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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84화 (584/805)

584화

“마병단 차원에서 각성자용 힘 제어구를 만들어 보았으면 합니다.”

뜻밖의 말에 다른 이들이 모두 의문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유더를 보았다.

“각성자용 제어구? 뭐 하는 데 쓰려고요?”

에버가 가장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름만으로도 얼추 무슨 물건일지 짐작은 되나 그걸 왜 지금 만들자고 제안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유더는 자신의 뜻을 완벽히 짐작하고 있을 키시아르, 그리 놀란 기색이 없는 나단, 그리고 의문과 염려를 띤 마병단의 동료들을 한 번씩 돌아본 뒤 입을 열었다.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에게도, 마법사에게도 각자 그들의 힘을 일시적으로 제어하기 위한 제어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각성자를 위한 제어구는 존재하지 않지요.”

“그런 게 없으면 오히려 좋은 게 아닌가?”

스티버가 고심하는 얼굴로 물었다.

“힘을 강제로 제어하는 기구가 꼭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 우리 손으로 우리에게 족쇄를 채우는 모양이 되지 않겠어?”

“물론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기사와 마법사의 제어구는 모두 그들 스스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사제의 신성력 제한 주문도 태양신의 사자 오르헤가 만들었다고들 하지. 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으리라 생각하는가?”

유더의 말이 끝나기 전에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부단장들은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제일 먼저 대답한 이는 칸나였다.

“힘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려면 그런 수단도 필요하니 그런 건가요?”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필요한 이유 중 하나지. 하지만 지난 서부에서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면 다른 필요성도 느껴질 거라네.”

“아…… 알겠습니다. 힘을 통제할 수 있는지의 문제군요.”

에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대답했다.

“저희처럼 자신이 지닌 힘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자칫 잘못하면 폭주하기도 하고, 발현한 힘이 도로 없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마병단에서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또…….”

“또?”

키시아르가 무엇이든 말해 보라는 듯 에버를 독려했다.

“서부에서 잡혔던 나그란의 별의 각성자들 같은 이들을 위해서도 필요하겠지요. 아닌가요?”

“훌륭하군.”

정확하다. 유더는 에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 모두가 제어구가 필요하다 판단한 이유입니다.”

마병단은 각성자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 처리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그건 즉 나그란의 별은 시작일 뿐,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각성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도우며 때로는 심판을 내리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현재는 각성자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에 제어가 필요한 상황에 놓인 각성자의 취급이 너무나 잔혹하다.

서부에서 잡혔던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도 처음에 평범한 비각성자 기사들은 쇄골과 다리뼈를 사슬로 뚫어 사지를 결박해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지나치게 위험하고 통제가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병단이 거부하고 밤낮없이 교대로 지키기로 했기에 한발 물러났지만, 서부에 지부를 임시로라도 세우고 오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에버도, 칸나도 모두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하지만 24시간 교대로 그 각성자들을 지키고 감시하는 것도 마병단 입장에서 보통 일은 아니었다. 특수 상황이었고 몇 명밖에 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뿐, 앞으로도 죄지은 각성자들을 모두 그렇게 처리할 수는 없다. 당장 마병단 내에서 감시 중인 호산라나 가일, 두일 형제만 해도 그랬다.

마병단의 손이 닿지 않는 곳들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각성자들이 제대로 된 조사 한번 없이 통제가 불가능하다 판단되어 죽임당하거나 사지가 잘린다. 이전 생에도 그런 일들이 각성자용 제어구가 발명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그 제어구가 유더 정도 되는 이의 힘까지는 완전히 제한할 수는 없었다지만 폭주의 위기에 놓였거나 그저 조용히 살기를 원하는 이들, 그리고 죄를 저질렀으나 사형당할 정도는 아닌 이들에게는 때에 따라 적절한 수단이 되어 주었다.

