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화
결코 화기애애해질 수 없을 황실 가족들의 저녁 식사 자리는 겉보기에는 제법 평화로워 보였다.
각자의 선호와 건강을 섬세하게 고려하며 만들어 낸 황궁 요리사의 걸작들이 줄지어 식탁을 채웠다. 본의 아니게 동행자로서 뒤에 시립해 있다 보니 유더는 황가 식구들의 음식 취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 몸이 덜 회복된 황제는 위장에 부담이 없고 부드러운 음식을 주로 먹었고, 황후는 꽃으로 장식한 야채와 과일 위주의 담백한 요리를 좋아하는 듯했다. 카치안은 편식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몇 개의 요리에만 조금씩 손을 댔는데, 유더가 알기로 그에게 그런 성향은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정해진 몇몇 음식만을 섭취하고 있다는 건…….
‘아닌 척하면서 완벽하게 경계하고 있군.’
키시아르는 카치안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가리는 음식이 없었으며 모든 음식을 적당하고도 우아하게 섭취할 줄 알았다. 누군가는 음독 암살이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멍청한 자라 저리 겁도 없이 먹어 댄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유더가 보기에는 그 반대였다.
키시아르는 무언가를 노리고서 평소보다 더욱 과감하게 식사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가 노리는 그 대상은 아마도, 카치안일 터였다.
‘대체 어떤 반응을 보려고 이렇게 나오는 걸까.’
유더가 남몰래 궁금해하고 있던 그 순간, 카치안 라 오르는 무표정 아래로 극도의 불쾌함을 삼키고 있는 중이었다.
“황제 폐하. 이 삶은 닭 요리가 제법 부드러워 맛이 좋습니다. 폐하의 입맛에도 맞으실 듯한데 조금 드셔 보심이 어떠시겠습니까.”
“좋다. 공작이 그리 권한다면.”
“황후 폐하. 지금 드시는 샐러드 소스에 이 헤차를 한번 더해 보십시오. 전에 서부에서 그리 먹어 보니 풍미가 한층 더해져 좋더군요.”
“그런가요? 서부식 요리는 잘 모르지만 펠레타 공작의 추천이라면 믿을 수 있겠어요.”
황후에게서 태양궁의 식사 자리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온 건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카치안은 그 연락의 진의를 처음에 조금 의심했으나, 황제가 조금 멀쩡했던 때에는 몇 번인가 이런 자리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확철 축제 때도 본래는 식사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지. 결국 취소되었었지만.’
취소된 이유는 물론 그가 덫을 놓아 저세상으로 보내 버렸던 아페토 가의 머저리 때문이었으나 카치안에게 그 부분은 그리 의미가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건 오로지 그 이후 자신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암살 미수와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고통의 나날뿐이었으므로.
황제의 상태가 이전에 비해 더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나빠진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키지 않아도 디아카라는 보호막을 둘러야만 했다.
다행히도 황태자의 감시자로 붙여진 키올레 다 디아카는 디아카 공작과 달리 이용하기 몹시 쉬운 멍청이였다. 카치안은 그자가 부모 몰래 남색을 하고 있다는 약점을 쥔 상황이었기에 거리낌 없이 그를 동행자로 골랐다.
하지만 식사 자리에서 본 이 상황은…… 도무지 그가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기가 수월치 않아 보였다.
“……콜록, 콜록.”
“폐하! 괜찮으십니까? 여기 물을…….”
“나는 괜찮습니다, 황후. 닭고기 속에 아주 우연히도 짐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렉 소스가 들어 있었던 것뿐이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정말인가요?”
“정말입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그만 그 사실을 깜박 잊었습니다. 하지만 렉 소스는 몸에 좋으니 부디 걱정은 마십시오.”
키시아르가 권한 닭 요리를 먹던 황제가 별안간 기침을 해 대어 황후가 기겁을 하는 모습을 보며 역시 죽을 때가 다 된 건가 했더니, 고작 입에 안 맞는 소스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
키시아르는 입가를 닦아 내고 안색이 한결 창백해진 황제를 향해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뻔뻔한 발언을 일삼았다. 카치안은 그가 황제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인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황제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으나 그는 아우를 크게 혼내지 않고 물만 한 잔 더 마셨다.
