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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72화 (572/805)

572화

끔찍한 진실이다.

고작 한마디 대답만으로는 전할 수 없을 많은 것들이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모두 삼키고 싶기도, 혹은 토해 내고 싶기도 한 상반된 충동이 유더의 목을 간지럽혔다.

감은 눈 안쪽에서 오랜 옛날의 기억들이 마구 뒤섞인 채 흘러 지나갔다. 키시아르와 닿아 있어 추울 리 없는데도 손끝이 극도로 차가워졌다. 유더가 추위에 젖은 사람처럼 가늘게 숨을 내쉬자, 그의 등을 받치고 있던 단단한 팔이 몸을 추슬러 한층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제 품 안의 존재가 곧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강한 힘이었다.

숨을 쉬기 조금 버거워졌지만 유더는 오히려 그래서 낫다고 생각했다. 몸을 옥죄는 감각을 통해 키시아르와 자신이 모두 살아 있다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귀에 맞닿은 가슴 너머에서 쿵쿵거리며 크게 뛰는 박동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목이 잘려 죽은 사형수의 꿈도 환상도 아님을 힘차게 주장하는 소리였다.

그래서 유더는 다시 눈을 뜰 힘을 얻었다.

“…….”

전술 게임의 판 위에 두다 만 패들이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음에 말을 옮겨야 하는 이는 유더였다.

패를 움직이지 않는다면 게임 또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게임을 시작한 건 아니지 않은가.

다음 대화를 위해서는 다음의 수가 필요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빼내어 검은 패를 잡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전의 저는 패배할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단장님이 없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제 게임이었으니까요.”

키시아르의 시선이 유더의 손끝에 잡힌 패로 향했다.

“규칙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제가 지닌 패들을 믿지 않아 많은 실수와 잘못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지른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답을 찾지 못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단장님과 관련된 일들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키시아르가 자신이 부재했던 이유에 대해 묻는다 해도 지금은 속 시원하게 알려 줄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끝난 게임은 끝난 게임일 뿐입니다. 한번 잘못 놓은 패는 돌이킬 수 없지만, 다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니…… 제가 해야 할 일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생각입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더의 손에 잡혀 있던 기사패가 딱 소리와 함께 힘차게 전진하는 칸을 밟았다.

말을 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엉겨 있던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숨겨 왔던 비밀을 토해 내고 나니 마음이 시원해졌다던 칸나의 말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유더는 다음 패를 두라는 말 대신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눈썹을 찌푸린 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이윽고 눈을 내리깔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말이 옳군.”

그가 반대쪽 손을 올려 판을 반 바퀴 돌렸다. 돌아가는 판 위의 말들이 키시아르의 손끝을 스치듯 움직였다.

“이미 끝낸 게임을 다시 이어 할 수는 없지. 잘못된 패는 누구나 놓을 수 있어. 중요한 건 그 이후에 어떻게 행동하느냐겠지. 그런 면에서…… 네게 이 게임을 가르친 이가 그 말을 들었다면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을지도 모르겠다 싶군.”

그게 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전의 자기 자신임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부러 그런 말을 하는 사내의 표정이 장난스럽고도 씁쓸해 보였다.

고개를 숙인 키시아르가 유더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그 입술은 이내 뺨과 귓가를 스쳐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가는, 이내 내부를 향하여 침범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이어지는 입맞춤 속에서 단단히 끌어안고 있던 마음의 걸쇠가 천천히 풀리는 듯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에게서 전해져 오는 소리 없는 고통을, 그리고 오직 자신만을 향한 수많은 감정들을 느꼈다. 너무나 밀도가 짙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취할 듯한 기분이 들었다.

키시아르가 유더의 죽음을 꿈꾼 이후로 느낀 적이 없던 감정의 연결이었다.

몇 번이나 숨이 막혀 머리가 멍해졌으나 유더는 키시아르를 밀어내지 않고 그의 입술이 전하는 감각들을 있는 힘껏 삼켰다. 떨어진 이후에도 그 여운은 한참 동안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마주친 눈을 통해 키시아르 또한 유더가 말로 설명하지 못한 감정들을 받아 가져갔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았다.

몸이 말보다 더욱 많은 것들을 전할 수 있다는 건 몇 번을 겪어도 신비한 일이었다.

“다음 수를 두어야겠군.”

유더에게 이마를 기댄 채 오랫동안 판을 내려다보던 키시아르는 이윽고 위태롭게 포위당하듯 서 있던 붉은 무늬 장군패, 마카스를 재차 집어 들었다. 그 장군패가 향한 곳은 본래 안쪽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던 군주패의 자리였다.

키시아르가 두 패의 위치를 뒤바꾸자 이제 위태로운 자리에 선 패는 군주패, 이믐이 되었다.

