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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78화 (578/805)

578화

“그 정도 반응이면 나쁘지 않아. 최근 일들을 통해 마병단의 필요성을 가장 많이 느꼈을 사람이니 끌어들이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네게 몹시 호감을 품은 모양이라 그건 좀 유감이군.”

재상의 반응이 나쁘지 않은 건 오히려 다행인데, 유더에게 호감을 품은 게 유감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 그녀의 호감을 받게 되면 이번 일에 무슨 문제가 생길 여지라도 있는가?

‘재상이 내게 보인 호감은 그저 자신이 할 일을 줄여 주어 고마워하는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혹시 무언가 눈치채지 못한 이면이라도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찰나, 키시아르가 짐짓 엄숙한 얼굴로 장난스럽게 답을 알려 주었다.

“내 보좌가 너무 매력적이라 이직을 하라고 권유하는 이가 하나 더 늘면 어쩌나 정말 걱정이 돼. 그렇지 않아도 재상은 묘하게도 연하의 남녀에게 몹시 인기가 많은 사람이거든.”

“……그렇습니까?”

“그렇다니까.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젊은 시절의 어느 해에는 수도 사교계에 막 데뷔했던 젊은이 모두가 재상에게 고백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더군.”

유더는 아까 보았던 재상의 모습을 새삼 떠올려 보았다. 유독 연하에게만 인기가 있었다던 그 매력이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동년배의 다른 이들에게서 찾기 힘든 차분하고 단단한 분위기가 있었던 듯도 했다. 하지만 그저 그뿐이다.

사실 유더가 재상에게서 느낀 가장 특이한 부분은 다른 데 있었다.

‘키시아르와 이전부터 크게 가까웠던 사이는 아닌 듯 보였는데도 공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놀라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일절 보이지 않았지.’

키시아르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가 지능이 낮고 도무지 진지한 법이 없는 호색한이라는 소문을 제일 먼저 떠올리기에 그가 조금만 그와 다른 모습을 보여도 깜짝 놀란다. ‘똑똑한 이야기’를 내뱉는 키시아르는 그저 케일루사 황제의 뜻을 그대로 읊는 것뿐이라 여기기도 했다.

서부에서 만난 귀족들도 그랬고, 심지어 아까 율법학자들을 만났을 때도 개중 나이가 젊어 보이는 몇몇은 적응이 영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걸 얼핏 보기도 했다.

마병단의 규범을 만드느라 키시아르를 이전에 만나 보았을 이들조차 그러한 생각을 하는 걸 딱히 숨기지 않는데 재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이야기를 나누던 초반에만 조금 키시아르를 관찰하듯 보았을 뿐, 나중에는 그런 기색조차 없이 평온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명석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키시아르 라 오르의 모습이 그의 본연임을 확실하게 이해했거나, 혹은 놀랐지만 드러내지 않는 능력이 특출하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상당히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재상이 내게 이직 권유 따윌 할 것 같진 않지만.’

유더는 그 생각을 정리하여 짤막하게 입에 담았다.

“재상께서 인기가 많은 분이든, 아니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를 그렇게까지 가치 있게 보아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걱정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본론은 가장 마지막 부분이었다. 그러나 키시아르의 귀에는 ‘그렇게까지 가치 있게 보아 주어서 감사하지만’ 부분만이 크게 들린 듯했다.

“보좌가 그렇게까지 가치 있는 이가 아니면 누가 가치 있는 이가 될 수 있지? 널 끌어들이려 연락을 보내온 셀 수 없이 많은 귀족들과 넬라른의 왕자, 황제 폐하께서 들으면 참으로 기막혀할 말이 아닌가. 이럴 수가. 보좌가 이토록 스스로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려 드는 건 누구의 탓이지. 단장인 내 탓인가.”

과장되게도 슬픈 목소리로 탄식하는 걸 보면 반쯤은 장난인 듯했지만 유더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 박자 늦게 겨우 떠오른 답을 입에 담았다.

“어쨌든 저는…… 마병단에서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이제 유더에게 ‘지금’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

조금 더 장난을 치려는 듯했던 사내의 말이 그 직후 뚝 멎었다.

“……단장님?”

“그래. 그렇지.”

