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5화
현재 발정기가 찾아온 2성 발현자들은 강한 수면제를 먹고 며칠간 틀어박혀 쉬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대 성을 지닌 이와 접촉하지 않고 고립된 채로 잠들어 있으면 향도 많이 나오지 않고, 발정기도 빨리 끝나기 때문이었다.
빨리 끝난다 해도 일주일 걸릴 일이 3~4일 정도 단축되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그것 외에는 달리 가능한 방법이 없다. 이전 생에도 상황은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 안 좋았지. 그때는 날이 갈수록 각성자가 많아져 2성 발현자들의 수도 엄청나게 늘었었으니까.’
지금은 마병단이나 나그란의 별 수준으로 각성자들끼리만 모인 특수한 단체 소속이 아니라면 한 마을 내에서 각성자를 한 명 만날까 말까 한 수준으로 그 수가 적다. 설령 2성 발현을 했더라도 상대 성을 만날 확률이 별로 없고, 때문에 관련 문제가 생길 확률도 적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각성자는 점점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평범한 비각성자들도 2성 발현자들이 어떤 식으로 발정기를 겪는지, 향이란 것이 무엇인지 전부 인식하게 될 것이다.
유더가 과거로 돌아온 이래 가장 강하게 바꾸기를 바랐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간 유더가 공을 세우고 이름을 널리 알리며 사람들이 지닐 오메가 각성자에 대한 인식을 처음부터 새롭게 박아 넣기는 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유더가 생각하기에 이전 생에서 오메가 발현자들이 고통받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발정기 때 흘러나오는 강한 향에 있었다. 알파 발현자보다 더욱 많이 흘러나오는 오메가 발현자의 향이 비각성자 세력가들의 음습한 관심을 끈 것이 문제의 시초였다.
2성 발현자의 향이 영향을 미치는 건 같은 2성 발현자밖에 없음에도, 단순히 그것을 후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오메가 발현자들은 수치를 모르는 짐승처럼 멸시받기 시작했다.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변태 성욕자나 부자들이 오메가 발현자를 돈 주고 사들이기 시작했고, 오메가 발현자가 내뿜는 향에 정력 증강이나 최음 효과가 있다는 근거 없는 낭설이 떠돌았다.
소문이 퍼지는 건 빨라도 정정하는 건 몇 배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때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쾌락을 탐닉하는 이들이 넘쳐나던 시기라 더욱 그랬다.
‘아마 그때쯤부터였던 것도 같군. 마병단에 입단할 만큼 능력이 뛰어난 오메가 발현자가 적어지기 시작했던 게…….’
마병단 초기는 각성자가 세상에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기에 2성 발현자의 수도 극히 적었다. 오메가 발현자라 해서 알파 발현자보다 딱히 능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2성 발현자들끼리 차이를 인식할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오메가 발현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늘기 시작하자, 새로이 각성하는 이들 중 오메가로 발현하는 이들의 능력이 대부분 미미하게 변했다.
그 경향성이 대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타이스 율만의 연구와 케일루사 황제의 각성을 지켜보며 유더는 그 이유를 이제는 알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오메가 발현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던 이들이 각성과 발현을 했으니 능력이 제대로 개화될 리가 없었겠지.’
그런 면에서, 타이스 율만이 졸지에 오메가 발현자가 된 제자를 위하여 만들어 냈다는 그 약은 정말 혁신적이었다. 약의 효과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발정기 때문에 고통받는 2성 발현자들의 고난을 그 약으로 줄일 수 있다면, 유더는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유더는 굳은 눈으로 키시아르를 돌아보았다.
“……대단한 약이군요. 그런 약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저것부터 지원하시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유더조차 처음으로 안 약의 존재. 그 의미를 키시아르는 분명히 알아들었을 터다.
“그러도록 하지. 나도 몹시 흥미로워지는군.”
그들은 알릭을 데리고 연구실로 들어가 타이스 율만을 만났다. 노마법사는 2성 발현자를 위한 약을 좀 더 만들고 개량해 달라는 요청을 의외로 흔쾌히 수락했다.
