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서부의 각성자들이 2차 단원 모집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이, 수도라고 바쁘지 않을 리 없었다. 마병단의 활동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아 온 수도 사람들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모집에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게다가 수도에서 비교적 가까운 중부 지역을 포함해 전 지역에서 수많은 이들이 몰려드는 중이라 모든 단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니, 이 사람은 북부인인데 왜 여기로 지원을 했지? 서류를 잘못 보낸 것 아니야?”
“그쪽에서 살기 싫대. 마병단 본부가 있는 수도에 지원하는 게 더 공정하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것 같더라. 고향에 정떨어졌단 사람을 억지로 보낼 순 없잖아.”
“음…… 그렇구나.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 사람이 지금 한둘이 아니야. 어젠 심지어 타국에서 온 사람도 지원 문의를 했다는 소릴 들었다니까.”
“뭐, 다른 나라에서도?”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는 단원들 사이로 가일과 두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바쁜 단원들은 그들에게 누구 하나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형제는 오히려 그래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비슷한 일을 새로이 맡게 된 지금은 더더욱 기분이 좋기도 했다.
“호산라, 우리 왔어.”
형제는 상기된 얼굴로 호산라가 머무는 방에 들어섰다. 침대에 걸터앉아 뜨개질 중이던 호산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곁에는 마찬가지로 뜨개질 바늘을 들고 있던 사제 루산이 앉아 있다가 형제를 발견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친구분들이 오셨네요.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담.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오늘 가르쳐 준 겉뜨기랑 안뜨기, 잘 연습해 볼게요.”
사제는 옆구리에 실과 바늘이 든 통을 끼고서 눈을 빛내며 나갔다. 어설프게 루산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가일과 두일은 문이 닫히자마자 재빨리 물었다.
“아니, 호산라. 너 저분한테 뜨개질 가르치구 있었어?”
“이게 어떻게 된겨? 뜨개질을 할 정도면 몸이 진짜 많이 나아지긴 했나 보네?”
병약했던 남국인 청년의 안색은 그간 루산과 이논의 치료를 받으면서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이 나아졌다. 비록 스스로 걷는 건 아직 더뎠지만 방 안을 반복해서 돌아다닐 정도로는 호전된 상태였다.
하지만 각성자의 능력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매일 한 번 정도는 힘을 사용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느껴지는 게 거의 없었다. 그걸 알아서인지 가일과 두일도 힘이 돌아왔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냐고 할 것도 없어……. 예전엔 겨울에 주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냐고 묻기에 뜨개질을 했다고 했더니 가르쳐 달라면서 실을 가져왔어. 그것뿐이야.”
“진짜? 우린 네가 뜨개질 하는 거 본 적이 없는디? 그런 걸 언제 다 했대?”
호산라는 해맑은 눈동자를 한 가일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예전에. 거점에 들어오기 전엔 그랬었어.”
“아, 아아……. 그때 말이구나.”
거점에 들어오기 전이란 곧 나그란의 별이 되기 전을 말한다. 그제야 호산라의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이해한 형제가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호산라. 요즘 바깥이 시끄러운 이유가 뭐 때문인진 알고 있어?”
“마병단원을 새로 모집한다고는 들었어.”
“그래, 있잖아. 그래서 우리도 이번에 그 일을 돕기로 했어.”
“……너희가?”
지나치게 뜻밖의 말을 들은 탓에 호산라의 반응은 평소보다 한 박자 늦었다.
“단원도 아닌데 뭘 어떻게 돕는다는 거야?”
“단원이 아니라서 할 수 있는 것두 있다던데? 힘쓸 일도 생각보다 많대. 그 무서운 마병단 단장 보좌가 가능하면 실기 시험 때도 도와달라고 그랬어. 우리 능력 정도도 안 되는 사람을 뽑긴 아무래도 좀 그래서 그런가 봐. 히힛.”
형제는 기대감을 가득 담은 채 계속해서 마병단원 모집에 대해 떠들어 댔다. 벌써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는지, 마병단 내의 분위기는 또 얼마나 활기찬지 말하는 얼굴들이 평범한 청년들처럼 반짝였다.
‘가일과 두일이…… 저런 얼굴을 할 줄도 아는 사람들이었나?’
호산라는 그들을 낯설게 바라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말도 안 돼. 저들이 나그란의 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마병단인데 모집을 도우라고 했다니… 이걸 계기로 뭔가 하려는 게 오히려 말이…….’
