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수도 7구역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할 만큼 드넓은 황궁기사단 부지.
그 내부로 들어선 마차 안에서 키올레 다 디아카는 몹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내렸다. 비록 황태자의 호위 기사로 보직을 변경했다고는 하나 그의 근본적인 소속 자체는 아직 황궁기사단이다. 그리 눈치를 보며 올 필요가 없음에도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에 긴장감이 서렸다.
“어? 디아카 경?”
“흡……!”
별안간 뒤에서 누군가 키올레를 불렀다.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굳혔던 키올레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표정을 갈무리한 뒤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황궁기사단원 두 명이 키올레를 향해 가볍게 경례했다.
“역시 디아카 경이 맞았네요.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오시는 것 같은데 용무가 있으시다면 저희가 도와드릴까요?”
그들의 얼굴에는 호의적인 미소가 가득했다. 그러나 키올레의 얼굴은 구겨진 종이처럼 파삭 일그러진 지 오래였다.
“……내가, 일이 없으면 여기에 올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건가?!”
“예?”
말을 걸었던 기사들이 신경질적인 반응에 눈을 껌벅였다.
“아, 아뇨,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간만에 뵈니 기쁘다고 말씀드리려 했던 것뿐입니다!”
“예, 맞습니다. 용무도 도와드리고 간만에 이야기도 나눌 겸 하여……!”
“내가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할 일도 못 할 놈처럼 보이나? 그리고 여기는 근무 시간에 평단원들이 지나다닐 길이 아닌데, 이런 식으로 당당히 게으름을 피워도 좋다고 누가 그랬지?”
“…….”
물론 규범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그런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이 황궁기사단에 얼마나 있다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가문의 이름 덕에 겨우 입단했을 뿐 실력으로는 제 종자에게도 못 이길 거란 소문이 파다한 저 키올레 다 디아카가 말이다!
“너희 같은 게으른 자들과 함께 걷는 것조차 내게는 모욕이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이들과 나눌 이야기 따윈 없어. 가라.”
사실 키올레에게 진심 어린 호의는커녕, 나는 새도 떨군다는 디아카 공작가의 막내아들을 내심 우습게 여겨 접근했었던 기사들은 마치 자신들의 마음을 읽은 듯 노려보는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과연 디아카는 디아카다 이건가…….’
‘요즘 저놈을 우습게 보다 혼이 난 놈들이 많다더니, 그게 진짜였나.’
그들은 키올레에게 기가 눌렸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물거리며 물러났다.
혼자 남은 키올레는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쫙 폈던 등에서 힘을 빼며 이를 갈았다.
“…그 망할 마병단 놈……. 제 놈이 무릎으로 기어 오지는 못할망정, 감히 날 여기로 불러?!”
그가 여기로 온 이유는 다름 아닌 황가의 식사 때 몰래 받은 쪽지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갈겨쓴 필체로 숫자 몇 개와 단어가 적혀 있었다. 키올레는 열심히 생각한 끝에 그것이 날짜와 시간, 그리고 황궁기사단의 훈련장 이름임을 깨달았다. 해당 훈련장은 마병단과 황궁기사단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며, 이전에 유더가 황궁기사단원들을 거하게 혼쭐내 준 장소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보고 나니 그것을 보낸 이가 누구이며 무얼 바라는지 아주 확실히 머릿속에 들어왔다.
마병단은 황궁기사단 부지 내에 있으니 키올레가 황궁기사단에 일이 있어 방문하는 척하며 잠깐 근처에 가는 건 쉬운 일이다. 당연히 황태자에게도 의심을 사지 않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유더의 명에 따라야 하는 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오자마자 말 걸던 놈들은 또 뭐야. 들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그가 말을 건 기사들에게 평소보다 뾰족하게 반응한 건 목적을 들킬까 지레 찔려서였다. 하지만 그 기사들이 키올레의 제 발 저린 모습을 보고 오히려 자신들의 저열한 속내를 읽었기에 대귀족답게 화를 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키올레 다 디아카의 평판이 오늘도 그렇게 조금 올랐다.
“왔군.”
“왔군?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냈으면서 하는 말이 고작 그거냐?”
그러면 무슨 말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유더는 아무도 없는 훈련장 구석에 삐딱하게 선 채 씩씩대는 키올레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 지 정확히 3초가 지나자 키올레의 부풀었던 간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며 상실했던 겁도 다시 되돌아왔다.