“흠, 뭐. 좋습니다. 어차피 제자 놈 때문에 좀 더 손댈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었지요. 거기에 지원까지 해 주신다면야…….”
“그래. 가능하면 최대한 빠른 대량 생산이 가능한 방법 쪽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군.”
“대량 생산이라…… 몇 명 정도 먹을 수 있는 양을 바라십니까?”
“한 달에 적어도 천 명이 꾸준히 먹을 수 있는 양. 더불어 보관도 간편해야겠지.”
“허어. 마병단 내에도 2성 발현자의 수는 몇 명 안 된다고 들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이 약의 가치를 좋게 봐 주신 건 참 영광입니다만, 이 늙은이 혼자서 그 정도로 대량 생산을 하다간 허리뼈가 나갈 겁니다.”
“마병단만을 먹일 거라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 약이 아무래도 앞으로 자네와 우리에게 제법 좋은 자산이 되어 줄 것 같거든. 더불어 세상에 큰 도움도 될 수 있을 테고 말이야.”
“자산이라면…… 아예 가져다 팔기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각성하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늘고 있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겠지. 필연적으로 2성 발현자의 수도 올라갈 테고, 자네의 제자와 같은 이유로 힘들어하던 많은 각성자들이 그 약으로 도움을 받게 될 거야.”
“그건 그렇습니다마는.”
“마병단이 그 약의 제조와 판매 및 보급을 독점 계약하는 대신 자네와 제자에게 판매 수익의 일부를 제공하겠네. 지금 당장은 돈이 되지 않는 사업처럼 보일지 몰라도, 장담하건대 10년 내로 자네와 제자는 큰 부와 명예를 얻게 될 거야.”
물론 타이스 율만은 세상에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할 연구 시간 확보 쪽이 훨씬 더 행복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 노마법사에게도 하나뿐인 수제자는 몹시 중요했다. 제자를 마구 굴리는 듯 보여도 알릭이 연구를 하지 못할 만큼 골골대자 바로 엄청난 약을 만들어 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연구를 마음 편히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금이 필요한 법이다. 서부 마법사 연합도 연구 자금 투자가 끊긴 탓에 어려움을 겪었듯, 수많은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연구를 후원해 줄 돈 많은 귀족을 언제나 찾아 헤맸다.
진주탑의 원로이자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타이스 율만도 거기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돈은 많을수록 좋긴 하지. 알릭 놈도 슬슬 내 밑에 있기보다는 제 이름을 알릴 때도 되기는 했어. 일단 만들어 두기만 하면 귀찮은 일은 저쪽에서 다 알아서 해 준다니……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구먼.’
타이스 율만은 흔쾌히 키시아르의 제안을 수락했다.
“수익 비율은 어느 정도나 챙겨 주시렵니까?”
“그건 나중에 약의 제작이 완료되고 나서 그 효과와 상업적 가치를 제대로 판단해 본 뒤 결정하도록 하지. 지금은 너무 일러.”
“그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부탁하겠네.”
키시아르가 곱게 웃으며 유더를 향해 시선을 살짝 돌렸다. 유더는 그의 결정에 만족한다는 뜻으로 입술 끝을 올렸다.
“이전 게임에는 그런 약이 나타난 적이 없었나?”
타이스 율만의 연구실에서 돌아가는 길에 키시아르가 조용히 물었다.
“없었습니다. 이런 걸 제작하는 게 가능한 줄 미리 알았더라면 애초에 말씀드렸겠지요.”
“그러면 그때는 어떤 식으로 난관을 해결했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수면제를 개량하고 잠든 채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두는 쪽이 최선이었습니다.”
단장 시절 유더는 발정기를 겪는 오메가 발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각지에 설치된 지부를 쉼터로 이용했다. 발정기가 다가온 2성 발현자들은 누구나 마병단 지부에 방문하여 수면제를 받고 격리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것도 좋은 방식이야. 지부 설립들을 끝내면 참고해야겠군.”
