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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88화 (588/805)

588화

“그러니까, 보좌가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태양궁에 침입한 자들의 정체는 우리의 추측대로 나그란의 별이 맞다는 거군.”

키시아르가 평온한 얼굴로 정보를 요약했다.

“네.”

“디아카 공작이 황태자 몰래 그들에게 그 일을 도우라 거래를 거는 것쯤은 간단했겠지. 다만 예상보다 그들이 요란히 일을 친 것이 문제였을 텐데, 오히려 평가와 정보 양면에서 이득을 보았으니 화를 낼 필요는 없었을 테고.”

“네. 치료를 통해 황태자의 신뢰는 이미 많이 얻은 모양이고, 이번 일로 디아카 공작의 신뢰까지 얻을 수 있다면 그 현자라는 자의 입장에서는 승부수를 던진 보람이 있었을 겁니다.”

“이 일로 나그란의 별의 내분이 심화될 확률이 높다는 건 충분히 알았을 텐데도 저질렀다는 건 그자가 그만큼 확고하게 원하는 게 있어서겠지. 높은 확률로 권력일 것 같지만……. 그걸 이룰 만한 능력을 지녔으니 앞으로 디아카 공작을 비롯한 그 주변이 세뇌당하는 낌새가 없는지 살펴야겠군.”

역시 키시아르였다. 그는 유더가 가져온 몇 마디 말만으로도 모든 생각을 정확하게 짚어 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사실 세뇌에 대한 부분은 아까 칸나가 가져온 정보를 보니 이미 어느 정도 시작된 것도 같더군.”

칸나는 나그란의 별이 머물던 집에서 조사 거리가 될 법한 물건을 가져온 정보부원들과 협력하여 쓸 만한 정보를 읽어 내는 중이었다. 유더가 없는 사이 뭔가를 알아내어 키시아르에게 먼저 보고를 한 듯했다.

“무슨 정보였습니까?”

“가케인이 가져온 가죽끈의 주인이 확실하게 밝혀졌네. 렌보우 자작이라는 자로, 뒤르망 남작이 물러난 뒤 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라더군.”

“그렇다면…….”

“그래. 나그란의 별과 디아카 공작 사이에서 연락책을 맡고 있는 것도 그자야. 황태자와도 제법 친분이 있는 편이지. 끈에서 읽어 낸 정보에 따르면 그가 흔쾌히 직접 건네다 못해 온갖 도움을 주었던 모양이더군.”

그가 갑자기 없던 자비가 샘솟아 그런 행동을 했을 리는 없다. 적어도 디아카 공작을 따르는 귀족이라면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현자가 그에게 능력을 발휘하여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놈들에 대한 정보를 더 긁어모아야겠어.’

칸나가 벌써 그 정도 정보를 알아냈다면 현자의 곁에 있는 다른 놈들의 능력도 얼추 읽어 냈을지 모른다. 유더는 머리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쪽에서 주커만 경의 실력에 대해 알게 된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단이 소드마스터라는 정보 말이지.”

키시아르의 표정은 담담했다. 오랫동안 숨겨 온 부관의 실력이 들통났음에도 초조해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뭐, 알게 되었다 해도 그 정보를 그들이 믿을지 말지는 별개의 일 아닌가. 그 정보를 들은 뒤 키올레에게 했다는 테오나 소드마스터에 대한 질문들을 들어 보니 황제 폐하의 건강 소식과 더불어 잘 흔들면 한동안은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을 것 같군. 오히려 잘되었어.”

디아카 공작이 현자가 내민 정보들을 단번에 완전히 믿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상 정도는 유더도 했지만, 키시아르의 확신은 그보다 더 깊어 보였다.

‘그런데, 테오?’

“테오……라면 테오라도 반 타인 황궁기사단장 말입니까.”

유더는 예전에 황궁기사단원들과 훈련장 사용 건으로 시비가 붙었을 때, 키시아르가 테오라도 단장에게 직접 허락을 받았으니 항의는 그쪽에 하라며 넘겼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테오라고 불렀었지. 사실 친한가?’

“별로 친하진 않네. 어린 시절에 같은 스승 아래서 당시 1황자셨던 폐하, 그리고 나와 함께 검을 잠시 배운 인연으로 그리 부르고 있지.”

유더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키시아르가 매끄럽게 대답했다. 유더가 침묵 속에서 가만히 응시하자 그가 눈을 슬쩍 휘며 물었다.

“궁금해 보이는 눈빛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테오라도 반 타인 단장이 소드마스터와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유더는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 키시아르가 가볍게 웃음을 삼키며 대답해 주었다.

“음…… 서부 일 덕분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그는 타인 가의 피를 짙게 물려받아 검 이외의 일에는 관심이 거의 없는 자야. 제국에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출현한다면 그가 될 거라 믿는 자들이 많았지.”

때문에 얼마 전 키시아르가 남긴 새로운 제왕의 검흔도 테오라도 반 타인이 남겼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몹시 많았다. 본인이 아니라고 잘라 답했음에도 그 의심은 아직까지 계속되는 중이었다.

