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화
“목표가 세계 정복이라고 해도 도울 생각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반만 맞혔군.”
반이라니. 세계를 구하는 것과 세계 정복 사이에 겹치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전신의 털이 쭈뼛 설 만큼 대범한 농담이었으나 당사자는 태연했다. 유더의 말을 비웃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눈치를 보며 살피는 기색도 없는 익숙한 키시아르 라 오르 그대로였다.
그것을 몇 번이나 재차 바라보면서 확인한 뒤에야 유더는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이…… 지나치게 터무니없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왜 그리 생각하겠나?”
키시아르가 오히려 반문을 했다.
“하지만… 그저 제가 한 말이라서 그냥 그리 말씀하시는 거라면…….”
“내가 너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아무런 근거도 없는 건 아니야.”
키시아르가 딱 잘라 대답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목표로 삼는다는 말이 그저 터무니없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고 따르는 사제들은 존재 자체가 터무니없는 이들이 되겠지?”
“그것과 이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관점에 따라서는 별로 다르지 않아. 실제로 신성력의 존재가 곧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가 아닌가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오래된 토론 주제거리였다네. 마력이 존재한다고 마법을 믿는 건 아니라는 논리였지. 사제들은 좋아하지 않는 주제였지만 말이야.”
그건 단순히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입 밖에 내는 순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만한 금기의 주제가 아닌가?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키시아르가 유더의 주먹 쥔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뼈가 도드라진 손등을 느릿하게 어루만지며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세상에 닥쳐올 재앙을 막고 싶다는 말은 막연히 실체 없는 세계 평화나 구원을 외치는 것과 다르지. 내가 아는 유더 아일이 후자와 같은 목표를 가졌었다면 지금 그가 있었을 곳은 마병단이 아니라 신전이 아니었을까 싶군. 어쩌면 거기서 나 같은 이를 고뇌하게 만드는 사제복을 입었을지도 모르고.”
그가 내뱉는 나직한 말 하나하나가 유더의 귓속을, 그리고 머리를 크게 두드리는 듯했다.
“하지만 너는 신전이 아니라 마병단을 선택했지. 그건 기도가 아니라 각성자로서 지닌 능력 쪽이 목표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일 거야. 그 마병단에서 네가 여태 무슨 일들을 해 왔는지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너무나 현실적인 노력뿐인데, 터무니없다는 말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고 생각되지 않나?”
긴 손가락이 유더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며 하나하나 그가 해 온 일들을 읊어 주었다.
“시기와 질투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가르쳐 생존 확률을 높이고, 위험 앞에 망설임 없이 나아가 불씨가 커지기 전에 맞서며 죽을 뻔한 운명을 지닌 이들을 살리는 것. 누가 보아도 전쟁을 대비하는 군사의 태도에 가깝지 그 반대는 아니야.”
“…….”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 외치는 자칭 예지자들과 미치광이들은 언제나 존재해. 그러나 말만 할 줄 아는 이들은 근거를 대지 못하며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지. 그게 너와 그들의 차이점이다. 내가 너를 믿는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해.”
누구도.
그 누구도 유더에게 이런 답을 해 준 적이 없었다.
고요히 눈을 깜박이는 유더의 머릿속에서 문득 이전 생의 기억들이 두서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유드레인.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재수 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나가서 시킨 일이나 하도록.’
‘그래. 몇 년 사이 재해가 심각해지기는 했지. 작년 지진과 가뭄에 이어 혹한이 꽤 끈질기긴 했소. 하지만 그것과 몬스터 발생 따위가 멸망의 징조라고 말한다면 우스워지지. 천 년 전 시황제의 시대라도 도래한단 소리요?’
‘마병단장. 요즘 밖을 떠돌며 영웅 노릇을 하려 든다지? 지금까지 해 먹은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그리 심심하거든 부인이나 들이게. 아, 오메가인지 뭔지 하는 그런 몸이라서 안 되나?’
‘그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는 어렵겠군. 넬라른의 왕이 지킬 수 있는 건 넬라른뿐이며, 우리는 제국에 손을 내밀 여력이 없으니…….’
‘글쎄요, 단장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번의 균열 조사 결과도 결국 별달리 이상한 요소는 없다 나오지 않았었습니까…… 하하. 지난번 일이 너무 힘드셔서 과도하게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요?’
의심. 비웃음. 조롱. 우려.
유더에게 익숙했던 그 모든 반응들은 여기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저 그대로 듣겠다는 듯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유더는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짐이 처음으로 가벼워지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숨을 깊이 토해 냈다.
“정말로 제 말을 믿으시는군요.”