때마침 조금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커튼을 살짝 젖혔다. 틈새를 타고 들어온 햇살이 때마침 창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유더의 얼굴 위로 시리도록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린 유더의 시야에 문득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사내의 입술 끝이 스쳤다.

“하지만 알면서도 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네가 마병단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어땠을까. 분명히 어디서든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냈겠지. 그럴 수 있는 이니.”

“단장님.”

“아, 물론 내게는 지금이 최고이니 불만은 없네. 그냥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는 거지.”

어째서일까. 분명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표정일 텐데도 오히려 왠지 모르게 색을 잃은 듯 보였던 것은.

“자. 그러면 이제 다음 장소로 향할까?”

***

슈덴 상단의 수도 지점은 상단들의 중심지인 칼 로르윅 거리의 중심가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건물 규모는 작았으나 소수의 귀중품을 주로 취급하는 상단답게 외양의 호화로움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유더는 얼굴을 평범하게 변용하는 마법이 걸린 팔찌를 찬 키시아르와 함께 당당히 그곳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 으응?”

인사를 하던 이가 키시아르를 들여다보다 눈을 크게 떴다.

“이런. 귀하신 손님께서 오랜만에 오셨군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다른 분과 함께 오셨습니까?”

유더를 처음 보는 이가 대부분 그렇듯, 상단의 직원 또한 이 새카맣고 창백한 남자에게서 약간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 듯했다. 키시아르가 웃는 얼굴로 유더의 허리를 끌어당겨 머리를 옆으로 폭 기댔다.

“어쩐 일이라니. 같이 올 만한 사이라서 같이 온 거지.”

“아…….”

직원은 순식간에 태도를 뒤집었다.

“알겠습니다. 소중한 분께 드릴 선물을 사러 오셨군요? 그거라면 이번에 들어온 좋은 물건이 있는데…….”

“아니. 그건 다음에 하고, 쥬스틴 부인은 어디 있지?”

“부인을 찾으십니까? 그분께선 마침 오늘 아침부터 약속이 있다며 계속 나와 계십니다. 아, 설마……?”

“그 상대가 나야. 안내해 주게.”

“오, 물론이지요.”

직원이 서둘러 그들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가장 호화로운 문을 열자 화려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온갖 진귀한 물건들로 꾸며진 공간에 앉아 보석을 들여다보고 있던 젊은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드디어 오셨군요.”

그녀는 상단의 관리인이라기보다는 사교계를 주름잡는 맹수처럼 화려한 사람이었다. 취한 것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만드는 목소리와 틈 없이 완벽하게 꾸며 올린 머리칼, 세공품처럼 공들여 손질된 손톱 등에서 그런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름다운 도자기 인형처럼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길 만한 사람이나 유더는 그녀의 외견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느낀 건 이 공간을 채운 향수 냄새가 상당히 낯익다는 사실이었다.

‘예전에 키시아르가 밖에 나갔다 돌아오고는 했을 때 주로 맡았던 향과 같은 것 같은데…….’

심지어 유더는 이번 생에도 그 향을 한번 맡은 적이 있었다. 마병단에 막 들어와 키올레를 혼쭐내 주고 나서 키시아르에게 한 소리를 들으러 단장실에 방문했던 때의 일이었다.

이맘때쯤 귀부인들에게 유행했던 향수 냄새를 맡고서 떨떠름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머리를 스쳤다. 이후로는 이 향수 냄새를 맡은 적이 없었는데, 혹시 그때의 키시아르는 여기에 들렀었던 것인가?

“…….”

순식간에 이전보다 배는 날카로워진 유더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듯 키시아르가 미소와 함께 속삭였다.

“부인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네.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분입니까.”

“여기서 나를 단장이라고 편히 불러도 될 정도로.”

키시아르의 표정은 그저 평온했다.

“이전에 레블린 공자를 만나러 갈 때 내가 슈덴 상단의 신분패를 가지고 있었던 걸 기억하나? 수도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위한 가짜 신분과 필요한 물건들을 여기서 자주 제공받았지.”

“때로는 제 하인 노릇을 하시며 파티에 직접 잠입하시기도 했었지요.”

그사이 안쪽 방에서 두 개의 크고 작은 상자를 들고 온 부인이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며 말을 보탰다.

“그건 정말 귀찮고 스릴 넘치는 일이었답니다. 아일 남작님. 이야기만 듣다가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기쁘군요.”