“아마 디아카 공작도 아직 그 생각을 버리지 못했을 거라네. 나단이 소드마스터라는 정보를 듣고 나서 제일 먼저 테오에 대해 물었다는 건 사실 나단이 아니라 테오가 거기 있었는데 정보가 의도적으로 바뀐 게 아닌가 의심해서였겠지.”

‘……하긴, 수십 년간 조용히 지낸 펠레타 공작의 부관이 갑자기 소드마스터급 실력을 지닌 기사라는 정보를 들으면 누구라도 바꿔치기된 정보가 아닌가 의심스럽긴 하겠지.’

그렇지만 디아카 공작이 그다음으로 물은 게 키올레가 소드마스터가 될 확률이란 건 새삼 생각해 보아도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질문은 세상 모든 소드마스터에 대한 모욕이었다.

“아무튼 디아카 공작의 현재 심경은 덕분에 확실히 파악했으니 앞으로도 대응에는 문제가 없겠군. 수고했네.”

평소라면 여기서 다음 일을 처리하러 바로 나갔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유더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내에게 추가로 알려 주고 싶은 정보가 있었다.

“음…… 단장님, 사실 말씀드리고 싶은 정보가 하나 더 있습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키올레가 준 정보는 아니겠고. ‘이전 게임’인가?”

“네.”

유더는 키시아르의 책상 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는 전술 게임 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날 이후 키시아르의 책상에서는 저 판이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시선으로 판 위에 그려진 선들을 뒤쫓아 훑으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나그란의 별이라는 이름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런 것치고는 그자들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던 것 같은데, 이전에는 지금과 상황이 많이 달랐던 모양이지?”

“다르다면 다르고…… 같다면 같을 겁니다.”

이전 생에도 나그란의 별은 분열을 일으켜 내분으로 파멸했다. 다만 그때 유더는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그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유더는 그때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설명했다.

“각성자들을 모아 각국의 귀족과 왕족들을 공격하려 한 위험한 집단이 있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이름이었지만 그때는 그 계획이 실행되기 전, 내부 분열로 인해 파멸했다는 것만 들었습니다.”

그들의 본거지가 있었던 남쪽 사막 근처는 그 일로 초토화되었고, 이후에는 완전히 씨가 말라 사라졌다.

“그리고 몇 년 뒤, 같은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난 집단이 또 있었습니다.”

유더는 현자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을 현혹했으나 결국 제 손에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었다.

“저는 그 가짜 현자가 이전에 사라진 나그란의 별과 관련되어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번에 수도에 온 현자의 곁에서 그자를 보았습니다.”

“내분과 파멸, 그리고 두 번째 현자라.”

키시아르의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느리게 두드렸다.

“그중 내분은 현재 비슷하게 진행 중인 듯하니 나머지의 씨앗은 개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셈이군.”

“네. 많은 상황이 바뀌었지만 그들의 내분은 바뀌지 않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겠지. 지금의 현자가 예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목적으로 움직이려 했다면, 귀족과 비각성자를 증오하는 나한 쪽에서는 같은 길을 갈 수 없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실제로 나한은 이미 수도에 와 있다. 이대로라면 이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일들이 또다시 반복되기 전에, 저는 모든 것을 막고 싶습니다.”

지금의 현자도, 나한도 물론 마병단이 막아야 할 요주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유더가 현재 가장 신경 쓰이는 자는 이전 생에 보이지 않는 폭풍처럼 수많은 것들을 망친 가짜 현자, 디에먼이었다.

계속해서 팔걸이를 두드리던 키시아르가 그 말을 들은 순간 손가락을 멈추었다.

“사실 본래는 현자 측의 행동이 디아카의 혼란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여 한동안은 그대로 둘 생각이었지만, 내 보좌가 경계하는 것이 이후의 더 큰 적이라면 이쪽에서도 전략을 바꾸어야겠군.”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현자와 나한이 바라는 바가 다른 것 같아도, 사실 그들의 행동 명목은 같은 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네. 바로 나그란의 별이라는 각성자 집단을 위한다는 명목이지.”

그건 맞는 말이었다. 현자도, 나한도 결국 나그란의 별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각자의 목적을 이루려 행동하고 있다. 그건 여태 만난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의 말만 들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소속된 이들의 지지 없이는 그 어떤 명목도 힘을 쓸 수 없어. 명목이 있기에 세력이 생기고, 세력이 곧 힘을 주는 법이지. 그런데 말이네, 여기서 제3의 집단이 나타나 나그란의 별에 있는 이들에게 새롭고 안전한 길을 제시해 준다면 어떻게 될까?”

“…….”

그 순간, 유더의 머릿속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그 말은 마병단이 지금 하고자 하는 일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새로운 직업도 알선해 주고, 돈도 주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것 말씀이시겠지요?”

“그렇지. 숨어 살지 않아도 되고, 돈과 자유가 확보된다면 여태 선택할 수 있었던 명목이 단둘밖에 없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 참 궁금하지 않나?”

