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새로운 날이 밝았다.
마병단 본부 앞에는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산더미 같은 지원서를 싣고 온 짐마차가 줄을 섰다. 바쁘게 지원서가 든 상자를 옮기는 고용인들의 뒤로 세수조차 하지 않고 뛰어나온 단원들의 기합 소리가 훈련장을 가득 메웠다.
겨울임에도 아랑곳없이 내지르는 힘찬 고함, 간간이 들려오는 작은 폭발 소리,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들처럼 바쁘게 흘러가는 풍경.
누구라도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생동감이 넘치는 그 광경을, 두 남자가 맨 뒤에 줄을 선 마차 안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모자와 외투를 걸치고 안경을 쓴 젊은 사내와 그를 정중히 모시고 있는 나이 든 노인. 외모를 바꾸는 마도구를 쓴 덕에 겉보기에는 그저 어디서나 볼 법한 귀족과 기품 있는 집사 같았지만 사실 그들의 정체는 케일루사 라 오르 황제와 시종장 율리버였다.
“앞에 줄을 선 마차들이 영 줄어들질 않는군요. 혹 지루하시진 않으십니까.”
“괜찮네. 훈련 구경이란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군. 지나치게 분위기가 격렬한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철로 만든 울타리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훈련장의 풍경은 몹시 살벌했다. 붉은색 공 하나를 가지고 두 팀이 뺏고 뺏기는 쟁탈전을 벌이는 중이었는데, 흙과 먼지투성이가 되어서도 악착같이 몸을 날리는 모습이 훈련이라기보다는 패싸움에 더 가까웠다.
원수를 마주한 듯한 몸싸움 끝에 붉은 공을 낚아챈 어느 단원이 네발로 짐승처럼 미친 듯이 뛴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곧바로 그 뒤를 쫓았다. 훈련장을 순식간에 절반쯤 가로지른 인원들 사이로 갑자기 빛의 화살이 우수수 내리꽂히며 땅이 폭발했다. 화살을 쏜 이는 공을 지닌 단원과 같은 색의 완장을 찬 같은 팀원이었다.
사방으로 튀는 흙더미를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튕겨 내고, 그 위를 날카로운 바람이 쓸어내며 별안간 쏟아진 불과 맞섰다. 험악한 비난과 고함이 귀를 찢었다.
짐승인지 사람인지 구별이 안 갈 만큼 지독하게 싸워 대는 그 모습들을 보며 황제는 시종장이 따라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조그만 마석 난로를 발치에 둔 덕에 마차 안은 아주 훈훈했다.
천천히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동안 창밖을 통해 보이는 시야도 함께 움직였다. 황제는 점차 드러나는 마병단 정문과 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키시아르의 취향 그대로군.’
저 건물을 만들기 전, 황제는 키시아르가 몸소 설계하여 들고 온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마병단이 만들어진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황제의 머릿속에는 아직 그림으로만 남아 있던 그것을 드디어 현실에서 보게 되니 기분이 약간 묘했다.
‘폐하. 이곳이 만들어지거든 꼭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마병단 설립을 허가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한창 귀족들과 씨름을 하던 그 시절. 키시아르에게 그 부탁을 들었던 때만 해도 황제는 자신이 이 건물을 보지 못하고 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얼마 전까지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고통도 없이, 멀쩡하게 앉아서 마병단 건물을 몸소 지켜보고 있다.
그 사실이 주는 자유로움을, 기적 같은 생경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 똑똑.
그때, 바깥에서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앞에 서 있던 짐마차들이 모두 사라지고 황제가 탄 마차가 가장 선두에 와 있는 상태였다.
시종장이 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밖에서부터 밀려 들어왔다.
황제는 검은 단복을 단정히 걸친 채 곧은 자세로 서 있는 검은 머리칼의 마병단원과 눈이 마주쳤다. 창백한 피부를 지닌 사내는 추위 속에 홀로 유리된 존재처럼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오늘 마병단에 방문해 주시기로 한 윌리어트 백작님이십니까?”
“그렇소.”
시종장이 대신하여 대답을 했다.
“저는 마병단장 보좌인 유더 아일입니다. 아일 경이라 불러 주십시오. 마병단에 방문하여 주신 손님들께 마병단과 단장님을 대표하여 환영의 인사를 전합니다.”
윌리어트 백작이란 이름은 당연히 가명이다. 황제가 정체를 숨기고 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신비로울 만큼 대범했다.
