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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82화 (582/805)

582화

“이제…… 진짜 식사 시간이군.”

카치안이 먼저 자리를 비웠다고 황실 가족들의 식사까지 끝난 건 아니었다.

본래 황실 가족들과 그 측근들만이 모인 식사 자리는 2부 구성으로 되어 있다. 아주 적은 양의 상징적인 요리들로 황족들끼리 1부 식사를 끝내고 나면, 동행한 이들과 함께 조금 더 내밀한 공간으로 이동하여 2부 식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의 2부 식사 자리는 1부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차려진 음식들은 격식과 의미를 지키기보다 맛과 재미를 더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주변도 한결 부드러운 분위기로 꾸며져 풍미를 더했다.

유더는 미리 2부 식사가 열릴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후의 수석 시녀, 바르네즈 백작 부인 알게리타와 인사를 나누며 이전 생의 식사 자리를 떠올렸다.

그때는 2부 식사에서 동행자끼리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누군가 인사를 했더라도 유더 또한 경계만 할 뿐, 받아 주지 않았으리라.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이쪽이 그때보다 더욱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유더의 바로 곁에는 함께 온 나단 주커만이, 그리고 맞은편에는 키시아르가 앉았다. 시종장 또한 이 시간만큼은 황제를 곁에서 보필하는 이가 아닌 동행자의 자격으로 식탁 앞에 머물렀다.

“아까 이 요리가 맛있었는데 이번에도 나왔군요. 다들 이걸 뿌려 보도록 해요.”

“세상에, 정말 맛있습니다. 벌써부터 후식이 기대되네요.”

“주커만 경은 여전히 말수가 적군. 음식은 입에 맞는가.”

누군가를 염탐하거나 방어하려 들지 않는 편안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유더의 앞에는 그를 위하여 다른 이들이 가져다 준 요리들이 점차 산처럼 쌓였다.

‘……분명 처음에는 멀리 있는 요리를 작은 접시로 옮겨 주라고 명하는 정도였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쌓인 거지?’

“잘 먹어서 좋군. 자, 이것도 하나 더.”

유더는 때마침 제 앞에 새로운 요리 접시를 하나 더 슬쩍 밀어 주는 키시아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쌓인 접시 중 절반은 저 사내의 탓이었다.

“…….”

“왜 그렇게 보지?”

눈이 마주치자 키시아르가 뻔뻔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아, 아까 말했던 후식이라면 곧 나올 거야. 아주 마음에 들 거라 장담하지.”

‘아까 말했던 후식’이란 카치안이 연신 흘긋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키시아르가 유더에게 속삭였던 바로 그 이야기였다.

‘2부에는 1부와 전혀 다른 후식이 나올 거라며 기대하라고 했었지.’

아마 카치안이나 다른 이들은 키시아르가 유더에게 굳이 비밀스럽게 속삭인 말이 그런 내용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이미 쌓인 접시가 층을 이룰 정도였으나 키시아르는 개의치 않고 접시 사이와 사이에 새로운 접시를 우아하게 밀어 넣었다. 유더가 묵묵히 먹어 치운 접시가 한쪽에 쌓이고 그것을 시종들이 도로 가져가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는 그의 표정은 카치안을 대할 때와 달리 아주 부드럽고 달콤했다.

먹고 있는 건 이쪽인데, 어쩐지 키시아르 쪽이 더욱 맛있는 것을 먹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렇게까지 계속 신경을 써 줄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 했던 마음이 마주친 눈빛 앞에서 술렁술렁 힘을 잃고 사라진다.

‘……모르겠다. 그냥 주는 대로 먹는 수밖에.’

배가 아직 차지 않은 상태여서 다행이었다.

유더는 그날 키시아르가 내민 접시는 물론, 황제와 황후가 지지 않겠다는 듯 경쟁적으로 하사한 접시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요리와 후식들을 기어이 모조리 먹어 치우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에 그의 앞에만 키시아르가 황궁 요리사에게 몰래 언질을 넣어 주문했다는 5층짜리 황금 디저트의 탑이 내려왔을 때는 황제의 앞에서 감히 이래도 괜찮을지 정말 의심스러웠지만, 어쨌든 먹기는 다 먹었다.

그리고 황제와 황후는 아무래도 유더 아일이 후식을 특별히 좋아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 듯했다.

“키시아르. 오늘 율법학자들과 재상을 만났었다지. 어떠하더냐.”

식사가 모두 끝난 뒤, 황후는 일이 있어 새벽궁으로 먼저 돌아가고 키시아르와 그가 데려온 이들만이 남아 황제와 마주 앉았다. 황제는 아우가 먼저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이미 오늘 황궁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다.

“예. 다행히도 모두 반응이 나쁘지 않더군요.”

“이쪽의 지원은 필요 없고?”

쓸데없이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는 간결하고 냉철한 질문을 들은 키시아르가 씩 웃었다.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알겠다. 짐에게 줄 자세한 계획안 또한 물론 가져왔겠지. 주거라.”

“이럴 수가. 미래를 보는 듯 현명하신 폐하의 말씀에 저는 그저 매번 탄복하게 되는군요.”

“농담하지 말거라.”

키시아르가 싱글대며 품에서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거기에는 율법학자들에게 주었던 것과 거의 같은 사안들이 적혀 있었다. 빠르게 모든 글자를 읽어 내린 황제가 코 위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최초로 제정할 법률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만한 부분들을 대부분 잘 추렸구나. 핵심은 적고 간단할수록 의미가 있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2성과 관련된 부분은 지금 꺼내기에는 시끄러워질 확률이 너무 크지 않겠느냐? 빠른 제정을 위해서라면 이 부분의 우선도는…….”