키올레는 유더의 새카만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는 잠시 일이 있어서 황궁기사단에 들렀다 온다고 했다. 의심은 안 하셨지만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돌아갈 거야.”
“흠, 그래. 어차피 길게 끌 것도 없으니까.”
유더는 키올레를 향해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뭐, 뭘.”
“우리가 교환하기로 한 정보. 당연히 나보다 아쉬운 네 쪽에서 먼저 내놔야지.”
맞는 말이기는 한데, 저런 식으로 요구하니 마치 자신이 애완견이라도 된 것 같아 몹시 수치스러웠다. 키올레는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이 먼저 말을 토해 냈다.
“그동안 그 사기꾼 놈들을 열심히 관찰했다.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그놈들은 우리가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파티 이후 거의 대부분을 광휘궁에서 보내고 있어 지켜보기가 수월해졌지.”
현자를 비롯한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이 태양궁에 몬스터가 침입하기 직전부터 광휘궁에서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올레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놈들을 보면서 느낀 건, 역시 놈들이 선량한 치료사일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속이 검은 사기꾼이 확실하다는 거야. 황태자 전하를 치료하러 나올 때 외에는 숙소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더군. 그래도 눈에 띌 때마다 열심히 쫓아가서 무슨 짓을 하는지 살폈지. 이 내가 더러운 화장실까지 쫓아갔다고. 알아?”
해맑게도 깜박이는 키올레의 뚱한 눈을 보며 유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놓고 물어보는 쪽이 낫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화장실까지 쫓아다니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알겠으니 네가 그걸 관찰하면서 얻은 정보가 뭔지나 말해. 쓸모가 없다고 판단된다면 나 역시도 내가 얻은 정보를 그와 비슷한 정도로만 알려 줄 거야.”
“이, 이 치사한…… 쓸모가 있어도 네가 없다고 말하면 그만이잖아!”
“내가 왜 그런 짓을 할까. 쓸모가 있는 정보를 가져오는 상대라면 나 역시도 그만한 예를 갖추어야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지속할 수 있고, 그게 훨씬 이득인데.”
“…….”
“머리가 있다면 당연히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안 그래?”
“그럼 나는 머리가 없다는 거냐?!”
그간 유더를 자주 만났더니 이제 그 정도 욕은 알아들을 눈치가 생긴 모양이었다. 키올레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지만 어쩔 수 없이 결국 제가 본 것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들어라. 내가 그간 놈들을 보면서 사기꾼이라 느낀 이유는 다음과 같다.”
키올레는 유더와 만난 이후부터 작정을 하고 치료사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들이 뭘 하는지 알기 위해서라면 하기 싫은 일도 뭐든 참았다. 그자들이 하는 일마다 이유를 물었고, 식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산책을 하러 숙소에서 나왔을 때도 쫓아다니며 계속해서 질문을 해 대자 놈들은 나중엔 키올레의 발소리만 들려도 질겁을 했다.
다만, 놈들의 대장급인 중년 사내만은 거기서 예외였다.
어설프게 키올레를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젊은 치료사들과 달리, 그놈은 겁이 없었다. 그는 늘 기분 나쁠 정도로 예의 바른 어투로 고개를 숙였으며 언제든 치료를 받고 싶다면 제게 오라는 저주 같은 말을 덧붙이고는 했다. 말하는 모양새가 거들먹거리는 사제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재수 없었다.
하지만 카치안 황태자가 가장 신뢰하고 곁에 두는 것 또한 바로 그자였다. 그래서 키올레는 놈들이 황태자를 직접 대면하는 광경부터 제 눈으로 먼저 보자고 판단했다.
여기까지 말하자 유더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드디어 그걸 봤다고?”
“그래.”
유더와 대면한 이후 놈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독하게 생각을 고쳐먹은 키올레는 황태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전보다 힘껏 머리를 숙였다. 어쩐지 황태자가 마병단 파티 이후로 그에게 더 큰 신뢰를 보이기 시작한 점도 있어, 드디어 그는 곧 황태자의 치료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키올레는 진지한 얼굴로 그때 제가 본 것을 설명했다.
“치료는 들은 대로 간단했어. 전하께서 침대에 누워 계시면 나이 든 대장 놈이 곁에 앉아 전하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더군. 다른 놈들은 그동안 향과 초를 피우고 얌전히 앉아만 있었고……. 중간에 시종을 불러 몇 번 전하가 드시는 차를 다시 채우게 했지. 그냥 그게 끝이야.”
