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화
키시아르의 말에 귀를 의심한 건 마르키오를 비롯한 율법학자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율법학자들을 만나 무엇을 하려 할지 얼추 예상해 보았던 유더도 생각보다 훨씬 거침없는 그의 발언에 몹시 놀랐다.
‘각성자 관련 법들을 이렇게 빨리 만들겠다고? 그게 가능한 건가?’
이전 생에서는 유더와 마병단이 공을 세우고 돌아오거나 각성자 관련 사건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필요하다 판단된 규칙이나 법이 조금씩 추가되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런 일 정도를 하지 않고서는 제국법을 건드리기가 아주 어려웠다는 뜻이었다.
마병단 규범 정도야 얼마든지 쉽게 추가하고 뺄 수 있다. 그렇지만 제국법은 그 무게가 다르지 않은가. 아주 오랜 세월 유지되어 온 제국법은 기존의 항목에 예외 조항을 추가하는 건 쉬워도, 아예 새로운 항목을 만드는 건 엄청나게 어렵다고 들었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법 제정을 이야기할 생각이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키시아르도 아무런 가능성 없는 일에 무작정 뛰어드는 이는 아니다. 그가 지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 그래서 가능해지기만 한다면…… 오히려 법 제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었다.
‘그래…… 마병단원 수가 적고 세력이 아직 조금 약한 게 문제일 뿐, 시기는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둘 모두 곧 해결될 사항이고 뒤를 받쳐 줄 황제도 이제는 건강해졌으니까.’
세력이 약해도 온갖 곳에서 무시를 당하니 문제가 생기지만, 강해지면 또 강한 대로 견제를 당해서 원하는 바를 얻기가 힘들다.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지금 정도가 어쩌면 적기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저 율법학자들이 과연 도와줄지가 문제겠지.’
율법학자들은 키시아르의 터무니없는 말에 기가 막힌 것 같았다. 마르키오의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보며 유더는 그가 혹시라도 키시아르에게 달려들면 즉시 제지할 수 있도록 한 발짝 앞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르키오는 화를 내지 않았다. 깐깐한 얼굴의 학자는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린 뒤 딱 하나를 물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전하께서 원하시는 법은 정확히 어떤 것입니까.”
키시아르가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자, 받게. 내가 열심히 작성한 목표 법안의 초안 구성과 그것을 뒷받침할 마병단 규범 목록이네.”
‘대체 언제 준비한 거지?’
키시아르와 식사를 하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가 이런 물건을 가져온 줄은 몰랐던 유더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종이를 펼쳐 읽던 마르키오의 미간 또한 몹시 좁아졌다.
“각성자의 처우와 관련된 법이 중점이로군요.”
“그간 마병단이 활동하는 동안 실제로 규범을 적용하여 얻은 사례들이 충분하니 새로운 법안 제안서를 꾸미는 덴 지장이 없을 거야. 자네들은 그저 최대한 근거를 정리하여 제출만 도와주게.”
“그 근거 정리가 어려운 건 둘째치고…… 여기 2성 발현 각성자의 발정기 관련 조항, 관혼상제 및 자식 양육과 상속에 대한 조항 등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큽니다. 재상께 제출한 이후에도 새 법안이 확정되기까지 거쳐야 할 산이 수도 없이 많으신 건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신전과 마법사학회 측의 검토와 승인도 거쳐야 합니다.”
마르키오가 짚어 낸 부분들을 들은 다른 율법학자들이 작게 웅성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들이었다.
“알지. 나도 당연히 자네들에게 그 모든 걸 맡기지는 않을 거야. 각오는 충분히 하고 시작하는 일이니 걱정 말게.”
“후우…….”
마르키오가 또다시 얼굴을 쓸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주변의 다른 율법학자들을 쳐다보자, 그들 사이에서 시선이 오갔다. 마치 서로의 속내를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한참 뒤 그들은 일제히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미 마음을 정하신 듯하니 이 늙은 몸이 무어라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다만 아주 힘든 싸움이 될 것입니다.”