날카롭게 뻗치던 생각이 점점 힘을 잃다 멈추었다. 호산라는 자신이 뜨다가 만 털실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실을 가져온 사람이 알 리는 없을 테지만 한때 그가 좋아했었던 포근한 흰색 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병단에서 눈을 뜬 이래로 호산라가 예상했던 것 같은 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시간이 되면 호사스러운 밥이 나왔고 퉁명스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제 속을 모두 읽는 듯 어른스러운 약사와 고양이 같은 인상의 사제가 나타나 그의 치료와 재활을 도왔다.
그나마 조사라고 할 만한 건 칸나 완드라는 단발머리 여자를 만날 때만 하고는 했는데, 호산라는 솔직히 그녀가 조사 시간을 합법적 농땡이 시간으로 여기는 건 아닌지 몹시 의심스러웠다. 칸나는 그에게 나그란의 별에 대한 것보다 일상이나 예전 이야기를 묻는 때가 훨씬 많았다. 입을 열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참 떠들다 돌아가는 일도 다수였다.
한 번은 ‘이런 식으로 회유해도 소용없다. 나는 절대 나한 님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이용해서 그분을 불러내려 해도 소용없을 테니 이런 건 그만하라.’ 하고 답했었는데, 그때 칸나는 오히려 웃음을 터트려 호산라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명랑한 얼굴로 돌아온 답은 ‘알아요. 싫으면 말아요. 내가 언제 강제로 입을 열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 였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적은 없었다.
칸나는 호산라의 혼란을 안다는 듯 새파란 눈동자로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이미 당신이 지은 죄가 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알면서도 놓지 못할 뿐이죠. 뭐, 그것만 알면 다 아는 것 아닌가요?’
여기 있는 이들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호산라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군다. 입을 열지 않아도 답을 이미 들은 것만 같았다. 그게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도 가슴에 늘 무겁게 걸려 있던 뭔가가 조금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능력을 언제쯤 다시 쓸 수 있을지 초조하게 반복하여 시도하던 걸 하루 한 번으로 줄이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쯤부터였던 것 같다.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 아무 능력도 쓰지 못하는 지금이 마음은 더 나았다.
호산라는 계속해서 즐겁게 앞으로 할 일을 떠드는 가일과 두일을 바라보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앞으로 계속 여기서 지내기로 정말 아주 마음을 먹은 거구나.”
“응? 그래. 맞어.”
두일이 답했다.
“근데 우리뿐만은 아녀. 들어 보니 서부에서 잡혔던 녀석들도 몇몇은 그쪽 지부에서 일을 돕고, 감옥에 갇혔던 녀석들도 도시 재건에 참여하고 있다던디?”
“……서부에서 잡힌 사람들? 그게 정말이야? 사형당하지 않았다고?”
이 이야기는 처음 들었지만 귀를 의심할 만큼 놀라웠다. 호산라가 크게 놀라 반문하자 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여그 단장님이…… 뭐라더라? 뭔 잘못을 했는지 제대로 알 기회를 준다고 했다든가? 암튼 그랬대. 우리두 놀랐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기회를 준다고…….”
호산라가 떨리는 입술로 그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하여 중얼거렸다. 그는 그 말이 칸나가 제게 했던 말뜻과 어쩌면 몹시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뿐만이 아녀, 호산라. 거기 있는 녀석들 중에 죄 안 지은 사람들은 마병단이랑 제대루 계약을 해서 돈 받구 일을 한대서, 우리도 이번 기회에 제대루 그 계약이란 걸 하기루 했어.”
“계약?”
“응.”
형제가 계약에 대해 신나게 설명을 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본래 마병단에서는 그들에게 2기 단원 모집 지원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형제는 거절하고, 지금까지처럼 본부 내에서 일을 하는 고용인이 되기를 택하기로 했다.
“단원 지원 기회라니…… 그걸 믿어?”
“못 믿을 게 뭐 있어? 죗값두 다 갚았는데.”
“하지만…… 그러면 고용인보다는 단원이 되는 게 낫잖아.”
“아니, 싫어.”
형제가 뜻밖에도 몹시 산뜻하고도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 단원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훈련하는지 니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여. 난 살다 살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훈련하는 인간들은 첨 봤어. 나는 때려죽인다구 해도 못혀!”
“……뭐?”
“그냥 지금까지처럼 몸 쓰면서 평범하게 일하는 게 더 좋아.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한텐 글자두 가르쳐 준대. 집도 준대서 이미 계약했어.”
“응응, 7구역에 있는 새집이여. 우리가 집 계약 같은 건 잘 모른다니까 사람들이 도와주더라. 쬐끔 작긴 한디, 햇볕이 잘 들어. 쪼끄만 텃밭두 있구…….”