황제는 유더의 태연함을 기껍게 여기며 시종장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내려서 본 마병단의 모습은 마차 안에서 보던 때보다 훨씬 더 근사하게 느껴졌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건물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마병단이군.”
“그렇습니다. 윌리어트 백작님께는 마병단의 모든 곳이 열려 있으니, 혹 들어가는 도중 보고 싶은 장소나 궁금한 부분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조금 바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돌아온 유더의 답을 듣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지. 바쁠 텐데 이렇듯 시간을 내주어 고맙군, 아일 경.”
황제는 흔쾌히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라 유더와 시종장이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유더는 윌리어트 백작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는 황제를 데리고 마병단 곳곳을 돌았다.
그간 체력이 많이 회복되었는지 황제는 이제 이 정도로는 숨을 헐떡이지도 않았다. 간혹 궁금한 게 나타나면 걸음을 멈추고 관찰하거나 서슴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한 나라의 황제라기보다는 우아한 모습으로 공부에 몰두 중인 젊은 학자 같았다.
“이 족쇄 같은 것들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단원들이 근력을 기르기 위해 평소 팔다리에 차는 물건입니다.”
“그러면 저기, 실내 벽을 뚫고 나온 풀들은?”
“이논…… 아니, 의료부의 약사가 가꾸고 있는 약초의 일부입니다.”
“저런 약초는 처음으로 보았군.”
생각해 보면 이전 생의 카치안 황제는 이런 식으로 마병단을 돌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 보기 좋은 풍경만 있는 건 아님에도 사소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하는 케일루사 황제가 새삼 키시아르의 혈육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편지를 비롯한 온갖 정보를 통해 마병단의 모습이나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쯤은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실물을 보는 건 기분이 많이 달랐을 터다.
만족할 만큼 내부를 살핀 황제는 마지막으로 어느덧 마병단의 명물로 자리매김한 중앙 복도 난간의 새끼 고양이 니폴렌까지 만나러 갔다.
“이 고양이가 정말 타인 가의 5남, 니폴렌 반 타인이 맞나?”
“네. 맞습니다.”
“이렇게만 보아서는 정말 모르겠군.”
황제가 중얼거리자 난간 위에 웅크려 있던 새끼 고양이가 초록색 눈을 설핏 뜨고는 귀를 조금 쫑긋거렸다. 각성자를 알아보는 새끼 고양이는 오늘도 유더의 손바닥에 조그만 꼬리를 감았다가 놓아주었다.
“그래, 안녕.”
“그게…… 인사인가?”
황제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엘레…… 음. 1공자 프루엘레의 말로는 그렇다고 하더군요. 답을 해 주는 게 좋다고 하기에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저 외에도 다른 단원들 또한 마찬가지로 인사를 돌려줍니다.”
이 묘한 인사를 자신만 하는 건 아니라는 뜻으로 답해 주었는데도 우습기는 했는지 황제의 입가가 조금 실룩였다. 시종장은 아예 솔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병단은 정말 재미있는 곳이군요. 새끼 고양이가 인사를 하면 반드시 돌려주어야 하는 곳이라……. 음?”
그때, 니폴렌이 황제의 손바닥을 향해 꼬리를 살랑거렸다.
“지금 내게도 인사를 하려는 건가?”
“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을지 모르겠군.”
케일루사 황제는 조금 망설였으나 이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고양이를 향해 손등을 내밀었다. 니폴렌이 꼬리로 황제의 손목을 한번 감았다가는 놓았다.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어 답을 해 주었다.
“인사를 나누는 건 좋은 일이지. 언제나 축복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니폴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게 우웅 하고 울었다. 멀쩡한 성인 남자가 손바닥만 한 고양이를 상대로 엄숙하고도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실로 우스웠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한결 따뜻해졌다.
“제게는 인사를 해 주지 않는군요. 저도 인사를 잘 돌려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니폴렌은 각성자를 좋아하고, 그 외의 대상에게는 아직 거리를 두는 편입니다.”
“신기하군요. 그걸 알아볼 수 있다니…….”
그때, 아래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버와 칸나가 나란히 올라오다가는 유더와 황제 일행을 보고 놀랐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유더?”
유더는 황제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마병단에 방문한 손님을 안내하는 중이라고만 짤막하게 설명했다.
“아…… 그랬군요.”