“법과 관련된 한 세상에 힘들지 않은 싸움 같은 건 없네, 마르키오. 자네가 했던 말인데 기억나지 않나?”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아 억울해서 참을 수 없으니 바꾸고 싶다며 여기까지 찾아오셨던 어린 황자님께 드린 말씀이었지요.”
마르키오의 말에서 뼈가 느껴졌다. 그러나 날카로운 가시와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키시아르는 그게 자신을 지칭하는 이야기임을 알 텐데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서 웃었다.
“시조의 뒤를 이으신 아칼란 황제께서 마법사에 대한 법을 새로이 제정했을 때도 수많은 반대들이 있었다지. 하지만 그분께서는 결국 해내셨고 그 법은 제국법에 영원히 남아 모두에게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네. 선례가 있고 없고가 중요하다면 우리는 이미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셈이야. 그렇지 않나?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야.”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전의 법에 존재하지 않았던 특정 분류 인간들에 대한 항목을 새로이 만든다는 상황 자체는 아주 비슷하지.”
“…….”
“각성자는 이미 존재하는 이들이고, 앞으로 더욱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지는 않을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로 나아갈 젊은이들이, 태어날 아이들이 새로운 각성자가 되겠지. 나는 황제 폐하를 모시는 신하이자 각성자인 마병단장으로서 법이라는 가장 작은 울타리조차 없이 그들을 제국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네.”
법이란 가장 작은 울타리.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묘하게도 유더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마르키오 또한 그 말을 듣고서 처음으로 뚱한 표정 대신 눈썹을 팔자로 누그러뜨렸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긴 한숨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마병단을 만들 테니 그때가 오면 규범을 만드는 걸 도와 달라 하시던 때도 그렇더니, 도무지 이 늙은이들이 거절을 할 수 없게 만드시는군요. 후우. 알겠습니다.”
“고맙네. 자네들만 믿지.”
마르키오는 그 감사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사라졌다. 한시라도 빨리 키시아르와 떨어지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더의 인식은 그를 처음 봤을 때와 조금 달라졌다. 이곳에 있는 율법학자들은 피로에 찌든 얼굴로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일을 하고 있으나 자신들이 해야 할 일 앞에서는 결코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2성 발현자와 관련된 법을 제대로 만들겠다는 뜻을 보고도 놀라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토로하지 않고 평정심을 지켰다는 건 보통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병단이 처음 생길 때부터 규범을 만드는 걸 도왔다고 했었지.’
키시아르가 왜 이 일부터 처리하려 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법학자들은 본래 그 어떤 일에도 쉽게 확언을 하지 않지. 어렵다고 말했지만 불가능하다고도 하지 않았으니 걱정 말게. 저래 보여도 다들 법전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거든. 지금쯤 옛 법과 사례를 찾아볼 생각에 몹시 흥분하는 중일 거라는 데 돈도 걸 수 있어.”
유더가 사라진 마르키오의 뒷모습 쪽을 계속 보고 있는 이유를 오해했는지, 키시아르가 별안간 말을 걸었다.
“걱정되어서 보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래?”
“시일이 좀 빠르긴 하지만, 생각해 보니 어쩌면 지금이 적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그 종이는 대체 언제 다 쓰셨습니까? 어제는 분명 잘 주무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법안 계획 자체는 평소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리 어렵지 않았네. 무엇을 써야 할지 확연히 알고 있다면 나머지는 그저 쓰는 속도에 달렸을 뿐이니까.”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뭘까. 이 미묘한 기분은.’
유더는 키시아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나 쳐다봐 주어 기쁘다는 듯 웃은 사내가 여유 만만하게 양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는 바람에 그 기분은 곧 사라졌다.
“…….”
“마르키오는 선황 때부터 여기에 있었던 이네. 믿을 만한 율법학자지. 법 조항의 해석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 않는 학자는 그와 이곳 학자들 정도뿐일 거라네.”
그래서 이곳으로 왔다고 그는 말했다. 유더는 아까 그가 들었던 인상 깊은 말을 떠올렸다.
“법은 가장 작은 울타리라고 하셨었지요.”