의미심장한 변경이었다.

“…….”

유더는 말없이 재차 패를 옮겼다. 타닥이며 타오르는 마석 난로의 불빛 사이로 또다시 몇 번의 수가 서로 오갔다. 키시아르는 군주패와 장군패의 위치를 바꾼 이후부터 군주패를 마치 기사패처럼 휘두르며 판을 헤집고 다녔다. 그의 손에 들린 군주패는 능력 발휘가 어렵도록 얽매인 수많은 규칙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든 패를 이끌기 위해 태어난 지도자처럼 보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자리를 지키고만 있는 게 군주패의 활용법은 아니다. 알고 있어도 사용하기는 어려운 치밀한 방식으로, 하얀 이믐이 판 위에 새로이 군림했다.

그건 유더가 키시아르와 이전 생에서 했던 수많은 전술 게임에서도 본 적이 없는 방식의 싸움이었다. 키시아르가 그려 내는 군주패의 새로운 활용법 속에서 붉은 장군패는 마치 세 번째 이믐이 된 것처럼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

이믐 하나의 움직임을 바꾼 것만으로도 육각형 판 위의 작은 세상이 이토록 생생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유더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유더의 검은 패들 또한 용맹하게 달려들었지만, 한계를 적절히 활용하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키시아르의 하얀 패들 앞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유더의 마지막 남은 이믐을 향하여 진격해 들어온 하얀 이믐이 품위 있게 적을 쓰러트리고 그 자리에 섰다. 승기는 물을 것도 없이 그의 몫이었다.

당당히 군림한 패를 내버려 둔 채 키시아르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내가 뭘 물을 거라고 생각하지?”

“사실 처음부터 제가 어떻게 여기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물으실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답을 알고 있었다면 보좌가 그간 시간과 관련된 고대의 기록들에 그리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키시아르는 유더조차 과거로 돌아온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을 이미 추측해 낸 상태였다.

“내 생각이 틀린가?”

“……아뇨. 맞습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전혀 다른 거라네. 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하기도 하지.”

유더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전의 단장님에 대해서라면…….”

“음? 아니. 그것도 아니야.”

사내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가는 도로 거두었다.

“이전 게임의 나에 대한 건 아직 답을 찾지 못한 부분이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별로 중요한 부분도 아닌 것을 굳이 지금 들을 필요는 없지. 그런 건 모든 게 확연해져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해 주어도 충분해.”

유더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나 의심하다 조심스레 반문했다.

“그게 왜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네가 지나치게 걱정하고 있는 듯해 미리 말해 두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내가 이전 게임에서 어떤 식으로 사라졌든, 사실 그건 내게 있어 그리 궁금하지 않다는 사실이야.”

“그래도 알아는 두어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글쎄. 네게 있어 그때의 내가 좋은 시작도, 좋은 끝도 아니었단 게 확실해 보이는 이상 여기서 뭘 더 안다 해도 이 생각이 그리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데.”

무심히 대답한 키시아르가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그건…….”

마치 이전 생의 관계를 이미 전부 보고 온 듯 날카로운 추측이었다.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그동안 보인 모습들이 너무 많았기에 유더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그게 지금 내가 유일하게 기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 그리 상냥하게 말해 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키시아르가 다시 한번 유더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내가 지금 당장 제일 먼저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이 ‘새로운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네가 필요하다 여기는 조건들, 그리고 그 끝에 바라는 가장 큰 목표야.”

“…….”

“분명 복수조차 버릴 만큼 간절히 바랐던 더 큰 목표가 있었을 텐데도 그건 아직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지. 나를 구하고, 폐하를 살리고, 마병단의 기둥을 제대로 박아 세우는 건 내가 느끼기엔 더 큰 목표를 위한 과정에 더 가깝게 느껴지거든. 그러니 제대로 확실하게 말해 주지 않겠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유더는 비로소 자신이 세계를 구하고자 한다는 가장 큰 목표는 아직 입에 담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도 믿지 않으리란 생각이 너무나 깊이 박혀 있어 굳이 그것을 말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도 의심치 않을 듯한 붉은 눈동자를 앞에 두고도 이 말은 어쩐지 입 밖에 내기가 쉽지 않았다.

믿을까.

믿지 않을까.

오래된 고통 속에서 이윽고 맺힌 목소리가 흘러 나갔다.

“저는, 제 목표는.”

“…….”

“앞으로 저희가 사는 세상에 닥쳐올 재앙을…… 모두 막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길었던 불신의 세월이 소리를 내어 말하자 고작 한 마디로 끝이 났다.

그리고 키시아르는 유더가 단 한 번도 예측하지 못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웃었다.

“목표가 세계 정복이라고 해도 도울 생각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반만 맞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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