“제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믹 단장이 그토록 이야기했는데 모를 리가요. 헬렘 님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들었는데, 직접 뵈니 확실히 그럴 만하네요.”

“쥬스틴. 가져온 물건은?”

키시아르가 그녀의 말을 웃으며 잘랐다. 쥬스틴 부인 또한 웃으며 대답했다.

“부탁하셨던 것들은 여기 모두 준비해 두었답니다. 확인 후 가져가시기만 하면 되죠.”

부인이 자리에 앉아 테이블에 놓은 상자를 개봉했다. 제일 먼저 개봉한 것은 작은 상자 쪽이었다.

열린 상자 안에서 튀어나온 물건은 손바닥만큼 작은 거울 형태의 마도구였다. 아주 오래된 물건인지 곳곳이 변색되었고 금이 간 부분도 있었다.

“진실을 비추는 거울. 틀림없는 진품이에요.”

키시아르는 그것을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그의 손에 마력이 살짝 어린 순간 유더의 혜안 안쪽이 꽉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에서 금빛이 흘러나오지는 않았으나 유더는 키시아르가 들고 있던 마도구 주변에서 기운이 일렁이는 듯한 모습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저건, 마력?’

설명 없이도 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작디작은 낡은 마도구가 품고 있는 마력은 생각 외로 대단했다.

“그래, 진품이 맞군. 수고했네.”

마도구를 모두 살핀 키시아르가 그것을 도로 상자에 넣었다. 유더는 그다음에 개봉할 상자에서도 비슷한 마도구가 나올 줄 알았지만 등장한 건 예상외의 물건이었다.

“주문하셨던 검집입니다. 유칼락티움 검날을 견뎌 낼 수 있도록 라다만티움에 마법을 걸었고, 최고급 시약으로 가죽을 적셔 세공했어요. 박힌 보석은 미리 보내 주셨던 것들과 더불어 어울리는 것들을 조금 더했습니다.”

쥬스틴 부인이 검은색을 띤 긴 검집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겉보기에 크게 화려해 보이지는 않지만 이보다 비싼 검집이 이 시대에 또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정확히 원하신 대로지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검집은 얼핏 겉보기에는 검은 칠이 되어 있어 그리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잘 보면 검집이 닫히는 부근에 박힌 붉은 보석은 유더에게 몹시 낯익은 물건이었고, 그 주변을 두른 가느다란 금빛 선과 자잘한 보석들은 절제 있고 우아하게 빛났다.

저 검집에 박힌 붉은 보석은 본디 키시아르의 신검 검집에 박혀 있다가 유더에게 왔던 물건이다.

본래는 유더가 사용했던 검집 내부의 홈에 박혀 있었지만 서부에서 거대한 몬스터와 싸우다가 부서졌을 때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던 그것이 여기에 도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 검집을 수습해 간 이후로 돌려주지 않아서 그냥 회수한 줄 알았었는데.’

유더는 임시 검집에 잠들어 있을 제 검을 떠올리며 말없이 눈앞의 새로운 검집을 응시했다. 쥬스틴 부인에게서 검집을 받아 들어 살피던 사내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자. 새 검집이네. 주문은 서부에서 넣었었지만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 시간이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어.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드냐고?’

이건 들고 말고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최고였다.

유더는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키시아르가 건네준 검집을 받았다. 이전에 사용하던 검집보다 더 단단한데도 무게는 오히려 가벼웠다.

“……마음에 듭니다.”

“그 어떤 보석과 옷을 주어도 웃지 않던 이가 드디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군.”

“다행이군요. 혹시 뭔가 잘못 만들었나 고민할 뻔했답니다.”

유더를 처음 보는 쥬스틴 부인은 아무래도 무표정한 얼굴 앞에서 작은 오해를 했던 듯했다.

“이번 검집은 검 대신 들고 휘둘러도 전처럼 쉽게 부서지지 않을 거야.”

유더의 손에 들린 검집을 바라보는 사내의 목소리가 나직이 귀를 두드렸다.

“당연히 그럴 만한 일이 없도록 하는 게 먼저겠지만 말이네.”

“……예.”

유더는 그의 눈 속에서 서부가 남긴 상흔을 읽어 냈다. 검집을 꽉 쥔 손 안쪽이 뜨거워졌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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