두 사람은 그 설명만으로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지고 온 가방 안에서 직접 만든 듯한 방석을 꺼내 계단 난간 위에 새로 올려 두었다.
“자, 니피. 좋아하는 빨간색 방석이야. 에버 언니가 새로 만들었어. 마음에 들지?”
요즘 새로운 물건에 부쩍 관심을 보이게 된 고양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방석 위로 이동했다. 몸을 비비며 작게 울자 에버가 씩 웃었다.
“좋아하는 것 같네. 다행이다.”
“그럼 우린 먼저 갈게, 유더. 나중에 봐.”
두 사람이 사라진 뒤 한참이 지나서야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두 사람이 각각 신과 부단장, 정과 부단장이었지.”
“예. 맞습니다.”
“처음 보는 손님이 있어도 경계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자유롭군. 보통 이런 분위기인가?”
유더는 허공의 손가락을 붙잡으려는 듯 손발을 뻗는 니폴렌을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이런 분위기는 억지로 만들려 한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지. 단장의 능력이 대단하군.”
표정의 변화는 크게 없었으나 유더는 황제가 몹시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느꼈다. 황제는 니폴렌이 누워 있는 방석을 한참 바라보다가는 이제 그만 오늘의 용건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유더가 미리 예약해 둔 실내 훈련실로 향했다.
“이곳에서 저와 함께 훈련을 하게 되실 겁니다.”
“생각보다 작군. 다른 이들은 들어오지 않는가?”
“실내 훈련실은 미리 예약을 해 둔 사람만 일정 시간 동안 사용하는 방식이기에 앞으로 3시간 동안은 아무도 오지 않을 예정입니다.”
“3시간이라.”
“율리버 님께서는 바깥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훈련 도중에는 폐하를 모시는 다른 분들께서도 이곳 안까지는 들어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겉보기에 황제를 따르는 이는 시종장 하나뿐이다. 하지만 유더는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긴 기사 다섯 정도의 기척을 더 읽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 사실을 드러내자 나이 든 시종장의 눈빛이 예리하게 변했다.
“역시 아일 남작님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물러나는 그의 눈빛은 유더를 향한 신뢰와 흡족함을 담고 있었다.
“그러면 시작해 보겠습니다. 일단 여기에 앉으시지요.”
황제가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유더는 그와 마주 볼 수 있도록 다른 의자를 끌어당겨 엉덩이를 붙였다.
변용한 얼굴을 지그시 살핀 뒤, 유더는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의 상태는 어떠십니까.”
“이전과 비교하자면 아주 좋은 편이지. 아픈 곳도 없다.”
“잘된 일이군요.”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능력을 대체 어떻게 가다듬을 수 있을지는 짐작이 되지 않아. 어떤 방식을 택할 셈인가.”
“윌리어트 백작님의 능력은 마병단으로 분류하자면 ‘정과’에 가깝습니다. 매개체를 통해 정보를 읽는 능력이라 할 수 있겠지요.”
칸나처럼 손을 댄 대상의 정보를 직접 읽는 건 아니지만, 힘을 불어 넣은 물건을 통해 멀리 떨어진 상대의 말을 듣고 주변을 볼 수 있다. 대단한 가능성을 지닌 능력이었다.
“힘을 안정화하고 더욱 발전하게 만들려면, 우선 현재 수준과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파악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일을 먼저 해 볼 예정입니다.”
“현재의 수준과 한계라.”
“육체적으로 힘드실 수도 있습니다. 어렵다 여겨지신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으니 말씀해 주십시오.”
“좋다. 기대되는군.”
“그러면 우선…… 준비물을 가져와야겠군요.”
유더가 손을 뻗자 훈련실 안에 있던 잡다한 물건들이 일제히 바람을 타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염력에 이끌리듯 허공으로 날아오른 물건들이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얌전하게 탁자 위로 줄이어 내려앉는 모습을 보며 황제는 내심 조금 놀랐다.
바람만으로 물건들을 저리 섬세하게 다룰 수 있다니. 숙련된 바람 속성 마법사도 어려워할 일이었다.
“백작님께서는 여태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물건 정도에만 잠시 힘을 넣어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으신지요.”
“그렇네.”
“그러면 이제 이 물건들 전부에 힘을 불어 넣어 주시겠습니까.”
“……전부?”
“네.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마병단의 악마 같은 훈련자가 황제에게 첫 훈련 과제를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