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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81화 (581/805)

581화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미소. 딱히 걸릴 것이 없는 대화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유더의 눈에만은 키시아르가 어떤 식으로 카치안을 대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키시아르는 지금 카치안의 방식대로 카치안을 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실제 카치안보다 훨씬 온건하였기에 완전히 똑같은 느낌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근본만은 아주 비슷했다.

교묘하고 변덕스럽게 사람을 찌르는 그 방식.

카치안이 황제였던 시절에는 모두가 피를 말렸고 변덕의 끝에 누가 밀려나고 누가 죽게 될지 신경을 날카롭게 세웠던 그 방식들이, 키시아르의 손을 거쳐 피비린내가 제거되고 나자 그저 광대놀이와 같은 우스움만 남았다.

카치안 라 오르와 그를 가르쳤을 귀족들이 다른 이들의 공포를 얻기 위하여 휘둘러 댔던 칼날의 아래엔 결국 이런 미숙함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 카치안 또한 키시아르가 제게 무엇을 보여 주고 있는지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여태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손쉽고 우습게 여겼던 이들이 낯선 방식으로 저를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소년 황태자는 당혹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억지 미소로 감추려 해도 눈치 빠르고 노련한 이들의 눈에는 그 동요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그래도…… 무너지지 않고 참아 내기는 하는군.’

키시아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반사적으로 위축된 듯 보였던 카치안은 잠시 후 악에 받친 눈빛으로 이를 악물더니 어깨를 다시 폈다. 그러고는 자신이 하려던 말은 그저 황제와 황후를 위한 걱정이었을 뿐, 말을 하다 만 것은 아직 몸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 변명하며 재빠르게 발을 뺐다.

비록 키시아르를 보는 눈빛에서 피부가 찌릿할 정도의 분노가 느껴지기는 했어도 겉은 나쁘지 않은 대응이었다.

“아하, 그러셨군요. 하기는 황태자 전하께서도 근래 계속 건강이 좋지 않으셨지요. 그럼에도 두 분을 걱정하시어 여기까지 와 주시다니, 새삼 가족의 소중함이 가슴에 사무치게 느껴집니다.”

키시아르 또한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그대로 넘어갔다. 가족의 소중함이라니. 카치안과 그들 사이에서 이보다 모순적일 수 없는 단어였다.

“……그래. 건강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황제가 키시아르의 말을 이어 받으며 카치안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많은 뜻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식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카치안이 건강 이야기를 꺼낸 것을 기점으로 키시아르의 대화 방식이 바뀌었다. 그는 이제 카치안의 거울처럼 대응하며 뒤흔들던 것을 멈추고 주도하던 대화의 물꼬를 상대에게 넘기기 시작했다.

그건 카치안 본인조차도 완전히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참으로 교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질문, 그리고 답변. 이어서 또 질문, 또 답변.

카치안 본인이 직접 언급한 건강이란 화제에서부터 파생되어 자연스럽게 이어진 질답은 황제 측의 건강 정보를 자연스레 흘릴 듯 말 듯 하면서도 결국에는 카치안 쪽의 답변을 더욱 길게 얻어내는 식으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언뜻 발언권이 카치안에게 더 많이 흘러간 듯 보이면서도 사실상 내준 정보는 거의 없다. 이미 한 번 뒤흔들린 터라 카치안의 경계심은 평소와 다소 다른 방향으로 치우쳐 있었다.

상대의 말에 휘말려 주는 듯하다가 깔끔하게 봉쇄하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키시아르의 완급 조절이 얼마나 교묘하던지, 유더는 새삼 그의 화술이 거의 신의 경지에 다다른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이건 마치…… 상대가 어디까지 버티는지 알아보려고 작정한 것 같군.’

키시아르는 마치 카치안 라 오르란 인간을 새삼 처음 인식한 것처럼 굴었다. 이전에 카치안과 황궁 내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짐짓 친근한 듯 웃으며 감정 없이 거리를 지키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때로는 눈치 없는 한량처럼, 때로는 구렁이를 백 마리쯤 삼킨 노회한 정치가처럼, 그는 황제와 황후를 적절하게 끌어들이며 카치안을 쉴 새 없이 감정의 소용돌이로 빠트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교묘한 질문을 하고 있다고 착각할 만한 대화가 끊임없이 흘렀다.

흥미를 가졌던 유더 아일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대화에 집중하던 카치안은 후식이 곧 나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시간이 그만큼 흘렀음을 깨닫고 조금 당혹했다.

‘……벌써?’