기존의 명분이 사라진다면 여태 벌이던 모든 일은 힘을 잃는다. 그렇다 해서 현자나 나한이나 하고자 하는 일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겠으나, 명분이 없어진 뒤에 남는 건 오로지 그들 자신의 투명한 욕망뿐이다.

키시아르가 몹시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유더는 입술 끝이 저절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답했다.

“이번 모집에서는 서부 지부에 있는 이들과 이곳에서 머무는 나그란의 별들이 도와줄 일이 많겠군요.”

***

드디어 마병단 2기 모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제국 전 지역의 관리청에서 일제히 모집 지원을 받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수많은 이들이 줄을 섰다.

“비켜! 내가 먼저 여기 서 있었다고!”

“무슨 소리야? 나는 새벽부터 여기 있었거든?”

“이봐요, 어차피 합격하면 동료 될 사이인데 좋게 좋게 좀 갑시다.”

지원 열기는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거셌다. 안일하게 준비하던 관리들이나 지방 영주 귀족들까지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평소에는 숨어 사느라 제대로 나오지도 않던 육체 변형 각성자들도 오랜만에 바깥에 나섰고, 어린 나이에 각성한 자식의 손을 잡고 지원을 하러 온 부모들도 많았다.

그리고 특이 사항이라면 소수이기는 하지만 멀쩡한 귀족 중에서도 지원자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까지 임시 단원 신분이었던 레블린 샨 아페토나 프루엘레 반 타인이 누구보다 먼저 줄을 서서 정식 단원 모집에 지원서를 냈다는 소식이 귀족들의 세상을 또 한 번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자극을 받아 각성 사실을 숨기고 살던 젊은 귀족들 일부가 지원을 시작한 것이다.

마병단은 각 지역으로 1차 파견 단원들을 보내 지원서를 분류하도록 했다. 각성하지 않았음에도 각성했다고 거짓말을 한 이들이나 좋지 않은 목적을 지니고 지원하려 한 이들이 1차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렇게 분류된 이들이 2차 시험을 위해 지정된 장소에 모이자 이번에는 1차 파견 단원들이 몸소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능력을 시험하고 대화를 나누며 됨됨이를 판단했다. 단원 생활에는 맞지 않을 듯하나 각성자로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여기서 2차로 걸러져 새로이 생길 지부에서 일을 할 직원으로 미리 고용하기로 했다.

“아직 지부가 생기지도 않았는데 벌써 고용해서 돈을 준다구? 그게 말이 되나?”

“펠레타 공작 전하와 폐하께서 아낌없이 지원하신다더라고. 거주지가 없는 자들에게는 머물 곳도 준대.”

“그게 진짜야?”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더 많은 이들이 지원을 위해 몰려드는 통에, 1차 파견 단원들은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하지만 밤낮없이 고생하면서도 수도를 향해 보낼 보고서를 보내는 그들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기색이 가득했다.

같은 시간, 제국의 첫 번째 마병단 지부인 서부 지부에서는 어느새 사이좋은 각성자 연인으로 소문난 마티와 로벨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벨, 남쪽에서 편지가 왔어. 일은 그만하고 와서 봐.”

“알겠어!”

나르던 짐을 내려놓고 뛰어 들어온 로벨이 황급히 편지를 뜯었다. 편지를 읽어내린 그의 얼굴에 복잡미묘한 미소가 맺혔다. 그 미소를 본 마티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무슨 내용이야? 나그란의 별에서 온 편지 맞지?”

“응. 저번에 내가 써서 보낸 내용을 못 믿겠다더니, 남부에서도 2기 모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니 드디어 믿을 마음이 나나 봐. 좀 더 자세히 알려 달라고 하네.”

그 편지는 남부의 거점으로 이사를 간 과거 서부 거점의 동료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와 다른 나그란의 별들 몰래 연락을 할 창구를 찾기 위해 로벨은 몇 달간 상당히 고생을 했었다. 그는 로벨이 마병단에 몸을 두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그것을 말하지 않을 만큼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였다.

편지에는 남부 거점의 생활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서부 거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앞으로 이러한 생활을 영원히 반복하고 싶지 않으며 가능하면 다 함께 자유를 얻고 싶다는 내용이 어렵사리 적혀 있었다.

그건 나그란의 별을 나간 로벨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놓을 수 없을 텐데도 그걸 참을 수 없을 만큼 내부의 상황이 긴장감으로 가득하다는 뜻이었다.

“전부 단장님께서 예상하신 대로네.”

그간 지부에서 글을 배워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된 마티가 편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 녀석 말로는 내부에서 알음알음 이야기해 본 바로 같이 나가자면 나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모양이야. 도움이 된다면 좋겠는데.”

로벨은 망설임 없이 답장을 쓴 뒤 그것을 봉하기 전, 서부 지부의 어엿한 정식 지부장이 된 에문 필랑에게로 향했다.

바쁘게 지원서를 검토하고 있던 에문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보내도 되겠네요. 남부에 있는 단원들에게도 소식 공유할게요. 두 사람 모두 고마워요.”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단장님과 유더도 고맙다고 할 거예요.”

그 말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로벨과 마티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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