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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91화 (591/805)

591화

“정신을 뒤흔드는 능력을 깨부수려면 마찬가지로 정신을 뒤흔드는 혼란이 필요하다지.”

호산라의 방을 나선 키시아르가 여상스레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네 앞에서 겨우 질문을 인지할 수 있게 된 걸 보면 과연 효과가 있기는 한 모양이다, 나단.”

오늘 호산라를 방문한 가일, 두일 형제가 현자와 그의 동료들 이야기를 한 것과 그 뒤를 이어 방문한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을 대동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몇 단계의 사전 작업이 존재했다.

먼저 유더가 가일, 두일을 만나 2기 단원 모집과 관련한 도움을 요청하면서 현자에 대한 정보를 슬쩍 흘렸다. 형제는 그 이야기를 바로 호산라에게 전했고, 정보를 들은 호산라는 심란함을 느꼈다. 며칠간 그가 몹시 안정적인 하루하루를 보냈기에 그 감정은 평소보다 진폭이 크고 강렬했을 터였다.

거기에 진정할 틈 없이 키시아르가 공포의 대상인 나단 주커만을 데리고 나타나자 호산라의 감정 변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친 폭을 그렸다. 짐짓 아무렇지 않게 나한의 소식을 전한 것도, 중간중간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한 것도 모두 호산라의 정신을 흔들기 위한 방책이었다.

감정의 방향이 너무 한쪽으로만 쏠리지 않도록 극과 극을 반복하여 느끼게 만들자 호산라는 드디어 처음으로 세뇌의 영향에서 일부 벗어난 반응을 보였다. 여태 질문을 인지하지조차 못했던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이번 일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아일 경이 저를 불렀을 때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습니다만……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절대적으로 믿었던 무언가가 통하지 않았던 상대만큼 두려운 건 없는 법이지. 다음에 만날 때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군.”

키시아르가 대답하며 계단을 오르다가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주군의 시선이 닿은 곳을 향하여 나단 주커만 또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그림자처럼 미동 없이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단장실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 유더 아일이 고요히 핏기 없는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그래. 현자의 능력이 뭐냐는 질문을 드디어 알아듣더군. 네 말대로 나단의 얼굴을 본 게 효과가 좋았어.”

“다행이군요.”

다행이 아니라 불행을 말하는 것 같은 느릿느릿하고 고저 없는 말투. 그러나 키시아르는 그 어떤 칭찬보다도 좋은 말을 들었다는 듯 기분 좋게 웃었다.

“설마 걱정이 되어서 내가 올 때까지 못 참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나?”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유더는 부정하지 않았다. 다른 이라면 어이가 없을 만큼 건방지다 할 만한 대답임에도 그가 말하면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아주 당연한 걸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커만 경도 괜찮으셨습니까.”

“네.”

“나단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일이었으니 당연히 괜찮았지.”

대신 대답해 준 키시아르가 손을 들어 슬쩍 손짓을 했다.

“그러면 이제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나단, 너도 이제 오늘의 할 일은 끝났으니 다음 일을 하러 가도 좋다.”

“예.”

말이 ‘다음 일’일 뿐, 사실상 유더 아일과 둘만 남아 이야기하고 싶다는 주군의 의도가 몹시 들여다보였기에 나단은 모른 척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 유더 아일이 키시아르의 상태를 단번에 회복시킨 뒤로 그는 이런 일을 이전에 비해 상당히 기껍게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오늘의 일이 끝났는데 다음 일을 하러 가신다는 건, 혹시 지금 가케인을 보러 가시는 겁니까?”

유더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네.”

“그렇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호산라와 관련하여 계획을 짜기 시작했던 때에 유더는 키시아르와 나단 주커만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그건 다름 아닌 가케인 볼룬발트가 나단에게 검을 배울 수 있을지 묻는 청이었다.

