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87화 (587/805)

587화

“제대로 다시 말해 봐. 정확한 시기와 그날 네가 본 것들 전부.”

키올레는 자신이 그간 힘들게 노력하며 관찰해 온 치료사들 이야기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더의 판단에 다른 것들은 이미 아무래도 좋은 정보가 되었기에 그 주장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키올레는 분한 얼굴을 삼키며 유더가 원한 그날의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얼마 전, 그러니까 태양궁에서 무슨 난리가 났던 일 이후쯤 그자들이 우리 집에 온다는 이야길 들었어. 아버지께서 내게도 말을 하지 않으셨기에 주변의 말을 듣고서야 알게 됐지. 뭐,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내가 알 필요도 없는 일이긴 해. 아무튼 그래도 나는 그놈들을 감시해야만 했잖아? 그래서 본래 다른 이가 그놈들을 데려오기로 했던 걸 제치고 내가 하기로 했지.”

어차피 그들이 현재 머무는 곳은 황태자의 궁이었고, 키올레 또한 거기에서 일하고 있으니 데려가는 건 간단했다.

키올레는 치료사들의 대장인 중년 사내와 그를 따르는 얼빠진 젊은 놈 하나를 데리고서 디아카 가의 본저로 향했다. 3구역에 즐비한 귀족들의 대저택 중에서도 특히 고상하고 우아하기로 유명한 그곳에 들어서자 젊은 치료사는 기가 죽어 어깨와 고개가 완전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대장 놈은 역시 달라도 뭔가 달랐다. 그놈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서 키올레의 뒤를 따랐다. 디아카 공작 앞에서도 그놈의 뭔가 꿍꿍이를 품은 듯한 웃는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면서도 비굴하지 않은 태도로 디아카 공작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지헨 툼이라고 합니다.’

음, 그래. 저런 이름이었지. 키올레는 중년 사내가 일전에 황태자의 앞에서 자기소개를 했을 때 저런 이름을 댔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흐릿하게 떠올렸다.

‘아지헨 툼? 고어로 현명한 자라는 뜻이 아닌가. 본명이 아니군. 스스로 현자를 자처하다니, 우습지 않은가?’

디아카 공작의 곁에 있던 어느 귀족이 빈정거렸다. 부채로 입을 가린 이들이 싸늘한 웃음을 띠고 치료사들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젊은 치료사는 겁에 질려 몸을 반쯤 엎드린 상태였다.

‘물론 그렇습니다. 이 이름은 제 본명이 아닙니다. 하지만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이라 할지라도 누구도 부르지 않고 의미가 없다면 그것을 과연 제 이름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소리지?’

‘저는 가족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과도 같은 동료들이 있지요. 그러므로 그들이 부르는 이름이 곧 제 이름입니다. 여러분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 또한 제 동료들과 함께하는 저를 보고자 하심이니, 제 이름은 곧 아지헨 툼입니다.’

‘혓바닥이 제법 매끄럽군.’

가장 위에 앉아 있던 디아카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중얼거렸다.

‘그래, 좋다. 이름 따윈 아무래도 좋지. 중요한 건 너희가 이번에 한 일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뿐. 네가 현자로 불리기를 바란다면 현자라 불러 주마.’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혀만으로 나를 납득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어디, 자랑하는 그 현명함을 몸소 보도록 할까.’

아무리 나이가 들어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해도 디아카 공작은 디아카 공작이다. 그가 내뿜는 위압감과 타고난 음흉함,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차가운 눈빛에는 누구든 금세 기가 꺾이고 움츠러들고는 했다.

자신을 현자라 불러 달라는 대담한 짓을 한 중년 사내 또한 거기에서 아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키올레는 치료사들의 뒤에 멀찍이 서 있었기에 언뜻 평온해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는 중년 사내의 목덜미 뒤에 맺힌 땀을 보았다.

그러자 그자가 순식간에 더욱 우습고 사기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제 아버지를 대하고도 겁을 먹지 않는 미친놈이 유더 아일 말고 또 있을 수는 없다. 그놈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의 재앙이었다. 설령 저 치료사 놈들이 진짜 엄청난 각성자라 해도 단신으로 하늘에 닿을 만한 불기둥을 뿜어내고 집채만 한 몬스터 목을 자르는 놈보다 대단하진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만, 제가 이야기하기 전 함께 데려온 동료가 보여 드릴 것에 먼저 주목해 주셨으면 합니다.’

현자가 손을 뻗자 그의 뒤에 웅크리고 있던 젊은이가 움찔대며 고개를 들었다. 남국계에 가까워 보일 만큼 붉은 피부와 한쪽 귀에 길게 찢어졌다 붙은 흉터가 선명한 청년이었다.