그는 흥분을 식히기 위해 깊이 숨을 삼켰다. 후식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먹을 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펠레타 공작은 내내 황제의 건강에 대한 화제를 돌리려 했다. 황제는 세 번이나 찻잔을 비웠는데 그중 두 번의 차에서 약초 향이 났다. 약을 탄 차였겠지.’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은 건 가까이에서 보면 숨길 수 없을 만큼 확연했다. 황후는 카치안이 짐짓 질문을 할 때마다 눈을 내리깔고는 난감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황제의 건강에 대한 화제는 피하려 했으면서, 반대로 나의 건강에 대해 자꾸만 물었던 건 왜일까. 일단 회복 여부에 대해 확언을 듣고 싶어 하는 걸 피하려고 아직 치료를 받는 중이라 말하기는 했는데…….’

황태자가 공식 활동을 재개할 만큼 낫기는 했지만 아직 치료사가 드나드는 중이란 건 아마 황제 측에서도 알음알음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굳이 전부 회복되었는지를 자꾸 묻는 이유가 왠지 모르게 찜찜하게 여겨져 한발 물러났다.

“황태자.”

머리가 한껏 어지러워졌던 그때, 후식을 앞에 둔 황제가 고저 없이 어두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오늘 황태자를 여기까지 불러들여 건강에 대해 직접 듣고자 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짐이 직접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슬슬 다른 이들에게 넘겨주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카치안이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얼마 전 태양궁에 몬스터가 나타나는 괴사건이 있었지. 다행히 짐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으나, 그 일을 계기로 어지러운 때에 대신 일을 도와줄 이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뒤를 이어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건강이 아직 좋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어쩔 수 없이 이 일은 펠레타 공작에게 넘기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려 한다.”

카치안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예?”

“나라를 위한 일이란 맡고 싶다 하여 모두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건강은 그 조건 중에서도 최우선을 차지하는 법. 펠레타 공작은 황제의 일을 대리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며, 건강에도 이상이 없으니 문제가 없을 터.”

카치안은 그제야 케일루사 황제의 의도를 깨달았다.

‘이런 비열한.’

오늘의 식사 자리에서 중요했던 건 황제의 건강이 아니었다. 카치안의 건강이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건강 상태에 신경을 쓰도록 만들며 이야기의 쟁점을 돌려놓고서는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그들은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임을 카치안이 스스로 인정하도록 만든 뒤, 펠레타 공작에게 공식적으로 힘을 실어 줄 작정임을 대놓고 공표하려 한 것이다.

‘설마 요즘 칩거를 깨고 자꾸 나오던 그 행보의 목적도 이것을 위해서였나.’

케일루사 황제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순순하게 자리를 넘겨주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그러나 그 대안이 키시아르 라 오르라니.

모두가 비웃을 결정일지도 모르겠지만, 카치안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꽃처럼 그저 웃고만 있는 펠레타 공작이 마치 언젠가 닥쳐올 줄 알았던 재해라도 되는 듯 아연하게 노려보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런 일에는 당연히 다른 이들의 동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일단 저는 제국의 황태자로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짐이 맡기는 일을 황태자가 그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뜻인가.”

황제가 도리어 반문했다. 안경 너머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눈 속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카치안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맡겨 주신다면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황태자의 의무이니까요.”

“의무라.”

조용히 그 단어를 반복하여 내뱉은 황제가 잠시 후 ‘좋다. 그렇다면…….’하고 중얼거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짐이 맡기고자 했던 일은 황궁 내 치안과 관련된 중요한 안건이다. 그 시작으로, 이번 몬스터 침입 사건의 범인과 배후가 아직 잡히지 않았으니 그 일을 누구의 의문도 없도록 황태자가 말끔히 처리하도록 하라.”

“…….”

순간 카치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그러고 있거나 말거나 황제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태양궁에 소속된 이들이라면 누구든 움직여도 좋다. 처음에 그 사건을 조사했던 황궁 호위기사들과 마병단, 그 외의 궁인들을 꼼꼼히 조사하도록. 범인으로 여겨지는 자라면 누구에게든 자비를 보이지 말라. 그것이 황태자의 의무라 스스로 말해 주었으니, 믿도록 하지.”

카치안은 태양궁에 몬스터가 침범한 사건의 범인이 자신의 치료사들이란 사실을 아직 몰랐다. 디아카 공작이 그 건에 대해 황태자에게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아카가 그 배후에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이는 이 제국에 아무도 없었다. 카치안 라 오르 또한 그러했다.