“거기다 야채를 키울 거야. 호박이랑, 당근이랑, 상추. 우리 둘이 먹을 정돈 충분히 될 테니까 잘 키우면 호산라 너한테두 줄게. 놀러 와.”
“…….”
이들은 호산라가 정말 자신들의 집에 그렇게 한가하게 놀러 갈 수 있는 입장이라 생각하는 걸까. 너무나 비현실적인 대화라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아, 그런데 호산라. 이건 너한테 말해 줘도 된다구 해서 이제 말하는 건데……. 저번에 그…… 단장 보좌가 우리한테 요즘 수도에 나그란의 별에서 온 것 같은 놈들이 자꾸 목격된다구 한 적이 있었잖어. 기억나?”
“……응. 그게 왜?”
“그 녀석들이 머무는 곳을 알아내서 살폈나 본디, 아무래도 들어 보니깐 우리가 아는 사람들 맞는 것 같어.”
일순 호산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단장 보좌가 우리한테 불러서 일을 도와주겠냐고 물었을 때, 그 얘길 해 주면서 혹시 아는 사람 같다면 말을 해 달라구 하더라고. 생김새랑 능력 같은 걸 조금씩 말해 줬는디…… 아무래도 네조랑 랭바튼이 있는 게 확실혀.”
“네조와 랭바튼이라면…… 현자님 없이 여기까지 올 사람들이 아니잖아.”
“그려. 으응… 있지, 근디 그 녀석들 사이에…… 중년쯤 된 사람두 있었대.”
두일이 호산라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현자님이, 수도에 있다고? 지금?”
“그 정도 나이인 사람은 그분밖에 없으시니깐…… 근데 아닐지두 몰라. 디에먼 같은 놈이 어디서 변신 능력을 베껴서 아저씨가 되어 다니는 걸지두 모르잖어.”
“나한 님은……. 그분과 비슷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대?”
호산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형제가 고개를 저었다.
“없었어. 그 녀석이 있었음 우리가 아니라 너한테 젤 먼저 물었을 것 아녀.”
“그래, 그렇지……. 하지만 현자님께서 여기에 오셨다는 건 역시 믿을 수가 없어. 그분은 이런 곳에 오실 분이 아니잖아. 만약 정말 오셨다면 너흴 구하러 오지 않으셨을까……? 아니, 하지만… 나한 님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왜 서부가 아니라 여기에…….”
호산라의 목소리가 혼란스럽게 흔들리다 작아졌다.
“우리도 잘은 몰러. 아무튼 그 단장 보좌가 한 말이니깐 순 거짓말은 아닐 거여. 너한테두 조만간 물어보러 올지두 모르니까 너무 놀라지 말라구 말해 주는 거여.”
세 사람은 동시에 검은 머리칼에 어둑한 눈동자를 지닌 한 사람을 떠올렸다.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겨울이 도래한 듯 서늘하기 그지없는 그 사내, 유더 아일은 정말 중요한 때에만 그들의 앞에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호산라에게는 사실 그를 직접적으로 살려 준 사람이기도 했다.
호산라는 형제가 나간 뒤에도 오랫동안 뜨개질바늘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나한 님은 어떻게 된 걸까. 나는 정말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걸까…….’
복잡한 생각을 아무리 해봐도 호산라의 머릿속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평범한 미래를 꿈꾸며 웃던 형제에 대한 미약한 부러움이었다.
몇 년 전의 나한과 그가 처음부터 이런 곳에 올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나한이라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차갑게 비웃으리라. 하지만 호산라의 입장에서는 사실 나그란의 별이나, 마병단이나 어디든 안전하고 몸 누일 곳이 있다면 그만이었다. 주인인 나한이 외치는 신념도 사실 그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했던 건 그저 나한의 목숨과 안전, 그리고 죄책감뿐이었다.
‘도련님이 그리 맥없이 돌아가실 리는 없어. 내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걸 알자마자 가셨겠지. 그런 분이니까……. 이제 능력까지 쓰지 못하니 나는 그분께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을 테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호산라는 갑갑한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자리에 누웠다.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으로 들어섰다. 감았던 눈을 뜬 호산라는 성큼 들어선 두 사내를 보고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마침 깨어 있었군. 다행이야.”
태양신의 현신처럼 아름다운 사내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그의 침대 곁에 걸터앉았다. 뒤에는 평소처럼 검은 머리칼의 유더 아일이 아닌, 남국인 기사가 서 있었다.
호산라는 그 기사의 얼굴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어떻게 그를 몰라볼 수 있겠는가.
그는 나한과 호산라를 단신으로 상대하여 모든 계획을 박살 낸 바로 그 기사, 나단 주커만이었다.
“요즘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고 들었는데, 잠깐 이야기를 좀 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