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잘 잤나?”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유더가 마주한 키시아르는 그야말로 전에 없이 반짝거리는 중이었다. 하필 날씨도 몹시 좋았던지라 가득 쏟아지는 햇빛을 받은 얼굴이 간만에 현실감을 의심할 만큼 빛이 났다.
유더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완벽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 그리 보지?”
“단장님이야말로 굉장히…… 잘 주무신 모양입니다.”
“나야 물론 아주 잘 잤지. 누구 덕분에 말이야.”
얼굴에서 이토록 빛이 나니 그 말을 의심하려 해도 의심할 수 없었다.
어제의 전술 게임이 효과가 있었다. 유더는 가슴 어딘가가 저릿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세면을 마치고 나왔을 때, 키시아르는 테이블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아침도 드시기 전부터 일을 하고 계신 겁니까?”
“일어나자마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머릿속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던지, 버틸 수가 없더군. 이런 감각은 각성자가 된 뒤 다시 깨어났던 때 이후로 처음이야.”
키시아르가 의욕적으로 작성 중인 종이의 내용은 유더가 있는 쪽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사내가 입술 끝을 요사하게 올려 웃었다.
“내가 오늘 무얼 할 생각인지 알려 줄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유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시아르의 곁으로 다가갔다. 기다렸다는 듯 뻗어 온 팔이 그의 손을 끌어당겨 무릎에 자연스레 걸터앉도록 만들었다. 유더가 거부하거나 도로 일어서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곧이어 세면 후의 물기가 남은 뺨과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이 떨어졌다.
“이 서신들을 다 쓴 뒤, 나는 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전서조를 보낼 거야. 그리고 나서는 나단을 불러 금서의 반납을 부탁함과 더불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전달하고 율법학자들과 재상, 그리고 관리들을 만나겠지. 그다음에는 간만에 수도의 슈덴 상단 지점에 들러 관리자인 쥬스틴 부인에게서 이전에 서신으로 주문해 둔 물건을 받아 올 테고, 저녁은 황궁에서 간만에 가족끼리 오붓하게 들게 될 거라네.”
가족끼리, 오붓하게. 유더는 그 단어들을 입에 올리는 키시아르의 눈빛에서 그 ‘가족’의 범위가 황제와 황후만 있는 게 아닐 것임을 직감했다.
‘카치안 황태자를 부를 셈인가.’
부른다고 과연 그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키시아르는 거절의 가능성은 생각지도 않는 듯했다.
“하루가 모자라시겠군요.”
“나뿐만이 아니라 보좌도 모자랄 예정이지. 벌써부터 즐거워지는군.”
유더도 데려갈 생각임을 그렇게 표현한 사내가 막 작성을 마친 종이 아래 달필로 서명을 남겼다. 사실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키시아르가 쥔 깃펜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 썼군. 보내기 전에 한번 읽어 보겠나?”
“제가 봐도 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좌가 보지 못할 것들은 여기에 하나도 없어.”
유더는 키시아르가 다 작성한 서신 중 하나를 집었다. 그것은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암호로 적혀 있지 않았기에 해독을 위해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어 빠르게 읽혔다.
몹시 진실된 문장들로 황제의 건강과 안부를 기원한 키시아르는, 길게 끌지 않고 그가 서신을 보낸 이유를 바로 언급해 두었다.
- 폐하께서 새로이 얻으신 빛을 조금 더 다루기 쉬우시도록 만들 좋은 방법을 오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듣고 나시면 분명 폐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장담합니다. ……또한 이전에 제안하여 주셨던 폐하의 다정하신 염려를 함께 받아들이고자 하오니, 부디 오늘 1궁에서 즐거운 저녁 식사와 함께 뵐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광휘궁에는 새벽궁에 계신 귀하신 분께서 연락을 전해 주실 것입니다.
황제가 새로이 얻은 빛은 당연히도 각성자의 능력일 터다. 그걸 다루기 쉽도록 만들 좋은 방법이란 아마도…….
“저를 황궁에 다시 데려가시려는 이유를 알겠군요.”
키시아르는 유더를 케일루사 황제의 능력 훈련 도우미로 추천할 생각임이 분명했다.
“본래는 좀 더 적응 기간을 둘 예정이었지만, 어제부로 이 일에 굳이 여유를 둘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했네. 황제 폐하께서 능력의 빠른 발전을 몹시 필요로 하고 계신 것도 한 이유지. 괜찮겠나?”
“어차피 단장님께서 맡겨 주시지 않는다면 제 쪽에서 부탁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마병단의 훈련 계획을 모두 맡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도 각성자의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적임자를 두고 그럴 리가.”
서신에 쓰인 다음 문장들도 대부분 뜻을 해석하기 쉬웠다.
태양궁 1궁에서 하는 저녁 식사는 전통적으로 오르 황제의 가족 구성원이 모두 모여야 하는 자리를 뜻한다. 아까 키시아르가 돌려 언급한 대로 그는 오늘 카치안의 얼굴을 사적인 자리에서 반드시 확인할 생각인 듯했다.