키시아르는 나단이 괜찮다면 허락하겠다고 말했고, 나단 주커만은 고민 끝에 짧은 시간밖에 내지 못해도 좋다면 일단 해 보겠다고 답했다. 사실상 유더에게 진 빚을 갚는 의미로 수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검술 훈련은 당연히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비밀로 이루어졌다. 마주할 수 있는 시간도 거의 없어 각자 일과를 끝내고 나서 주어지는 짧은 여가 시간을 활용해 수업을 받아야 했다.

때문에 자세만 조금 보아주고 과제를 엄청나게 내어줄 뿐인데도 가케인은 어떻게든 그것을 다 해냈다. 그가 가벼운 마음으로 부탁한 게 아니라는 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었다.

검술을 익히기에 늦은 때란 없다. 자질과 근성이 충분하다면 나머지는 제대로 굴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가케인 볼룬발트에게는 그것들이 확실하게 존재했다.

그 근본에는 오랫동안 좌절된 간절함에서 비롯한 울분이 존재한다. 그건 나단 주커만이 검을 막 배우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감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이대로 만약 가케인이 한 달 넘게 버틸 수 있다면 조금 더 시간을 빼 제대로 가르쳐 보아도 괜찮겠다고 여겼다. 물론 그 뜻은 가케인 본인을 비롯하여 유더와 주군 키시아르에게도 비밀로 두고 있는 채였다.

“훈련을 부탁드린 이후로 가케인을 제대로 못 봐서 검술 훈련이 잘되고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다행이군요.”

“나단이 아무 말 없이 가는 걸 보면 자질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일 테니 걱정 말게.”

단장실 안으로 들어선 키시아르가 가볍게 답했다.

그들이 들어선 단장실의 모습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수없이 쌓인 종이들이 책상을 넘어 바닥과 소파, 테이블까지 침범한 상태였다.

그 모든 것이 1차로 걸러져 들어온 2기 단원 지원서임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은 그저 담담했다. 서류를 자연스럽게 넘어 들어간 유더가 키시아르에게 질문을 했다.

“호산라가 질문을 인지했다면, 답변도 해 주었습니까?”

“아니. 하지만 답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상태임은 확실하게 자각한 것 같더군.”

“역시 그렇군요.”

그간 나그란의 별 소속이었던 각성자들에게서 현자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칸나와 서부에 있는 에문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의 노력 덕에 유더는 그자의 능력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나. 나그란의 별에 있던 이들은 현자를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 여기고 무해하게 느낀다. 그 어떤 모순된 상황에서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을 만큼 강력하게 박혀 있다.

둘. 그들은 현자의 능력이 무엇인지 직접 보고 겪었을 텐데도 자세한 사항은 잊어버린 듯이 인지하지 못한다. 외부에서 그것에 대해 질문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못 들은 체 넘어가기도 했다. 아예 그 사항 자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굴었다는 뜻이다.

셋. 위 사항들은 현자와 만난 지 오래되었음에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이를 통해 유더는 현자의 능력이 어떤 한 가지 단어나 짧은 정보에 기반하여 발동되는 정신계 세뇌 능력일 것이라 예상했다.

‘아마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에게 박아 넣은 건 현자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존재라거나, 뭐 그런 거겠지.’

이전 생의 경험에 따르면 대상을 조종하거나 세뇌하는 종류의 능력은 바라는 게 많을수록 효과가 길게 가기 어렵다. 조금만 명령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해도 금세 깨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세세하게 사람을 조종하려면 상시 곁에 붙어 있어도 모자라. 이렇게 많은 인원을 동시에 세뇌하려면 하나, 혹은 둘 정도의 명제만 머리에 새겨 넣을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해도 효과가 이렇게 길게 가는 건 정말 대단하지만…….’

유더의 추측을 들은 키시아르는 아마도 그 부분은 세뇌를 당한 이들과 함께 있으면 유지 시간이 계속 갱신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이단을 섬기는 교도들도 그렇지만,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과 함께 있을 때 사람은 거기서 벗어나기 어려워지지.’