황제는 초췌한 얼굴로 식사 도중 시종장을 불러 어떤 약을 한 알 먹었고, 이후에는 전보다 조금 더 의욕적으로 식사를 했다.
약을 먹는다는 건 몸이 좋지 않다는 뜻인데, 식사량이 전보다 늘었다는 건 건강의 표식 쪽에 더 가깝다. 도대체 황제는 어떤 상태인 것일까. 모두가 저를 놀리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들어올 때까지 잘 억누르고 있다 생각했던 병증이 도지는 듯했다.
불안하다. 잔에 비친 얼굴에 또다시 징그러운 붉은 흉터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 노력해도, 저토록 선명히 보이는 것을 어떻게 가짜라고 여길 수 있을까.
카치안의 시선이 투명한 잔 너머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주 오래전, 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던 시절 들었던 목소리가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금발, 그리고 붉은 눈. 틀림없군. 색은 좀 더럽지만 피부가 깨끗하니 이 정도면 괜찮아. 잘 관리하도록 해라. 그것이 네가 앞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무기가 될 테니…….’
황가의 피가 짙게 발현되었다는 가장 큰 증거와도 같은 머리와 눈.
그리고 누구도 밟지 않은 눈처럼 깨끗한 피부.
그중 하나라도 잃어서는 안 된다……. 단 하나라도…….
미간을 찡그리며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은 순간, 불현듯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카치안은 웃고 있는 키시아르의 등 뒤에 시립한 채 자신을 보고 있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를 보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을 마주한 순간, 머릿속을 스멀스멀 파고들던 목소리들이 일제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더. 유더 아일…… 남작.’
그의 어두운 눈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처럼 아주 기분 나쁜, 그러면서도 사람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시선이었다.
사실 파티 때 보았던 그 사내를 여기에서 또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내와 함께 황궁에서 춤을 추는 전대미문의 일을 일으킨 펠레타 공작이 이런 자리라고 자신의 염문 상대를 빼놓고 올 리 없으니까.
카치안도 귀가 있었기에 유더 아일이 펠레타 공작의 보좌이자 정부라는 소문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단히 우습다 여겼다. 하지만 파티에서 펠레타 공작의 품에 안겨 춤추는 사내를 보았을 때, 그리고 그자가 디아카 공작 앞에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대들었을 때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평민 출신 주제에, 그자는 마치 펠레타 공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게 당연한 자처럼 보였다. 디아카 공작조차도 그자의 앞에서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처럼 불쾌함을 드러내며 망신을 당했다. 그건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유더 아일의 능력은 태양궁에 전시된 거대한 몬스터의 머리로 이미 증명된 바다. 하지만 그 밑도 끝도 없이 당당한 태도도 그 능력의 일환일까? 아니면 숨겨진 무언가를 더 가지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카치안은 그에게 깊은 흥미를 느꼈다.
만약 그자를 손에 넣는다면 어떨까.
오늘 같은 장면을 이번에는 제 손아귀에 넣고 흔드는 채로 볼 수 있다면.
그렇다면 눈엣가시 같은 펠레타 공작도, 숨통을 조이는 디아카 공작도 모두 짓밟고 올라설 수 있지 않을까?
절로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자였다…….
“-황태자 전하.”
그때, 키시아르가 카치안을 불렀다. 도저히 쳐다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기이한 무게를 지닌 목소리였다. 동시에 아주 짧은 시간 마주쳤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카치안을 보고 있지 않았던 듯한 모습이었다.
“방금 제가 한 질문에 언제 답해 주실 것입니까.”
키시아르가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카치안은 그가 무어라 했었는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조금 당혹했다. 뒤에 시립한 키올레를 돌아보았으나 그는 주군이 왜 쳐다보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자가 호위기사라고.
카치안은 이를 갈며 정중히 대답했다. 어쨌든 식사 도중 한눈을 판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미안하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무어라 했었습니까.”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그리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전하께 이 자리가 그리 흔쾌하지 않으리란 건 예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너무 지루한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군요.”
교묘하게 스스로를 낮추며 상대를 공격하는 이런 방식을, 펠레타 공작이 쓸 줄 알았던가?