‘그의 이름은 디에먼으로, 지금부터 이야기할 모든 것들을 귀한 분들께서 온전히 믿어 주시기 위해서는 그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재주라도 부릴 셈인가?’

또 다른 귀족이 가볍게 야유했다. 현자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디아카 공작이 귀찮은 얼굴로 손을 들어 허락했다.

‘좋다. 키올레, 너는 나가 있거라.’

디아카 공작은 치료사들과 나눌 이야기를 키올레에게는 듣게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키올레는 그리 아쉬워하지 않고 바로 물러나 제 방으로 올라갔다.

치료사들은 그날 몇 시간 동안이나 아버지와 다른 귀족들 앞에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상당히 놀랍게도 쫓겨나지 않은 채 도로 광휘궁으로 되돌아왔다.

“그날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나도 몰라. 아버지께서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나한테 한 말이라고는 내가 앞으로 검 연습을 열심히 하면 소드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 현 황궁기사단장인 테오라도 경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뭐 그런 질문뿐이었어. ……하지만 아버지께서 이후 그놈들에 대해 궁금해하셨던 건 사실이야.”

일순 유더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나 키올레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이후 디아카 공작은 광휘궁을 오고 가는 키올레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넌지시 치료사들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들이 광휘궁에서 지내는 모습은 어떤지, 황태자와는 얼마나 가까운지에 대한 물음이 대부분이었다.

“난 당연히 황태자 전하의 곁에 딱 붙어 살고 그 외에는 밖에 나오는 꼴을 못 봤다고 했지. 그자들에 대해 아버지가 처음부터 잘 알고 계셨다면 나한테 새삼 그런 걸 물어보셨겠어? 역시 아버지도 그놈들에게 속고 계신 거야!”

이토록 놀라운 이야기를 해 놓고, 결론이 그것뿐이냐.

유더는 확신에 가득한 키올레를 보며 그의 둔하기 짝이 없는 눈치가 얼마나 양날의 검과 같은지를 새삼스레 실감했다.

‘오늘 이 정보를 자세히 안 들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현자가 진짜 아무 일 없이 디아카 공작을 만났다 해도 더없이 중요한 정보다. 그런데 이건 심지어 태양궁에서 사건이 일어난 뒤 이루어진 만남이었고, 디아카 공작과 현자 사이의 직접적인 첫 대화이기도 했다.

게다가 거기에 모든 이들이 다 간 것도 아니다. 키올레가 말한 대로라면 거기에 간 이는 현자와 이전 생의 가짜 현자, 단 둘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게 어떻게 안 중요할 수가 있겠어.’

키올레가 비록 말을 지독히도 못 하고 관찰력도 감도 무엇 하나 뛰어난 게 없다지만 그래도 디아카 공작의 자식이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외부에서는 접할 수 없는 엄청난 정보였다.

등이 서늘하고 머리가 팽팽 돌았다. 유더는 그간 접한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내고 거기에 키올레의 이야기를 더했다.

그리하여 한참 뒤 내린 결론은 간결했다.

‘역시 태양궁에 침입한 건 그놈들이 확실하다.’

더불어 굳이 몬스터를 불러내고 동물과 사람을 조종하며 침범한 시끄럽고 잔혹한 방식을 조장한 것도 디아카 공작의 의지가 아니라, 놈들이 스스로 선택해 저지른 일인 듯했다.

이 부분은 키시아르가 이번 일이 평소 디아카 공작의 방식과 전혀 다르다는 이유로 이미 추측한 바 있었다. 그 일 직후 디아카 공작이 심기 불편한 모습으로 현자를 불러들였다면 더 알아볼 것도 없이 사실이라 판단해도 될 듯했다.

‘디아카 공작 같은 이는 대놓고 피를 보기보다 뒤에서 쥐고 흔드는 걸 좋아하지. 분명 현자 측 이외에도 많은 첩자를 쓰려 했을 테지만…… 그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들어온 공격은 결국 현자 측뿐이었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다. 디아카 공작이 태양궁 내부의 사정을 알기 위해 그날 사용했을 수많은 방법 중 제대로 통한 게 현자를 비롯한 각성자들 뿐이었다는 뜻이다.

비록 그들조차도 나단, 칸나, 가케인으로 이루어진 최후의 저지선을 뚫지 못하고 실패했다지만 통한 건 통한 것이다. 현자도 그 사실을 알았으리라.

‘아니. 어쩌면 그것을 노리고 일부러 요란한 방식을 택한 건가.’

현자는 그날 결국 디아카 공작을 납득시켰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만한 이득을 공작에게 제시해 보여 주었을 것이다.