그것이 생긴 이후로 유더는 제어 수단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는지를 몸소 느꼈다. 제어구를 악용하는 자들도 있었기에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건 물론 아니었지만, 세상 모든 것들은 본디 그런 법이다. 단점이 있다 해도 통제를 돕는 수단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아마 기사와 마법사, 사제용 제어 장치를 만든 옛날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 마병단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의 각성자들을 위해서도 필요하긴 하겠네. 지금은 그냥 각성자라는 이유만으로 위험에 처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잖아.”

칸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현재의 각성자들은 그저 힘을 발현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목숨을 위협당하고는 한다. 생김새가 평범한 사람과 많이 달라지는 경우는 더 심했다. 사람들은 자신과 무언가 다른, 그리고 통제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극도로 두려워하며 없애기를 바랐다.

제어구가 거의 통하지 않은 덕에 그 ‘온갖 통제법’을 몸으로 직접 겪은 유더는 그 마음들을 아주 잘 알았다.

“음…… 그래요. 듣고 나니 이해는 되네요. 하지만 현재 마병단에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스티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키시아르를 보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일단 보좌의 생각을 먼저 한번 들어 볼까.”

“네. 기본적으로 힘을 제어하는 기구가 될 테니 기존에 존재하는 다른 제어구를 조사하는 게 우선일 것입니다. 사실 기사용 제어구보다는 마법사용이 더 많이, 그리고 자주 쓰이니 그것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쪽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법사용 제어구와 그걸 잘 아는 사람이라. 결국 마법사겠군.”

“예. 마침 마병단에는 마법사이신 조력자 분들이 꽤 머물고 계시지요. 게다가…… 현재 마법사이면서 각성자인 사람도 한 분 존재하지 않습니까.”

“아…….”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똑같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마병단에서 머물며 연구 중인 마법사 타이스 율만, 그리고 이번에 합류한 헬렘에 대한 정보는 이 자리에 올 만한 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리고 타이스 율만의 제자, 알릭 펠긴이 마병단에 온 이후 각성자가 되었다는 특이사항 또한.

이전 생에는 카치안 황제와 누군지 모를 다른 마법사가 제어구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그때와 같은 선택지를 따라갈 이유는 없지 않은가. 원 제작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해도, 어쨌든 그것이 무엇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고 있다. 어디로 가든 만들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단 내에서 만들어야 비밀 유지도 쉽고, 악용될 여지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군. 가장 적절한 선택지야. 그러면 그렇게 하지.”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말을 꺼낸 이의 책임이 있으니 회의가 끝난 후 보좌가 나와 함께 가도록 하지. 어떤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른 이들의 표정은 그 말을 듣고도 별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칸나는 달랐다. 유더는 그녀가 자신을 향하여 몹시 미묘하고도 따스하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았다.

‘……키시아르가 내게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나.’

이후 곧바로 회의가 끝났기에 답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유더는 묘한 기분 속에서 키시아르와 함께 알릭이 있을 타이스 율만의 연구실로 향했다.

“각성자용 제어구를…… 제가요?”

평소처럼 스승의 연구를 돕고 있던 알릭은 키시아르의 등장에 한 번 놀랐고, 그와 개인적으로 나누고 싶은 말이 있다는 소리에 두 번 놀랐다.

그리고 이어진 제안에는 스스로 귀를 의심할 만큼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마법사이니 마법사용 제어구의 원리는 잘 알고 있지 않겠나.”

“그야…… 그렇지요?”

“지금껏 스승과 함께 각성자의 힘에 대해 열심히 연구한 것 또한 알고 있네. 그렇다면 두 가지 모두 잘 알고 있는 셈이니 자네보다 더 적절한 이가 또 있겠나?”

“하, 하지만 저는 마도구 제작 분야는 필요한 정도만 배워 두어서 크게 뛰어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차라리 스승님께 부탁드리는 건…….”

“아뇨. 당신이어야만 합니다.”

옆에서 낮게 내뱉은 유더의 목소리에 알릭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렸다.

“마력을 알지 못하고서는 마법사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각성자의 힘을 알지 못하면 각성자에 대해서도 모를 거라 생각합니다. 이 제어구는 각성자의 힘 제어가 단순히 구속만을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제작해야만 합니다.”

“…….”