그렇다면 둘이 늘 함께 있었던 가일, 두일 형제나 머릿수가 많은 서부의 각성자들이 시간이 상당히 흘렀음에도 현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그들은 호산라를 첫 목표로 삼았다.

호산라는 현자에게 세뇌되어 있지만 현자보다 나한을 더 중요시하는 특이한 경우였다. 가일과 두일을 꾸준히 만나기는 해도 대부분의 시간은 홀로 보내니 흔들릴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오늘 얻어 낸 결과를 보면 역시 그 생각이 맞은 듯했다.

혹여나 형제가 정보를 제대로 풀지 않을까 봐 호산라에게 미리 전해 두어도 상관없다는 허락을 슬그머니 남긴 보람이 있었다.

‘칸나와 이논이 가져올 현자의 과거 관련 정보까지 합치면 그놈의 능력 파훼법도 금방 알아낼 수 있겠지.’

이런 종류의 능력은 시전자를 죽인다고 다가 아니라서 귀찮다. 유더는 이전 생의 경험을 통해 어떤 이들은 믿던 대상이 죽으면 오히려 그 실체 없는 믿음이 대책 없이 더 커지기도 한다는 걸 깨달은 바 있었다.

실패는 한 번으로 족하다. 귀찮아도 이렇게 천천히 파훼법을 찾고 놈들의 목을 조여 힘을 빼놓으면서 실체를 스스로 드러내게 만드는 게 정공이었다.

“에문의 보고에 따르면 마병단 2기 모집에 관심을 가진 나그란의 별이 상당히 많은 모양이더군.”

“그쪽도 잘되어 가는 모양이군요.”

“그래. 남부에 있다는 그들의 거점에 접촉을 시도했다는 남국인 상인들이 혹 변수가 될까 싶었는데…… 그 부분은 아직 확실치 않군. 그렇다 해도 현재로선 의미가 큰 변수는 되지 못할 테지만.”

그건 가케인이 현자의 숙소에서 찾아낸 편지에서 나온 유용한 정보였다.

그놈들이 잘도 살아남아 나그란의 별과 본격적으로 접촉까지 했다는 건 어이없었지만 늦지 않게 마병단 2기 모집이 시작되며 나그란의 별 내부를 흔들 수 있었기에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전부 다 아직은 나쁘지 않게 잘 굴러가고 있다.’

마병단을 둘러싼 상황들을 냉정히 판단하고 결론을 내린 유더는 서류 더미 구석에 포위되듯 놓여 있는 전술 게임 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판 위에는 올라와 있는 패가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깨끗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게임을 하자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저기에 판을 올려 두고 있는 건…… 역시 그날 일을 잊지 않겠다는 뜻인가.’

과거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키시아르는 겉보기에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그는 전만큼, 혹은 전보다 더욱 똑똑하고 빠르게 실수 하나 없이 모든 일을 하는 중이었다.

더 이상 유더가 죽었던 때의 악몽도 꾸지 않는 듯했고,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도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서류로 뒤덮인 책상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그 깨끗한 전술게임 판이 유더는 오늘따라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가 막 무어라 입을 열려 했을 때, 키시아르가 선수를 쳤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연락이 왔었네. 폐하께서 내일 오실 수 있을 거라더군.”

“내일…… 말입니까.”

“그래. 나는 공식적으로 평소처럼 생활해야 하니 나가 보지 않을 거야. ‘중요하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는 건 보좌에게 맡기고 있을 테니 잘 부탁하네.”

그건 유더에게 능력 훈련을 받기로 한 케일루사 황제가 내일 마병단으로 비밀리에 방문을 온다는 뜻이었다. 조율을 위해 며칠간 조용한 듯하더니 드디어 일정이 정리된 모양이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황제의 비밀 방문과 훈련이라는 중요한 용무 앞에서 사소한 질문은 금세 밀려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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