사실 너무 지루한 나머지 중간에 반쯤 졸기는 했다. 하지만 과정은 정말로 그게 전부였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마법처럼 무슨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건강과 마음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 끝이었다니까. 그따위 걸로 무슨 치료를 한다고! 정말 사기꾼 그 자체지. 진짜 그놈들이 각성자이긴 한 거야? 그것만 봐서는 믿을 수가 없던데.”
“…….”
그래서 키올레는 치료가 끝난 뒤 황태자에게 넌지시 치료사들이 아무래도 하는 일도 없이 대단한 대접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황태자의 명에 의해 그다음부터는 치료 시간 동안 또다시 밖에서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놈…… 완전히 현자보다 아래 취급을 받고 있군.’
카치안 황태자의 성정에 말없이 그냥 내쫓기만 한 건 키올레가 디아카였기에 최대한 참아 준 것이리라. 유더는 한숨을 내쉬며 들리지 않게끔 혀를 찼다.
여기서 우습고도 어이없는 점은, 키올레는 그래도 황태자가 자신에게 날이 갈수록 신뢰를 쌓고 있다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하께서는 요즘 이틀에 한 번 정도는 나와 차를 드시고 전술 게임을 하시지. 이번에 식사 자리에도 나만이 동행을 허락받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겠지? 그분께서는 나를 믿고 계신다고.”
“음……. 그래.”
카치안의 성격대로라면 믿는 자보다는, 만만한 자와 그런 일을 할 확률이 더욱 높다. 유더는 아무래도 카치안이 키올레가 보기와 달리 몹시 머리가 나쁘다는 걸 깨달았거나, 키올레가 약점이라 생각지도 못하는 어떤 약점을 반쯤 잡은 모양이라 짐작했다. 실로 정확한 추측이었다.
“아, 그렇지만 치료를 중점적으로 하는 그 나이 든 놈 외의 다른 젊은 놈들은 각성자가 맞는 것 같기도 해.”
그들이 온 뒤로 광휘궁에 쥐가 많아지고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늘기 시작했다. 키올레는 새벽에 교대 근무를 서던 병사들에게서 이미 알던 길인데도 갑자기 벽이 있는 것처럼 나아갈 수 없었다는 괴담을 듣기도 했다.
예전엔 믿지 않았지만, 그들이 각성자라는 걸 유더에게 듣고 나서부터는 함부로 넘길 수가 없어서 직접 몇 번 야간 근무를 섰다. 다른 병사들과 기사들이 기겁을 했지만 강경하게 밀어붙여 자원한 결과, 정말로 그 소문이 어느 정도 사실임을 알아냈다.
“새벽이었어. 화장실에 가려고 나섰는데, 쥐 네 마리가 모여서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걸 발견했지.”
“그래서?”
“검을 뽑아 들고서 소리를 치니까 사라졌어.”
키올레는 다음날 치료사들을 쫓아다니며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알지 못하느냐고 추궁했다. 재수 없는 녀석들이 들어온 탓에 더러운 쥐가 들끓는다는 욕은 덤이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피로한 눈빛으로 키올레를 피해 흩어졌다.
이후 광휘궁 주변에서 자주 목격되던 쥐 목격담은 완전히 끊겼다. 병사들의 괴담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키올레가 꿈을 꾼 모양이라 짐작했으나 키올레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말이야……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그놈들에 대해 아버지께서 잘 알지 못했던 건 확실하다고 생각해.”
“그건 또 왜.”
“놈들이 우리 집에 다녀온 이후로 아버지께서 그놈들에 대해 많이 물어보셨거든.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잠깐.”
거기서 유더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치료사들이 너희 아버지를 뵈었다고? 디아카 공작을?”
“그래.”
“언제 보러 갔는데? 무슨 이유로?”
“흠, 얼마 안 되었어. 아버지께서도 슬슬 황태자 전하의 치료 차도에 대해 직접 듣고 싶어서 부르신 거였겠지. 그게 중요한가?”
“…….”
‘당연히 중요하지. 그럼 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여태 치료사들을 간접적으로만 대했던 디아카 공작이 처음으로 직접 나서 놈들을 만났다는데, 그런 일이 중요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유더는 잠시 주먹을 꽉 쥐었다가 도로 풀었다.
“제대로 다시 말해 봐. 정확한 시기와 그날 네가 본 것들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