무어라 이어서 말하려던 황제의 시선이 문득 유더와 마주쳤다. 그대로 가볍게 다시 스쳐 지나갈 줄 알았건만, 황제의 눈은 유더의 얼굴에서 몇 초 동안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잠깐의 침묵 뒤 황제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니. 이 말은 듣지 못한 것으로 치거라.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키시아르가 웃으며 답했다.

“폐하의 지원이 필요한 때가 온다면 바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라.”

전과 달리 이제는 조금 핏기가 살아난 황제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렀다. 그가 한숨을 쉬거나 말거나, 키시아르는 거침없이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추가로 드릴 말씀이 실은 하나 더 있습니다, 폐하.”

“무엇이냐.”

“마병단 2기 모집과 지부 설립에 대한 발표를 내일로 당기려 합니다.”

“내일? 그리 빠르게?”

“어차피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끝났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내내 머금고 있던 웃음기를 조금 거두었다.

“그리고……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해당 계획에 제가 조금 더 깊이 관여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스스로 손을 대어야만 안심이 될 것 같은 부분들이 새로이 눈에 띄더군요.”

“흠……. 그것도 원하는 대로 하거라.”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무엇을 고민하느냐. 짐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과연 키시아르의 말대로였다. 황제는 키시아르가 하려고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지원하겠다는 마음이 몹시 확고해 보였다. 펠레타 공작이 자리를 비우면 그만큼 황제의 부담이 늘겠지만, 지금의 황제에게는 이전에 없었던 시간과 건강이 모두 존재했다.

흔쾌하게 자신에게 모든 걸 맡기라고 말하는 황제의 눈빛에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도를 떠나기 전날에만 말하거라. 짐의 힘이 담긴 물건을 보낼 테니 늘 곁에 두고 있으면 연락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 그것 말입니다만. 폐하께오서 새로이 얻으신 힘을 빠르게 능숙히 다루고 계시기는 하나, 좀 더 안전하게 통제하며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역시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의견 아니었습니까?”

“그랬었지. 방도를 찾았느냐?”

“예. 찾았습니다.”

시원하게 대답한 키시아르가 눈을 휘며 입을 열었다.

“눈앞에 있는 제 보좌는 마병단 최고의 각성자이기도 합니다만, 사실 단 내에서는 마병단 최고의 훈련 담당자로 더 유명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그 사실까지는 몰랐다.”

황제가 방금과는 다른 눈으로 유더를 향해 재차 고개를 돌렸다.

“마병단의 훈련법을 심화해 지금과 같은 실력자들로 만든 건 모두 유더의 공입니다. 그는 능력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 알지 못하여 헤매었던 수많은 동료들을 도왔고, 그 누구보다 많은 능력을 접해 왔습니다.”

물 흐르듯 칭찬이 이어졌다.

“유더 아일만큼 각성자의 능력을 잘 알고 이끌어 낼 수 있는 이는 이 세상에 둘은 없을 것이라 장담합니다. 물론 보좌도 저와 함께 곧 수도를 재차 떠나게 되기는 하겠습니다만, 훈련 계획을 돕는 일이란 직접 만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하지요.”

유더는 이 대담한 발언을 곁에서 듣고 있던 나단 주커만의 얼굴에 드물게도 놀란 기색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당연한 일이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 같아도 곱씹어 보면 엄청난 말이었으니까.

황제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거의 없다. 그럴 자격을 받은 소수는 아주 고귀하게 대접받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똑똑하고 명망 있는 학자나 사제 정도는 되어야 황제의 스승이 될 수 있는 법인데, 아무리 각성자의 힘이라는 특수한 분야 한정이기는 해도 평민 출신인 유더에게 황제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케일루사 라 오르가 보통 사람들과 같은 관념을 지닌 이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키시아르에게 도움을 청했을 터다. 모욕을 받았다 여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발언을 들었음에도 황제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다.”

황제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위로 올라갔다.

“아일 남작이 짐의 목숨을 구명한 데 이어 앞으로는 스승까지 되어 주는 것이로군. 떠나기 전에 한번 짐과 독대하여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케일루사 황제의 기껏 되찾은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라도 제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빠르게 판단을 내릴 줄은 유더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그는 내심 조금 놀랐던 마음을 빠르게 가라앉히며 고개를 숙였다.

“예. 물론입니다. 하지만 제가 감히 폐하의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는 없을 듯하니 편히 대하여 주십시오.”

유더의 목적은 황제의 힘을 지금보다 더 발전시키고 쉽게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 그의 목숨에 도움이 되는 것이지, 그 밖의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공식적으로 황제의 스승이라 불리게 되는 건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황제가 각성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는 비밀이라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밝히게 될 터다. 그때 괜스레 소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는 일은 변함없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 유더는 그 점을 내포하여 말을 슬쩍 돌려 표현했지만, 황제는 그 뜻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어쩐지 다른 면을 더 신경 쓰는 듯했다.

“…볼수록 아쉽구나. 대체 어쩌다가…….”

“예?”

“아니. 되었다.”

무어라 중얼대던 것을 삼킨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짐은 함부로 몸을 굽힐 수 없는 자리에 있으나, 배움은 그 모든 것에서 언제나 예외라고 배웠다. 배움을 구하는 순간에는 황제도 한낱 구도자일 뿐이다. 그러니 아일 남작 또한 나를 가르칠 때는 가르쳐야 할 대상 이외로 판단치 말도록.”

키시아르와는 다른 의미로 차마 반박을 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리하여 유더는 황제의 비공식적인 스승이 되었다.

그로부터 하루 뒤, 제국 전체가 크게 술렁였다.

마병단의 새로운 단원 모집과 지부 설립 소식은 신분의 고하와 나이, 성별을 막론하고 모든 이를 놀라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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