‘케일루사 황제도, 황후도, 그리고 본인도 없었던 세계에서 누가 왕이 되었을지는 듣지 않아도 뻔하니 당연한 일이겠지.’
이전까지만 해도 키시아르는 카치안 황태자에 대해 그다지 크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태도가 바뀐 건 어제의 이야기가 키시아르에게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였다.
그는 유더의 이야기를 믿는다.
그 사실이 이 갑작스러운 황가의 저녁 식사 제안을 통해 새삼스럽게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유더는 심장 어딘가를 찌르듯 간지럽히는 감각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이 부분…… 이전에 제안받으셨다는 다정한 염려는 무엇입니까?”
“아, 그건 별것 아니야. 폐하께서 건강을 되찾고 너무나 의욕이 솟으셨는지, 본래 내가 수도에서 하고 있던 일들을 모두 폐하에게 맡기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우선해도 좋다는 제안을 하셨었다네.”
“하고 싶은 일이라면…….”
“마병단 일이지. 그때는 벌써 그럴 필요는 없다 말씀드렸었지만…… 곧 있을 마병단 2기 모집과 지부 설립 발표 시기를 내일로 당기기로 마음먹은 참이니 그냥 철없는 동생처럼 폐하의 배려를 받아들여 볼까 싶어서 말이야.”
“……죄송합니다만, 내일이라고 하셨습니까?”
유더는 순간 제가 무엇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키시아르의 웃는 얼굴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그래. 내일.”
“…….”
“그리고 어쩌면 본래의 계획과 달리 지부 설립을 위해 내가 직접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군.”
본래 마병단 지부를 만들고 새로운 단원을 모집하는 일은 해당 지역 출신 단원들을 위주로 하여 파견 형태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유더는 그간 파티를 준비하는 사이사이 키시아르가 그 일을 잊지 않고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사실 적합한 단원들을 골라내고 파견 준비를 하는 것 자체는 쉬웠으나,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지부를 세워야 할 지역의 영주 귀족들이었다.
영주 귀족들은 대개 오랫동안 그 땅을 지켜 온 토착 세력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황제보다 더욱 황제 같은 권위를 누리는 자들이 마병단 지부를 자기 앞마당에 기꺼이 받아들이려 할 리 없었다. 지부 설립이란 곧 황제의 권위를 이 땅 곳곳에 다시 세우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평민 출신들끼리 지부를 세우러 파견되는 것보다야 황족인 키시아르가 몸소 나서는 쪽이 한결 빠르고 수월해지기는 할 터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이 그것만은 아니겠지.
유더는 어제 키시아르가 마지막으로 두었던 세 번째 전술 게임을 떠올렸다. 이전 생의 그가 자주 사용했던 어떤 전술들에서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전략. 그리하여 일구어 낸 승리.
새로운 정보를 쥐어 찾아낸 새로운 길.
유더는 앞으로 키시아르가 가고자 할 길의 방향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어차피…….
“가시는 길을 따르겠습니다.”
이번의 유더가 갈 길도 그와 같은 것을.
***
그보다 조금 이전, 남부의 황폐한 사막.
붉은 피부를 가진 남국인들이 차가운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한이란 자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장소는 여기가 확실하다.”
상처 입은 나한과 남부까지 함께했던 남국인 상인 오나쾬이 움푹 들어간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들은 나한을 내려 준 뒤로 계속 멀리서 뒤를 몰래 쫓아 이곳까지 당도했으나, 그가 사막 근처에서 사라져 당혹했었다.
며칠간 주변을 감시한 끝에 재차 나타난 나한의 흔적을 발견했지만 그때는 이미 그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막을 빠져나간 뒤였다. 오나쾬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그 기분 나쁜 짐승 같은 남자를 뒤쫓고 싶었으나 그건 내려진 명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참았다. 대신 그들은 나한이 도대체 어디로 갔다 어디로 나온 것인지를 철저히 수색했다.
그 결과 알아낸 게 바로 사막의 초입 부근에서 주변을 일그러뜨리는 힘의 존재였다.
“밝은 눈을 지닌 스윈이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이곳 근처의 제법 넓은 구역에 ‘힘’이 펼쳐져 있어. 허락받지 않은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도록 숨기는 능력인 듯하다.”
“분명 거점이겠지.”
“그래. 우리가 찾던 것.”
그들 또한 각성자였기에 한번 힘의 존재를 파악하고 나자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추측하는 건 금방이었다. 하지만 깨달았다고 해서 제대로 된 문을 찾는 것까지 쉬운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또다시 며칠을 허비한 끝에 간신히 거점의 입구를 뚫는 데 성공했다.
“거점을 뚫고 들어온 자들이 있다!”
“마병단인가?”
“아니, 남국인들이야!”
평화로운 일상을 침범당한 각성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어린아이와 아픈 이들은 황급히 숨겨진 쉼터로 도망쳤고, 침입자를 대비하여 철저히 훈련받은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남국인들을 둘러쌌다.