그 말을 들은 알릭의 표정에서 놀라움과 겁먹은 기색이 조금 사라졌다.

“그건…… 그렇죠. 스승님과 이 힘을 키우기 위해 연구하는 동안 제어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 보긴 했어요. 마력이 문제를 일으키면 제어구 이외에도 종류별로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많이 있는데, 각성자의 힘은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 보니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었죠.”

처음에 각성자가 된 이후, 알릭은 자신이 속성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무척 기뻐했었다. 하지만 고작 물 몇 방울을 불러낼 정도로 미약했던 힘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발전시키는 동안 그는 이 힘이 마법과는 역시 많이 다르다는 점을 자각했다.

각성자는 각성자일 뿐, 마법사가 아니다.

겉보기에만 비슷해 보인다 해서 다는 아니었다. 미지로 가득한 각성자의 힘은 때로 힘을 지닌 당사자의 제어도 듣지 않을 때가 존재했다.

만약 마법을 배우던 도중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면 충분히 어렵지 않게 온갖 수단을 이용해 제어할 수 있었을 일을, 각성자의 힘을 연구할 때는 배로 힘들게 겨우겨우 다스렸다.

유더의 말마따나 알릭만큼 제어의 필요성과 용도를 확실하게 알고 느낀 마법사는 이 세상에 다시 없으리라.

알릭 펠긴은 마법사이지만 각성자이기도 했다. 그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건 그 자신뿐이며, 스승이 아니었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던 알릭이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시도해 보도록 할게요. 이걸 해내면 제게도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요.”

“잘 생각했네.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지원하지. 아, 그런데 혹시…….”

유려하게 웃고 있던 키시아르가 문득 알릭을 새삼스럽게 훑었다.

“단순히 각성자가 된 것만이 아니라, 2성 발현까지 했었나?”

‘2성 발현? 알릭이?’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 유더가 고개를 돌리자 알릭이 벌게진 얼굴로 숨을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으악! 그, 그게 보이십니까? 여, 역시 향 때문인가…….”

땀을 식히려는 듯 그가 황급히 손부채를 부치자 유더의 감각에도 희미하게 향이 느껴졌다.

“언제 발현했습니까, 알릭. 분명 전에는…….”

“얼마 안 되었어요. 마병단 파티 때쯤이었던가… 보고를 따로 드릴까 했는데 이제와 2성 발현을 한 게 잘 믿기지도 않고 그래서…….”

알릭은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했다고 무겁게 고백했다. 왜 그가 발현 사실을 비밀로 하고 말하지 않으려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1성이 남성인 이들은 2성이 오메가로 발현했을 때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충격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알릭 또한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발현한 지 얼마 안 된 것치고는 향이 대단히 옅은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까.”

“아니. 그건 아마…… 스승님과 함께 만든 약 때문일 가능성이…….”

“약? 언제 그런 걸 연구했지? 내게는 들어온 바가 없는데.”

키시아르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알릭이 손을 내저으며 전혀 위험하지 않은 약이었음을 설파했다.

“제가 2성 발현 이후 연구하기를 좀 힘들어하다 보니 스승님께서 마법초를 개량하여 향을 억누를 수 있는 약을 만드셨습니다. 스승님께서 지금은 마력 관련 연구를 중점적으로 하시지만 예전에는 마법 식물 관련 연구의 대가셨거든요. 아무튼 그래서……!”

알릭이 몸으로 몸소 실험 대상자가 되어 체험한 그 약의 효과는 생각보다 몹시 좋았다. 그는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향이 흘러나오지 않았고, 몸 상태도 평소와 다름없이 좋아 보였다.

지금 향이 조금 흘러나온 건 그가 아침에 약을 먹는 걸 한번 빼먹었기 때문일 뿐, 본래의 양과 횟수를 잘 지켜서 먹으면 2성 발현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던 알릭의 말에 유더는 간만에 상당한 놀라움과 충격을 느꼈다.

‘……그런 걸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아, 물론 아직은 개량 중입니다만…… 일단 제가 겪어 보고 괜찮으면 이것도 보고드리려고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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