“아, 그건 마르키오가 좋아하는 유명한 율법학자 엘로토의 말이라네. 일부러 인용한 거야.”
잘 먹히지 않았느냐며 키시아르가 흡족하게 웃었다.
“예. 법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에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법이 모든 걸 다 정해 줄 수는 없네. 그러나 최소한의 울타리라도 쳐 둔 집과 아닌 집은 차이가 있어. 그걸 얼마나 잘 보수하고 지키느냐에 따라서도 물론 그렇지.”
옳은 말이다. 한 번에 울타리를 계획적으로 잘 만든 집과, 사고를 겪고 나서야 판자를 얼기설기 하나씩 박아 세우는 집도 물론 차이가 클 터였다.
그 사실이 유더는 몹시 마음에 들었다.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현 오르 제국의 재상, 헤브레이나 레이플랑은 율법학자들보다 두 배쯤 피로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녀는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보좌진이 가져온 검은 커피를 한 잔 털어 넣고 나서 겨우 살 것 같다는 숨을 내쉬었다.
그 뒤 제일 먼저 한 말은 유더를 향한 정중하고도 호의에 찬 감사 인사였다.
“그 유명한 아일 남작을 여기서 뵙게 되는군요. 지난번 파티에 참석했다면 거기에서 인사를 드리고 감사를 표했을 텐데 갑작스러운 일 때문에 그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대신 선물을 보냈었는데…… 혹시 받으셨습니까?”
수도로 돌아온 이후 유더에게 여기저기서 쏟아진 초대장과 선물들은 보낸 이의 의도를 귀신같이 파악하는 키시아르 선에서 대부분 검열되었다. 그러고 나서도 전달된 선물이 적지는 않았는데, 유더는 그것들을 대부분 서랍 안에 쏟아 넣은 채 다시 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재상이 보낸 선물 또한 그중의 하나가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
“……예. 감사했습니다.”
“서부에서 남작과 마병단이 해 준 일들 덕분에 우리 관리들이 할 일이 굉장히 많이 줄어들었지요. 그 몬스터가 혹시라도 마을이나 도시를 침범하기라도 했다면 뒷일은 상상하기도 싫은 사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여 진심을 담아 보낸 것이니 유용하게 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유더는 아무래도 돌아가는 즉시 재상이 보낸 선물을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재상은 그 이상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오전에 전하께서 제게 보내 주신 서신은 받았습니다. 제국 각지에 세울 지부의 위치 선정 관련으로 도움을 요청하셨지요.”
“그랬지.”
“원하시는 지역의 위치를 알려 주시면 해당 지역의 관리들에게 미리 소식을 전해 두겠습니다. 모두가 원하는 도움을 드릴 것이라 장담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그 정도면 충분하네.”
“예. 그러시다면.”
재상은 몹시 결정이 빠른 사람이었다. 키시아르는 그녀와 함께 서부에 감사를 위해 파견된 관리들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누고 나서, 문득 생각난 것처럼 아까 율법학자들과 나눈 새로운 법 제정 화제를 슬쩍 꺼냈다.
재상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게 반대의 뜻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유더는 그녀가 무슨 뜻으로 키시아르의 말을 듣고 있는지 속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현 재상은 이전 생에서는 카치안 황제 이후 얼마 버티지 않고 퇴임해 만난 적이 없어 영 모르겠군.’
카치안 황제 밑에서 오래 일하지 않았다지만, 그것만으로 그녀가 현 황제의 사람이라 장담하기도 어렵다. 그녀와 키시아르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지극히 공적이었기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모든 용건이 끝났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쁜 시간을 빼앗아 미안하게 되었네.”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 몹시 다정하고도 정치적인 미소가 오고 간 뒤 만남은 끝이 났다.
유더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마차에 올라타는 키시아르의 곁을 따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상께서 과연 이번 법 제정 건에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그 정도 반응이면 나쁘지 않아. 최근 일들을 통해 마병단의 필요성을 가장 많이 느꼈을 사람이니 끌어들이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네게 몹시 호감을 품은 모양이라 그건 좀 유감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