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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74화 (574/805)

574화

“어쩌면 좋을까.”

무엇을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침묵을 지키며 응시하자 키시아르의 입가에 열기 없는 웃음이 떠올랐다가는 이내 사라졌다. 사내는 소리로 내어 말할 수 없는 덩어리들을 토해 내듯 숨을 내쉬며 유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정말로, 어쩌면 좋을까…….”

주어가 없는 중얼거림은 메마른 슬픔의 탄식 같기도, 애끓는 아쉬움의 한탄 같기도 했다. 아주 많은 말들이 그 사이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으나 그렇기에 반대로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만은 선명히 느껴졌다.

키시아르가 이야기를 들은 뒤에도 유더에게 깊이 닿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면 이 기적을 의심치 않기에 충분했다. 유더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키시아르가 끌어안는 대로 몸을 늘어뜨렸다. 그저 전술 게임을 몇 판 두었을 뿐임에도 아주 힘겨운 일을 끝낸 사람처럼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뭔가 더 생각난다면 후에 재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바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재해와 관련된 일은 대부분 기억합니다.”

대답 대신 키시아르가 유더의 목덜미에 숨결을 흘렸다.

유더는 조금 침묵하다 키시아르의 무릎 근처에서 흔들거리는 제 손끝을 보며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칸나가 요즘 저를 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조금은.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닌 듯해 내버려 두었는데.”

아무 내색도 하지 않더니 뭔가를 짐작은 했다 말하는 게 역시 키시아르다웠다.

“네. 이번에야 겨우 그 이유를 알았는데, 저와 닿은 찰나 장갑을 통해 단장님과 제 관계를 추측할 만한 정보를 읽어 냈었다고 합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비밀을 지키느라 상당히 힘들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말하고 나서는 오히려 속이 시원해졌다며 좋아하더군요.”

키시아르라면 유더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바로 눈치챌 터다. 그래도 유더는 느릿하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지금 제 기분이 그런 것도 같습니다.”

“비밀을 지키는 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지.”

“사실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다른 이들에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지도, 그게 딱히 어렵거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애초 비밀이 되어야 할 이야기든, 아닌 이야기든 유더에게는 똑같았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느냐는 욕을 수시로 먹고 살았다. 제 속내에 있는 이야기를 굳이 남에게 말해야 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기에 남의 비밀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유더의 그런 기질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카치안 황제는 이후 그가 고문을 받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뒤늦게 치를 떨었다고 들었다.

오직 키시아르만이 예외가 된다. 정보는 혼자만 가지고 있을수록 유리하다는 상식마저 그의 앞에서는 의미를 잃는다. 비밀의 무게는 유더가 차 본 그 어떤 족쇄보다도 무거웠다.

차라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키시아르를 속이는 것보다는 나을지 몰랐다.

“영광이군. 그러면…… 현재 네가 해 준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건 나뿐인 건가?”

유더는 키시아르의 질문에 눈을 감았다 떴다.

“이렇게 많이 알고 계신 건 단장님뿐이십니다만…… 이논이 조금 알고 있기는 합니다.”

혹 섭섭함을 표할까 걱정되었으나 키시아르의 목소리는 그저 평온했다.

“그는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지?”

“제가 새로운 게임을 하고 있다는 정도와…… 이전과 다른 결과를 목표로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혹 그도 네가 바꾸고 싶었다던 그 결과 중 하나였나?”

이제는 키시아르의 통찰력에 반응하기도 새삼스러웠다.

“네.”

“서부 임무가 끝난 뒤에 네가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나는군. 더 번질 수도 있었던 혼란을 막은 셈일 수도 있으니 스스로에게 너무 박하게 점수를 매기지 않아도 좋다고 했었던가.”

키시아르의 말을 듣자 유더 또한 그런 대화를 나누었던 때가 생각났다.

“그 말을 이제 네게 돌려주어야 할 것 같아.”

유더는 고개를 돌려 키시아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깊은 감정들을 갈무리한 붉은 눈동자가 유더를 담은 채 부드럽게 휘었다.

“나도, 폐하도, 다른 모든 이들도 네게 빚을 졌다는 걸 정작 당사자가 몰라서야 말이 안 될 테니까.”

“빚이라뇨.”

“빚이지. 그것도 아주 큰.”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키시아르는 들어 주지 않았다. 유더가 무어라 더 말하려 하자 그는 어느새 어두워진 창밖을 가리키며 오늘은 단장실에서 쉬고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여 말을 교묘하게 막았다.

이전이었다면 거절했을 테지만 유더는 오늘 밤에도 키시아르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답을 얻고 나아지기를 바라 전술 게임까지 했다지만 그렇다고 결과를 눈으로 보기도 전에 확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키시아르가 얼마나 멀쩡해 보이는 연기를 잘하는지 알고 있는 만큼 반드시 제 스스로 확인해야만 했다.

키시아르는 이제 두통약을 먹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유더에게 여러 번 입을 맞추었고, 한 치의 틈도 없이 끌어안은 채 머리를 맞대고 몸을 뉘였다. 키시아르의 침대 곁에는 유더의 방에 있는 것과 같은 향주머니가 소담하게 매달려 있었다. 황후가 준 물건이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좋은 향 속에서 밀려오는 피로와 잠을 참으며 버티는데, 그가 키시아르보다 먼저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참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일찍이 눈치챘을 사내가 웃으며 속삭였다.