그중 대표자 격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앞으로 나서서 뾰족하게 갈아 낸 농기구를 들이댔다.
“행색을 보니 길을 잃고 들어온 평범한 형제자매는 결코 아닌 듯한데, 누구냐.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곱게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딱딱해야 할 농기구의 날이 음산하게 울렁거렸다. 그녀는 쇠붙이를 조종하는 능력자였다.
남국인 상인들은 이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이 마을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해칠 뜻이 없다는 표시로 양손을 들었다. 맨 앞으로 나선 이는 이곳에 없는 그들의 상관, ‘아톤’에게 이곳을 찾아내라는 명을 직접 받은 오나쾬이었다.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각성자다. 너희의 동료 나한이라는 자를 통해 여기까지 왔다.”
나한과 다시 만날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음에도 오나쾬은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은 남국인 각성자들이 나한에게서 자신들과 접선할 수 있는 방법을 들었으리라 지레짐작했다.
“나한은…… 지금 여기에 없는데.”
같은 각성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공격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나한과는 무슨 연유로 알게 된 사이지?”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고 말해 두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침범할 생각은 없었는데 들어올 방법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었다. 사과하지.”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은 그제야 마음을 좀 놓았다. 눈앞의 남국인들은 낯설긴 했지만 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고, 공격하려는 뜻이 느껴지지 않았기 떄문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여기저기서 흘러 들어오는 다양한 각성자들이 모여 뭉친 집단이었기에 이런 상황에도 빠르게 평안을 되찾았다.
“뭐야. 그냥 나한 때문에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었대. 도로 일이나 하러 가자.”
가지각색의 능력을 거두고 심드렁하게 사라지는 이들을 지켜보던 오나쾬이 조용히 입을 열어 물었다.
“우리는 그동안 제국을 제법 많이 돌아다녔지만, 당신들과 같은 집단이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혹 지도자가 있다면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음…… 글쎄. 일단 이쪽으로 와서 이야기해. 마을 입구는 좁으니까.”
자신의 이름을 세라라고 밝힌 여자가 그들을 작은 집으로 안내했다. 회의를 위해 놓은 긴 탁자가 그 집에 존재하는 가구의 전부였다. 세라는 오나쾬과 동료들을 의자에 앉힌 뒤, 혹시라도 허튼짓을 하면 안 된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이곳의 의자에는 능력이 걸려 있어. 허튼짓을 하면 즉시 속박되지. 기억을 잃고 쫓겨나는 건 일도 아니니 얌전히 대화하는 게 좋을 거야.”
“놀랍군.”
“놀랍지. 이런 곳은 여기밖에 없어. 전부 현자님 덕분이야.”
“현자라는 이가 너희들의 지도자인가? 우리는 나한이 그 비슷한 역할을 하는 줄 알았는데.”
서부에서 남국인 상인들이 만났던 건 나한과 그를 따르는 일부 각성자뿐이었기에 당연한 추측이었다. 그리고 현자를 따르는 각성자들은 그 추측에 당연히 불쾌함을 표했다.
“누가 그래. 나한이 그러던가?”
“그럼 아닌가?”
“아니야. 우리를 이끄는 건 현자님이야. 겸손하고 온화하시며 이곳을 이렇게 키워 주신 길잡이시지. 나한 같은 놈과는 전혀 달라!”
세라를 비롯하여 흥분한 이들이 제각기 무어라 말을 토해 냈다. 남국인들을 자신들의 마을에 새로 들어온 각성자 대하듯 솔직하게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에서 내부의 정보를 숨겨야 한다는 경계심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정치적 감각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 정도만 듣고도 어렵지 않게 나그란의 별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만했다.
오나쾬은 다른 동료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들은 눈치 빠르게 이 이야기가 그들에게 제법 쓸모 있는 결과를 가져다줄 것임을 짐작했다.
‘놀랍군. 정말로 이렇게 큰 각성자 집단이 제국의 가장 구석진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것으로도 모자라 세력까지 나뉠 만큼 활발히 활동 중이었다니.’
나한 외에도 분명 다른 각성자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 중에는 자신들과 말이 통할 이도 있을지 모른다며 그를 여기로 보냈던 아톤의 짐작이 옳았다.
‘이것은 분명 기회다.’
나한은 원하는 바가 너무나 확실하고 위험하여 함께 손을 잡을 수 없는 대상이었지만, 현자라는 이는 나한과 다소 다른 노선을 걷는 듯하니 어떨지 모른다. 이들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이 다소 간편해질 것이었다.
오나쾬은 한참 동안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준 뒤, 미소를 지었다.
“듣고 나니 현자님이란 분을 굉장히 만나고 싶어지는군.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건 왜?”
“이곳과 관련하여 좀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아서.”
“너희가 각성자라는 것 외엔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믿고?”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세라는 결국 현자를 만나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서신에 적어 전해 주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