유더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현자라면 무엇을 제시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소수의 인원만으로도 황궁을 지키는 수많은 저지선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뛰어난 능력 제시. 그리고 몬스터로 세운 공을 몬스터로 돌려주었다 떠드는 세상 사람들의 두려움과 고평가도 얻게 해 줬지. 또…… 여태까지 디아카 측에서 알지 못했을 정보도 함께 줬겠군.’

현 디아카 공작은 굉장히 신중한 성격이라 직접적인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다른 공작들은 디아카의 방식을 겁쟁이라 평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몬스터 토벌로 큰 공을 세운 마병단 파티 직후에 몬스터를 보란 듯 태양궁에 침범시킨 이번 일 덕분에 디아카 가는 세간에서 전에 없던 평을 얻기 시작했다. 제 생각보다 훨씬 과격하게 일어난 방식에 짜증이 났을 디아카 공작도 그 점을 모르진 않았으리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부분, 정보.

유더는 아마도 그걸 위해 ‘도움’을 준 게 바로 이전 생의 가짜 현자인 디에먼이리라 짐작했다. 키올레가 직접 보지 못한 탓에 그자가 정확히 어떤 능력으로 거기서 뭘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추측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다.

키올레는 분명 디아카 공작이 그 대화 이후 제게 ‘소드마스터’에 대해 물었다고 말했다.

소드마스터. 그 단어가 별안간 거기서 갑자기 튀어나올 이유가 무엇인가?

‘그날, 태양궁에 침입한 몬스터를 직접적으로 죽인 건 나단 주커만이었지.’

나단 주커만은 숨겨진 소드마스터이다. 그는 그날 몬스터를 죽이기 위해 마스터급 오러를 방출해야만 했다.

그걸 본 건 칸나와 가케인뿐이지만, 사실은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죽임당한 몬스터 당사자다.

만약 그 몬스터가 단순히 그때 거기서 깨어나도록 조치된 것만이 아니라면 어떨까. 물건을 통해 타인의 행동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각성한 케일루사 황제처럼, 그 몬스터를 통하여 당시 일어난 모든 걸 보고 들을 수 있는 자가 적 사이에 존재했다면.

그리고 거기에 가짜 현자 디에먼이 연관되어 있다면?

어쩌면 디아카 공작은 그날 태양궁에 낯선 소드마스터가 있었다는 정보를 얻었으리라. 얼마 전 제왕의 검흔 위에 새로운 검흔이 새겨졌다는 소식을 그도 알고 있을 텐데, 거기에 그 정보를 연관 짓는 게 과연 어려운 일일까?

‘……다른 것도 아니고 새로운 소드마스터에 대한 정보다. 그것도 여태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나단 주커만. 그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면 당연히 다른 일쯤이야 참아줄 만하겠지.’

과연 이게 너무 나간 억측일까? 아무래도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유더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제 그만 제게 정보를 달라 투덜대고 있는 키올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키올레.”

“너, 대체 언제까지 나를 그렇게 막 부를 거야?”

“앞으로 네 아버지를 잘 지켜봐라.”

“……무슨 소리야?! 지금 나한테 아버지를 적대하라는 거냐?!”

뜻밖의 말에 키올레가 화를 냈다. 유더는 무표정하게 그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우리 쪽에서 알아본 결과, 스스로를 현자라 지칭한다던 그자의 능력은 타인을 세뇌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 정신계일 확률이 높아.”

“세뇌? 정, 정신계? 그게 뭐야? 그놈이 아버지를 세뇌한다고?”

“아직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자가 어떤 방식으로 능력을 쓰는지 아직 확실히 모르고, 디아카 공작을 한번 만난 이상 앞으로 어떨지는 알 수 없어. 디아카 공작이 평소와 다른 언행을 안 하는지 잘 지켜보도록 해.”

“무, 뭐, 뭐?”

“그리고 너도, 이제부터는 너무 접근하지 말고 그놈들과 일정 시간 이상 같이 있거나 대화를 나누지 않도록 알아서 조심해라. 다음에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평소와 달라 보이면 바로 평생 잠재울 테니까 그렇게 알고.”

“뭐……?”

이건 정보 제공이 아니라 거의 폭격이었다. 유더는 눈을 크게 뜬 채 그저 입만 벌리고 있는 키올레를 지나쳤다. 그가 훈련장 밖으로 거의 나갈 때가 되어서야 키올레가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듯 펄쩍대며 무어라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체 뭐라는 거야?! 돌아와서 더 자세히 말하라고!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그 이상 한 발짝이라도 더 가면 가만 안……!”

‘돌아가서 보고할 말이 많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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