 태어나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던 시절부터 수십 년을 보아 왔지만, 이렇듯 체통 없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릴 때부터 어마어마한 활동량을 자랑하며 궁인들을 긴장시켰던 그의 아우와 달리 황제는 얌전히 앉아 독서하기를 더 즐겼던 깔끔하고 우아한 성향이었다.

“……아, 율리버.”

한 박자 느리게 시종장의 이름을 부른 황제가 서둘러 제 몸을 부축하려 하는 팔을 거절하며 기운 없이 입을 열었다.

“바닥도 시원해서 나쁘지 않으니 굳이 일어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른 이가 보는 것도 아니니 잠깐 이대로 있게 해 다오.”

“대체…… 무슨 훈련을 하셨기에 이렇게 지치신 겁니까? 아일 남작님의 말로는 아주 잘 끝냈다고 하셨는데…….”

“그가 그리 말하던가?”

황제가 묻고는 이내 짧은 웃음을 흘렸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앞머리칼이 뒤엉킨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예. 아닙니까?”

“잘했다기보다는…… 동정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맹수가 버티고 서 있는 벼랑 끝에 매달려 간신히 버텨 냈다는 쪽에 더 가까웠지.”

“예?”

맹수? 벼랑?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시종장이 눈을 깜박이는 사이 황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살면서 만날 가장 혹독한 스승은 승마를 몸소 가르쳐 주셨던 어머니일 줄 알았는데…… 산이 아무리 높아도 그 위에는 하늘이 있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군.”

3시간. 어찌 보면 아주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유더 아일과 함께 훈련실에서 보낸 3시간 동안 황제는 시간이 5배 정도 늘어난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 시간 동안 유더는 온갖 방법으로 황제를 한계까지 쥐어짰다. 수십 개의 물건에 능력을 걸도록 시키고, 그것들을 바람의 힘으로 창밖에 내던져 다른 이들의 눈에 뜨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옮기면서 발동된 능력의 한계를 체감하도록 만든 건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동시에 수십 개의 장소에서 수십 개의 정보가 들어오는 걸 인지하고 입으로 읊는 동안 헛구역질이 몇 번 나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유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황제에게 온갖 주문을 했다.

‘이 정도는 현재 수준으로도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마병단원들도 처음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곤 했었으나 제 판단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힘들다 여겨지는 감각은 그저 익숙지 않은 힘이 움직이며 느껴지는 근육통과 비슷한 것이니 속지 마십시오.’

‘힘은 자신의 손발과 같습니다. 사람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일 때 굳이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지 않지요. 그런데 백작님께서는 왜 새로 생긴 손발을 하나하나 살피며 힘겨워하십니까?’

‘한 번만 더 해 보시지요. 이번에 안 된다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해 보겠습니다.’

안 되면 그냥 포기하자는 선택지 따위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 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유더는 손가락 하나로 물을 만들어 내어 물잔과 비슷한 모양으로 띄운 뒤 황제에게 주었다. 태어나서 그런 식으로 만들어 낸 물을 마셔 본 건 처음이었다.

적절한 온도로 생성한 물줄기를 단 한 방울도 튀기지 않고 손쉽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보자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능력 조절력의 차이가 소름이 돋을 만큼 확실하게 느껴졌다.

유더 아일은 진짜로 스스로의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자였다. 자신이 내준 과제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몸소 그런 식으로 보여 주니 못 하겠다는 말이 나오려 해도 나올 수 없었다.

나약한 마음 따윈 단숨에 짓밟을 듯 냉철한 눈빛. 진짜 한계가 온 게 아니라는 걸 자기 자신보다 더욱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한 얼굴 앞에서 황제는 지니고 있던 모든 오기와 인내심을 일깨웠다.

그간 고통이라면 질릴 만큼 견뎌 보았다. 이제 와 이런 훈련 하나 참아 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럼에도 막판에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훈련실인지, 어딘지 모를 야외 훈련장 구석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각이 뒤섞여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하고 테이블 아래에 눕고 말았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바닥을 긁으며 기어이 마지막 과제를 해낸 순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낯선 성취감이 황제의 가슴 속에 차올랐다. 마치 악마에게 홀렸다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충분히 해내실 수 있을 것이라 말씀드렸었지요. 정확하게 3시간 동안 모두 끝내셨습니다.’

숨을 헐떡이는 황제의 곁에서 유더는 짧게 그리 말했다. 황제의 고생을 염려하거나 사과하는 말 따위의 인사치레는 오가지 않았다. 정도 이상의 사적인 대화도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그런 공평한 태도가 오히려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와 달리, 그의 앞에서는 바닥에 누워 있어도 수치스럽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부나 허언 따윈 없이 담백한 태도와 단호한 가르침 앞에서 황제는 아주 오랜만에 황제라는 존재가 아닌 케일루사 라 오르라는 한 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분명 키시아르의 말대로 누구보다 뛰어난 각성자이며 대단한 훈련사였다. 황제의 스승이 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자였다.

황제가 그에게 직접 능력 훈련을 받기로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 짧은 여유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 내일은 오늘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될 예정이었다.

생각만 해도 벌써 손발이 떨릴 정도였으나 황제는 한편으로 기대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키시아르. 너도 생각이 있다지만, 이런 인재를 추문 속에 더 오래 내버려 두지는 말길 바란다.’