카치안은 오늘 황제의 식사 자리에 갈 예정이란 사실을 디아카 공작 측에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홀로 황제를 독대하고서 이런 일을 맡게 된다면 뒤늦게 설명한다 해도 디아카 공작 측에서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이미 한 번 디아카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한 전적이 있는 황태자를?

카치안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시선이 펠레타 공작의 얼굴을 향해 움직였다.

키시아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검은 머리 정부 놈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머리가 터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치안이 이렇다 할 말을 남기지 못한 채 도망치듯 사라지고 나서, 케일루사 황제는 소년이 떠난 자리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전술 게임에는 완벽한 흑패도, 완벽한 백패도 없다는 말이 있다. 절대적인 적도 아군도 없다는 뜻이며, 색깔에 집착할수록 더욱 함정에 빠져 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황제의 아우 키시아르는 그 말을 잘도 이용하여 카치안 라 오르의 머리에 한 방을 크게 먹였다. 이 계획을 모두 적어 아침에 보낸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카치안이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소년임은 알았으나, 황제는 그렇기에 더더욱 그를 이대로 그 자리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페토 가를 이용하여 키시아르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고, 그것을 이용하여 디아카 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 비록 그 시도는 실패했고 이후 몇 달이나 칩거하며 광증에 가까운 발작을 해 댔다지만 그가 죄인으로서 법정에 선 일은 없었다.

그건 그가 그런 일을 저질렀음에도 디아카가 결국 황태자 대신 아래에서 일을 했던 이들을 내세워 대신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물 위에서 아페토 가가 각성자들을 대상으로 저질렀던 끔찍한 실험에 대한 재판이 크게 벌어지고 있을 때, 물밑에서는 황태자를 대신해 죽을 이들이 빠르게 자백을 했다.

모든 일은 황태자가 아닌 자신들이 했다는 실체 없는 자백. 그리고 손댈 틈도 없이 일어난 감옥 속 의문사와 빠른 사건 종결.

디아카가의 손이 닿은 이들을 움직여 빠르고 조용하게 처리된 이 일 덕분에 공식적으로 황태자는 살인자가 아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황태자가 암살 미수를 당한 일과 아페토 가의 가십만을 기억했다.

하지만 죄지은 자가 그 죄를 다른 이들에게 덮어씌우고 벗어났다 해서 죄인이 아니게 되는가?

카치안 라 오르가 키시아르를 살인자로 만들어 버리려 한 것이 없던 일이 되는가?

아니다.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자리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태자조차 그것을 알고 있기에 한번 벗어나려 했던 디아카의 보호를 거부하지 않고 잠자코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속내야 어떻든, 황태자는 겉으로 자신이 죄인이 아니며 그저 잠시 몸이 아팠다가 회복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키시아르나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 흔한 유감의 뜻조차 공식적으로 내비친 일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궁 안으로 도망친 채, 여태까지 화만 냈을 뿐이다.

그리고는 참으로 당당히도 황제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읽어 내려 드는 탐욕스러운 시선이라니.

그건 카치안이 황제와 키시아르를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자기 자신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생각할지 몰라도 디아카의 손에서 자라난 이가 어찌 황제를 우습게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카치안은, 그리고 디아카는 여전히 방심하고 있다.

그들이 진심으로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카치안이 오늘 키올레만 데리고 디아카 가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이 자리에 오지는 않았을 터다. 그가 미리 말을 했다면 디아카 공작은 결코 카치안을 이 자리에 보내지도, 키올레만 동행시키지도 않았을 터였다.

거기에 더하여 키올레를 대하는 카치안의 태도에서 그가 아직 디아카를 버릴 수 없는 처지임에도 내심까지 완전히 굽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황제는 오늘이 몹시 기꺼웠다.

황태자가 오만하게 굴지 않고 디아카의 손안에서 얌전히 만족하고 있었더라면 파고들 틈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카치안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황제는 그 소년이 어떤 사람인지를 재차 확인했다. 그는 아직 혼란 속에서 표정과 눈빛까지 완벽하게 가리지 못할 정도로는 어렸고, 때로 그런 눈빛은 백 마디 말보다도 많은 걸 상대에게 밝혀 주는 법이었다.

카치안의 죄는 이미 무겁다.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더 죄를 지을 수 있을 자였다.

아마도 키시아르는 이것을 확인하고자 카치안을 굳이 부른 것이리라.

황제의 눈빛이 말없이 키시아르를 향했다.

서로 닮은 시선들이 짧은 침묵 속에서 뜻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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