“다만 그 방식은 지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관리가 어려워져 한계가 생깁니다. 모든 지부의 단원들이 윗선의 말을 잘 들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까요. 특히 오메가 발현자들은 발정기 때 향이 더 강하게 나오니 약의 보급을 우선적으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키시아르가 낮게 웃었다. 웃을 만한 이야기가 아닌데 왜 웃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그가 유더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전에도 때때로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나 노련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었지. 하지만 방금은 완전히 20년 정도는 갈리며 일을 해 본 관리를 보는 줄 알았어.”
마병단장 경력 20년은 아니지만 유더가 해치운 업무 강도와 내놓은 결과만 보면 20년이 아니라 30년쯤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더는 제 뺨을 매만지는 사내의 웃음 속에서 얼핏 씁쓸함을 읽었기에 그리 답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너는 처음부터 2성 발현자들 중에서도 오메가 발현자의 문제를 몹시 신경 쓰고는 했었지. 2성 발현을 할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겠군.”
“네.”
“이전에 향 때문에 곤란한 일이 있었나? 아니면, 관련된 일이 생길 예정인가?”
부드럽게 묻고 있으나 붉은 눈동자는 유더의 반응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듯 예리하고 신중했다. 그가 무엇을 짐작하고 있을지 알 만했으므로 유더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저와 관련된 거라면 둘 다 아닙니다. 저는 향과 발정기 때문에 곤란을 겪은 적이 없는 유일한 2성 발현자였습니다.”
“왜지? 이번에는 향도 제대로 나오고, 발정기도 아직 오지 않았다고는 해도 아마…….”
붉은 시선이 유더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가 흐린 말끝 뒤에 무슨 말이 올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요즘 들어 키시아르의 향이 일상생활 도중에도 문득문득 피부를 스치는 게 잘 느껴지는 것만 보아도 몸이 평소보다 민감해지고 있다는 건 분명했으므로.
“글쎄요. 이유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아무튼 확실한 건, 다른 2성 발현자들이 관련된 문제로 고충을 겪는 건 많이 봤지만 제게는 찾아오지 않은 문제였다는 겁니다.”
이전 생에서는 없었던 일.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터다.
그 차이는 어디서 생겼을까.
깊이 생각해 보았을 때 짚이는 부분은 하나였다.
‘이전 생에는 기이한 연결과 관련된 현상들을 겪은 뒤 키시아르가 죽었고, 지금은 죽지 않았다는 것.’
유더의 말에 키시아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사내의 눈빛이 어쩐지 점점 더 어두워지는 듯해, 유더는 화제를 돌려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런데 단장님.”
“응.”
“약의 대량 생산은 어떤 방식으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음…… 이런 건 본래 상단들이 전문이지. 슈덴 상단과 계약을 맺어 제작과 유통을 맡길 생각이네.”
키시아르의 답은 미리 모든 걸 생각해 본 듯 빨랐다.
“제국 내에만 뿌릴 거라면 마병단을 중심으로 하면 그만이지만, 제국을 넘어 널리 세계에 퍼트려야 할 물건이라면 상단의 힘이 필요해. 슈덴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신뢰가 확실하니 그 부분은 문제없지.”
“과연 그렇겠군요.”
말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키시아르는 펠레타 공작 시절부터 이런 일을 많이 해 본 듯했다. 그가 펠레타라는 척박한 토지 하나만을 영지로 가지고 있음에도 마병단장으로서 활동할 때 단 한 번도 돈이 부족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건, 역시 황족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듯했다.
‘믹 슈덴이 펠레타에서 상단을 일으켜 세울 때부터 키시아르와 연이 있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그때부터 상단을 이용하여 이런 식으로 재산을 불렸던 걸지도 모르겠군.’
귀족들이 상단을 아래 두고 굴리는 일은 자주 있다. 지금은 감옥에 있는 타인 공작도 서부의 상단들을 제 아래 두고 돈을 뽑아 먹지 않았었던가.
키시아르가 펠레타 공작이 된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충분히 그 정도 일쯤은 해냈을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보지?”
“아뇨. 그냥, 이번 일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잘될 테니 걱정 말게.”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바라는 일이니 반드시 이루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