“……좋은 꿈 꾸게.”

그리고, 고마워.

“…….”

마지막 말은 너무나 희미해 제대로 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반문할 틈도 없이 눈을 감은 사내를 깨우고 싶지 않아 유더는 그저 조용히 그의 품에서 눈만 깜박였다.

나란히 누웠는데도 키시아르보다 그가 먼저 잠들지 않은 건 생각해 보니 이번이 처음인 듯도 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감은 상태에서 보니 뺨이 평소에 비해 조금 수척했다. 수면 부족 때문에 얻은 파리함조차도 그저 평소와 조금 다른 아름다움을 머금은 것처럼 보이는 사내를 보면서도 유더는 전처럼 그 미모에 열중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의 죽음과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에도 놀랄 만큼 평정을 잘 지키던 사내가 이토록 수척해진 건 단지 유더의 죽음을 꿈에서 보았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다. 그 사실이 새삼 이상하고도 가슴이 아팠다.

고요히 눈을 감은 얼굴을 보면서 유더는 그가 궁금해하지 않다 말했던 이전 생의 그를 떠올렸다. 그 죽음의 진실을 알고도 눈앞의 사내라면 어쩌면 오늘처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렇다면, 그렇기에 오히려 유더 쪽에서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또한.

‘……고마워해야 할 이도, 빚을 진 것도 오히려 내 쪽이겠지.’

유더는 한참 동안 어둠 속에서 잠든 키시아르를 지켜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는데도 조금도 지루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이 시간이 그에게는 오늘 하루 중 가장 편안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좋을까. 유더는 이전에 키시아르가 중얼거렸던 말을 입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어쩌면 좋을까.

처음으로 자각하여 이름을 붙인 사랑은 깨닫고 보니 낯선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그의 심장을 쥐고 놓지 않았던 익숙한 감각 중 하나에 불과했던 듯도 했다.

***

“…….”

침실의 높은 꼭대기에 위치한 둥그런 창 아래 희미하게 흘러 내려오는 달빛 아래서, 키시아르는 눈을 떴다.

그는 품 안에서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는 유더를 바라보다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는 동안에도 성격이 엿보이는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기감이 예민한 이가 바로 눈을 뜰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제 입술에 누른 손가락을 유더의 머리칼 끝에 대고 몸을 일으켰다.

발소리를 죽여 침실 밖으로 나선 사내는 쌀쌀한 복도를 지나 집무실로 들어섰다. 집어넣은 마석이 많이 탔는지 난로의 불길이 이전에 비해 상당히 약했다. 마석 한 줌을 더 집어넣자마자 찬란한 오색으로 타오른 빛이 마지막으로 두고 나서 치우지 않은 전술 게임 판과 의자를 비추었다.

키시아르는 그곳에 앉아 제가 두었던 판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하얀 이믐이 이끄는 말들이 검은 말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채 멈추어 있는 판.

그는 그것을 눈에 새길 듯 바라보다 패를 들어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판은 금방이라도 다시 게임을 시작할 수 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처음의 모습으로 돌려둔 후에도 키시아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검은 말부터 다시 차례로 움직여 판 위에 패를 놓기 시작했다.

검은 패. 다음은 하얀 패. 그리고 다시 검은 패.

망설임 없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패들은 키시아르가 유더와 두었던 첫 게임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는 중이었다.

게임을 하고 나서는 보통 머리로 복기를 하지만, 가끔 완벽하게 그때의 감각을 되살리고 싶을 때는 이렇게 혼자서 다시 두어 보기도 한다. 키시아르의 판단으로는 지금이 그래야 할 순간이었다.

딱,

딱.

딱…….

돌이 판과 부딪치며 나는 작은 소리들이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동안 사내는 제 앞에 있었던 이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

흉터가 많은 손으로 망설임 없이 두던 패들을, 담담하지만 검게 타오른 재와 같은 목소리로 진실을 고백하던 순간들을 모두 떠올렸다.

-딱…….

오늘 들은 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그건 분명했다.

유더는 그에게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 말을 하던 때의 자신이 얼마나 텅 빈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가 어떤 심경이었는지도 아마 알지 못했으리라.

키시아르는 수없이 그들이 두었던 게임을 반복하여 다시 두었다. 유더가 만들어 낸 날개의 진이, 키시아르가 두었던 장군패와 군주패의 뒤바뀜이 끝없이 흘러가고 이어지다가는 갑자기 뚝 멈추었다. 정확하게 칸을 지키던 패들이 어느 순간부터 정해진 선과 면을 벗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두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말들이 선을 벗어난 이유는 왜인가.

키시아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육각형의 작은 판을 내려다보았다. 그 판이 한없이 흐려 곧은 선들이 온통 일그러져 보이다가는, 문득 도로 맑아졌다.

그와 동시에 판 위에 떨어진 투명한 물방울이 뚝 떨어져 흔적을 남겼다.

키시아르는 들고 있던 패를 두지 않고 멈추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복기를 할 수 없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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