카치안의 마음속에서 의심과 불쾌한 감각들이 요동쳤다.
그는 다른 모든 이들이 펠레타 공작을 우습게 여길 때에도 결코 경계를 놓은 적이 없는 이였다. 키시아르 라 오르의 겉모습을 보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기는 하나 그게 그 남자의 전부는 결코 아니다.
카치안은 황태자가 된 뒤로 궁인들에게서 황제와 키시아르가 황자였던 시절의 이야기를 알음알음 접해 왔다. 세간에서 키시아르를 방탕한 망나니라 평하는 것과 달리, 오래된 궁인들은 ‘공작이 되신 둘째 황자님’에 대해 절대적인 어떤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궁 안의 사람이 아닌 다른 이들은 말해도 믿지 못할, 그들만의 그 기묘한 믿음.
새로운 황제가 되기 위하여 길러지고 벼려진 소년의 날카로운 감각은 궁인들만의 그러한 연대감 속에서 위기감과 패배감을 줄곧 느껴 왔다. 펠레타 공작을 제대로 만나기도 전부터 그러한 감각을 너무나 많이 겪었기 때문일까. 카치안은 키시아르를 실제로 만난 이후에도 때로 그가 진짜로 아무 생각이 없는 자는 아닌 것 같다는 예감을 느낀 적이 많았다.
디아카 공작이 아무리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도 그 예감은 결코 시드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 그 예감은 마치 꽃을 피운 듯 만개하여 새빨간 빛을 내는 중이었다.
불안하다. 오늘의 이 자리에 참석한 게 정말 잘한 일일까?
‘전하. 심려치 마십시오. 그 무엇도 전하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타고난 강인함이 전하의 심장에 깃들어 있음을 기억하시고, 당당히 맞서십시오. 저를 믿어 주신다면 전하께서 얻고자 하시는 바가 모두 그 손에 깃들 것입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카치안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카치안이 이곳으로 오는 데 큰 도움이 된 치료사의 목소리였다. 아주 느리고 공손한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 카치안의 마음은 놀랍도록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마음이 조금 느슨해지며 이곳에 자신이 온 이유만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그래. 무엇도 나를 흔들 수 없다.’
아직 그 어떤 상황도 그에게 완전히 불리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카치안은 직접 입을 열어 묻기로 했다.
“저…….”
“폐하. 이것이 마음에 드신다면 다음에는 제가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때마침 키시아르가 끼어들어 황제에게 무어라 말을 걸었기에 카치안의 첫 시도는 불발되었다.
“죄송합니다만.”
“음, 아까 공작의 말대로군요. 괜찮은 듯해요.”
카치안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황후가 키시아르에게 무어라 대답을 했기에 또다시 묻혀 버렸다. 기가 막힌 시기였다.
‘……빌어먹을 펠레타 공작! 이게 일부러가 아니라고?’
어이가 없어 짜증이 났다. 카치안이 막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이려던 순간,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 전하. 뭔가 말씀하시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요.”
카치안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분위기를 억지로 붙잡아 오기 위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는 오늘 황후 폐하께서 갑작스럽게 식사 제의를 하시기에, 이런 자리에서 하셔야만 할 말씀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 염려하였었습니다. 얼마 전 두 분 폐하께서 공식 자리에 함께 여러 번 나오셨던 일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저의 염려가 지나쳤다면 그것으로 좋습니다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면 왜 불렀느냐고 조금 불쾌한 티를 내며 물으려 했다.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황제의 건강 문제를 캐내기 위한 질문들을 이후로도 몇 개쯤 더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케일루사 황제는 경험상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나, 상대적으로 마음이 여린 황후는 공격하기 쉽다. 최대한 쉽게 답을 얻어 낼 수 있도록 그쪽을 노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카치안의 맞은편에는 황후가 아닌 키시아르가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완벽하다 여겼던 머릿속의 말들이 그 붉은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허를 찔린 듯 흩어졌다.
키시아르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본능적인 두려움이 카치안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스산하고도 압도적인 어떤 감각이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 그는 순간적으로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입을 다문 스스로의 선택에 의문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왜 말씀을 하다 마십니까?”
웃는 얼굴로, 펠레타 공작이 카치안을 향하여 다정하게 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