유더 아일은 어쩌면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될 것이다. 그건 황제이기 이전에 역사를 좋아했던 학자로서 느낀 예감과 판단이었다. 신분도, 나이도, 그 외의 어떤 한계도 그런 이라면 분명 족쇄가 아니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눈부시게 날아오를 게 뻔한 인재가 어쩌다가 제 아우의 곁에서 온갖 추문으로 얼룩진 힘겨운 길을 가고 있는가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럴수록 아우가 그에게만 남다른 이유가 날이 갈수록 이해될 듯하여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샘솟았다.

‘선택이란 결국 쌍방인 법이니.’

누군가에게 향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으랴.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바로 케일루사 황제 본인이었다…….

아우도, 인재도 아끼는 황제는 오늘도 복잡다단한 심경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공작 전하, 황태자 전하께오서 보내신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일전에 보내신 전갈에 대한 답은 언제쯤 들을 수 있을지 무척 염려하셨다고 합니다.”

“언제는 내 말을 그리 참고하고 염려하였다고 그리 안달을 내시는지 모르겠군. 편지는 나중에 볼 테니 두고 가거라.”

디아카 공작은 하인이 전달한 황태자의 서신을 차갑게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황족의 서신을 즉시 보지 않는 건 경을 칠 일이지만 과연 누가 디아카 공작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공작의 곁에 앉은 귀족들은 돌멩이보다도 하찮은 취급을 당하는 황태자의 서신을 보면서도 아무도 염려하지 않았다.

“잘하셨습니다, 공작 전하. 황제 폐하를 홀로 만나실 때는 공작 전하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으셨을 텐데 이제와 저러시는 걸 보니 마음이 아주 초조하신가 봅니다.”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아주 영민하시고 공작 전하를 친혈육보다 더 생각하시는 분이라 들었는데, 누가 그리 그분께 나쁜 바람을 불어넣은 걸까요.”

“그게 누가 바람을 불어넣은 탓일까요? 씨앗이 건강하지 못한 것을 정원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법이지요.”

누군가의 비유에 귀족들이 일제히 숨죽여 웃음을 흘렸다. 뇌를 몽롱하게 만드는 약 냄새가 연기에 뒤섞여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연초를 담은 긴 파이프를 깊이 빨아들인 디아카 공작은 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주 말라 죽게 둘 수는 없는 법이지. 화는 나지만 어쩌겠나. 결국 꽃을 봐야 하는 건 내 쪽이니 적당히 가지를 쳐 주고 비료를 주는 수밖에. 태양궁에 침입한 놈들이라 자백할 만한 놈들을 적당히 물색해 건네주어야지.”

“정말 자비로우십니다.”

진심 어린 칭송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중, 어떤 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길이 아주 시끄럽더군요. 마병단 모집 때문이라지요?”

“아, 나도 보았소. 펠레타 공작이 요즘 완전히 기고만장한 것 같더군. 시끄러워 살 수가 없는데 대체 언제쯤 끝날는지 원.”

요즘 해당 사항으로 불만이 쌓인 귀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열심히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을 욕했다. 디아카 공작이 독한 연초만 들이킬 뿐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기에 말의 수위는 거침없이 높아졌다.

“그토록 대대적으로 모집한다면 어디 사람이나 제대로 가려 뽑을 수 있겠소? 개나 소나 모인 탓에 사람이 아니라 돼지가 들어가도 눈치도 못 챌 정도라던데 말이오.”

“하하하, 웃기군. 내 천한 꼽추 마구간지기 놈을 거기에 한번 보내 볼까? 알아볼지 못 알아볼지 궁금한데.”

“그거 제법 내기해볼 만하군. 나도 참여하겠소.”

“나도 한 손 보태 볼까. 새로 들인 난쟁이 광대를 보내면 딱 좋겠군.”

“하하하.”

“디아카 공작 전하. 전하께서도 함께하시겠습니까?”

누군가 대담하게 입을 열자 모두가 일시적으로 잠시 멈칫했다. 그 간 큰 이야기를 꺼낸 자는 황태자의 치료사들과 연락을 맡고 있는 렌보우 자작이었다.

연기를 내뿜던 디아카 공작이 무심히 물었다.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데, 그래야 할 이유가 있겠나?”

“꼽추 마구간지기 따위를 보낸다면 재미가 없겠지요. 하지만 눈과 귀를 마병단에 심어두기에는 가장 적절한 때가 아닙니까.”

“내가 모집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했을 줄 아는가, 렌보우. 그런 장기적인 임무를 맡길 적당한 각성자 놈을 찾는 건 몹시 어려워. 적어도 5년 정도는 알고 지낸 이가 되어야 믿고 맡길 만한데, 세상에 그놈들이 나타난 지는 아직 2년밖에 되지 않았지. 차라리 새로 뽑힌 놈들을 기다렸다 꼬여내는 쪽이 손해가 적을 거라는 뜻이네.”

“물론 영명하신 공작 전하께서는 저 따위보다 깊은 생각을 해 두셨겠지요. 하지만 하나를 잊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얼마 전 만나신 치료사들 또한 언제나 전하를 위해 일할 준비가 된 각성자들이란 것 말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입술에서 파이프를 떼어 낸 디아카 공작이 재를 털어 내며 물었다.

“렌보우, 이제 보니 그 생각은 자네가 아니라 그자들 쪽에서 먼저 청했군?”

“하하,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여우 같은 놈들. 디아카 공작이 입 안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차가운 흥미를 품은 채 렌보우를 응시했다.

잠시 후 디아카 공작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래. 일전에 그자들을 만난 뒤 나도 흥미가 제법 솟았던 참이었지. 이번에도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 보라 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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