“그래. 그렇다니까.”
“…….”
“그러니 말해 보게. 재해가 닥쳐온다는 건 무슨 뜻이고, 무엇이 필요한지.”
유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죽음에서 다시 돌아온 이래 오랫동안 속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을 드디어 입에 올렸다.
“이전에 서부에서, 몬스터들이 이상 발생을 할 때 나타났던 기묘한 균열을 보셨을 겁니다. 기억하십니까.”
“물론. 이후 같은 균열이 나타난 적이 있는지 조사를 명했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지.”
“저는 그 비슷한 것들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네가 해결하고자 하는 것들인가?”
한마디만으로 모든 뜻을 꿰뚫는 이와의 대화는 막히는 부분이 전혀 없이 매끄러웠다.
유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시작에 가깝습니다.”
“그게 시작이라면 그다음은?”
“따로 열거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많은 재해가 있을 겁니다.”
지진, 가뭄, 혹한, 폭우, 식량난, 역병, 전쟁, 그리고 현자와 같이 사람을 어지럽혀 혹세무민하는 자들과 스스로의 보신만을 위하는 이들. 유더는 그 모든 것들을 열거한 뒤 마지막 한마디를 더했다.
“사제와 마법사들이 점차 힘을 잃고 각성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일도 머지않아 다가올 것입니다.”
그건 이전 생의 혼란한 시기에 가장 큰 중점을 찍었던 일 중 하나였다.
각성자는 늘어나고, 마법사와 사제, 기사는 갈수록 줄어든다. 이렇다 할 마법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마법사들과 작은 상처 하나 치유하기 어려워하는 사제, 오러의 부스러기조차 내지 못하는 기사들은 각자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맹렬하게 싸웠고 그 와중에도 그들 사이에서 발현하는 각성자들을 배척했다.
그 세력 싸움의 결과로 크고 작은 기존 집단들이 명맥을 잃었다. 영원할 듯했던 진주탑의 붕괴 또한 그 일의 연장선에서 일어났다.
마력과 신성력을 비롯한 모든 힘들이 새로이 나타난 각성자의 힘에 비하면 희미한 촛불과 같은데, 정작 권력을 쥔 이들은 그들이었다. 하루아침에 힘을 얻어 제대로 뭉치거나 존중받지 못하는 각성자들 사이에서는 질서 없는 혼란이 들끓었다.
재해를 체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규범은 갈 곳을 잃었다. 당장 눈앞에 닥치는 사건들을 해결하기에도 급급하니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연구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저는 그것이 이 판…… 아니, 세계가 부스러져 가고 있기에 나타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나름대로 조사를 했습니다.”
유더가 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진주탑이 붕괴하던 시기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당시 그는 재해 현장에서 자주 나타났던 균열의 흔적을 쫓아 조사하고 있었다.
유더의 도움 요청에는 한 치의 반응조차 보이지 않던 마법사들은, ‘천 년 전에도 어쩌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 하에 자신들 나름대로 연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철저하게 마법사의 힘과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연구였기에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했으나, 이후 그 연구 정보를 입수한 유더는 그것이 제법 생각해 볼 만한 주장일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그의 신경을 자극한 건 정확히는 천 년 전, 멸망할 뻔했다던 시기의 세상과 현재 일어나는 재해의 양상이 비슷할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는 세상을 돌며 그와 관련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각 나라의 실력자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려 했고, 심상치 않은 재해가 일어난 현장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그러한 시도를 그리 순수하게 보지 않았다. 마병단장이 황제의 명까지 무시하고 혼자서 할 일을 위해 돌아다니는 건 위험한 뜻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들이 빗발쳤다.
의견을 전하려 만났던 타국의 몇몇 마법사나 기사들 또한 유더의 의도 뒤에 정치적인 뜻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닌지를 먼저 의심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친 게 분명하다는 비웃음이 등 뒤를 따라다녔다.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으니 혼자 몰래 진행하는 쪽이 차라리 속이 편하다. 유더가 홀로 세계구를 조사해야겠다는 위험한 판단을 내린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제 생각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할 기회는 얻지 못했습니다만, 지금과 같은 결과가 되었으니 나쁘지 않다 여깁니다.”
사형을 당해 죽었으니 그 뒤의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번 생에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만 했을 따름이었다.
“아까 물으셨던 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지금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단장님과 황제 폐하께서 건강을 지키시고, 마병단이 지금과 같이 중심을 잡아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상입니다.”
키시아르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의 손에 잡힌 유더의 손에 온기가 되돌아올 때쯤에야 그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쩌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