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71화 (571/805)

571화

“자…… 세 번째 판을 시작해 볼까.”

유더의 몸 옆을 감싸듯 뻗어 나간 팔이 가볍게 판을 돌렸다. 매끄럽게 반 바퀴를 돈 판 위에 키시아르가 흰색 패를 가볍게 올려놓았다.

그것은 첫 번째 게임을 시작했던 때 그가 택했던 것과 똑같은 위치, 똑같은 일반패였다. 유더의 시선이 사내의 얼굴을 흘긋 보았다.

‘이번에도 포기하고자 하는 의도……는 당연히 아니겠고.’

앞선 두 번의 게임을 모두 승리했으나 그건 엄연히 말하자면 유더의 승리라기보다는 키시아르가 일부러 패배의 길을 향해 걸었다고 보는 쪽이 맞았다.

세 번째에서까지 그럴 명목이 없음에도 첫 번째와 똑같은 수를 놓은 이유로 짐작되는 건 하나뿐이다.

‘이제부터 보여 줄 진짜 내 게임 방식을 이전과 확실하게 비교해 보고 싶단 거겠지.’

유더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판을 돌려 검은색 패를 집어 올렸다. 그가 이전 두 번의 게임 때와 비교하면 훨씬 느리지만 신중한 손길로 패를 놓자, 위치를 확인한 키시아르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이윽고 그는 또다시 판을 돌려 다음 수를 놓았다. 유더 또한 그 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다음 패를 올렸다. 돌로 만들어진 말들이 판과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판이 돌아가는 소리와 더불어 끊임없이 불규칙하게 이어졌다.

“…….”

처음에는 짐짓 팽팽해 보였던 두 세력. 그러나 이전과 달리 가장 먼저 스러진 말은 유더의 검은 패 쪽이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손에 잡힌 검은 말을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이것은 즉, 키시아르가 첫 번째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무엇부터 물을까.’

결정적인 답을 드디어 손에 넣은 키시아르의 영민한 머리가 지금쯤 어디까지 돌아가고 있을지는 유더조차 쉽게 추측하기 어려웠다.

‘내가 어떤 방법으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는지 물을 확률이 그래도 제일 높겠지. 나라도 그것부터 물었을 것 같으니까…….’

“몇 살이었지?”

“……예?”

그러나 들려온 질문은 유더의 예상을 단번에 깨트렸다.

“내가 명확히 기억하는 꿈은 둘이네. 하나는 서투르게 검을 연습하던 네가 나오던 시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단두대 앞에 섰던 때를 그렇게 표현한 키시아르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마지막 꿈에서 본 모습이 언제쯤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기초 검술 교본이나 연습하던 시기가 아닐 거란 건 확실하겠더군. 검술을 연습하던 때가 지금과 거의 같았다면, 그때는…… 확실히 더 어른 같았어. 물론 지금도 어른은 어른이겠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고 있으리라 믿네.”

소름이 돋을 만큼 정확한 파악이었다.

꿈속에서 병사들의 눈에 비친 모습을 통해 유더의 정체를 파악했다면서, 그 흐릿하고도 짧디짧았을 순간만으로 어떻게 거기까지 살폈단 말인가.

예상을 뛰어넘은 첫 질문 앞에서 당혹감과 주저함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쳐들었으나, 유더는 그것들을 이내 모두 삼켰다.

“단장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검술을 연습했던 시기는 지금과 같은 나이였고, 마지막의 그때는…… 지금보다 열한 살이 많았습니다.”

“서른하나.”

사내가 읊조리듯 확인했다.

“네.”

“그러면 지금의 나보다도 사실은 나이가 많은 건가.”

따지자면…… 그게 그렇게 되긴 할 것이다.

죽고 나서 다시 돌아온 유더가 이전 생처럼 키시아르를 먼 곳의 존재처럼 느끼지 않았던 이유는, 황족이나 공작이란 신분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권력의 정점에 서 본 경험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간 쌓인 알맹이 나이 덕도 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유더가 다시 만난 다른 단원들처럼 키시아르를 제가 이끌고 돌보아야 할 어린 후배 각성자들마냥 느낀 건 아니었다. 남아 있던 이전 생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보다 훨씬 건강하고 젊은, 그리고 쾌활한 온기로 넘쳐흐르는 모습을 보고 낯설게 여겼다는 쪽이 더 컸으리라.

때문에 유더가 느끼는 그와 키시아르 사이의 시간적 거리감은 이전 생과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반대이기도 한 미묘한 선을 끼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유더가 입을 다문 사이, 키시아르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지금이라도 연상 대우를 바란다면 언제든 말하게. 나는 어느 쪽이든 좋으니까.”

“……그런 걸 바란 적은 없습니다. 단장님을 저보다 어리다고 느낀 적도 없고요. 지금과 마찬가지로 대해 주시면 충분합니다.”

“내 보좌는 정말이지 너무 욕심이 없군.”

이 마병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스티버도 연상 대접을 받는 일이 없는데, 신분이 지엄한 곳에서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가. 조금 의도가 의심스러웠으나 유더는 일단 새로운 패를 손에 쥐었다.

“질문은 그것으로 끝이신 것 같으니 다음 수를 놓겠습니다.”

또다시 판이 돌아갔다. 검은 패들은 이전 게임과 전혀 다른 패도적인 기세를 띠고 하얀 패를 향해 힘차게 달려들었다. 앞에 나서서 적을 어지럽히는 패 하나를 중심으로 나머지를 보호하며 싸우는 이러한 전술이야말로 유더가 늘 고수해 왔던 익숙한 게임 방식이었다.

뛰어난 기동성을 지닌 기사패. 변칙적인 이동수를 둘 수 있어 다른 패들을 보호하기 좋은 장군패. 그 뒤에서 수적 우세를 지키며 각자의 기회를 언제든 활용하기 위해 때를 노리는 일반패.

“과연. 본래는 이렇게 두는군.”

자유롭게 본래의 방식을 드러낸 유더의 수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라보며 키시아르가 중얼거렸다.

“널 닮은 방식이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소수의 패를 앞세워 약자를 보호하고, 그것을 통하여 아름다운 협력적 진형을 그려 내기 좋은 전술.”

“…….”

“이상적이고 훌륭하지만 앞에 나서는 패들은 그만큼 위험에 처하기 쉬워져. 나와 같은 이 앞에서는 특히 그렇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키시아르가 유더의 패 하나를 더 잡아 쓰러트렸다. 바쁘게 돌아가던 판이 흔들거리며 멈추었다.

“두 번째 질문이네. ‘실패한 게임’에서 우리의 군주패 중 한 분께서는 결국 돌아가셨었나?”

이전 생에서 케일루사 황제는 결국 이번과 같은 기적을 마주하지 못하고 죽었나? 그렇기에 너는 그토록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달려들어 황제 본인조차 알지 못할 확신을 지니고 그가 반드시 살아야 하는 이임을 주장하였던 것인가.

그 모든 의도가 실린 무거운 한 마디의 질문은 이번에도 쉽게 대답하기 어렵게 느껴졌다. 유더는 눈을 내리깔며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저었다.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 키시아르에게, 그는 일어나지 않은 더욱 차가운 미래를 답해 주었다.

“아뇨. 그때 잃은 군주패는 하나가 아닙니다.”

군주의 패, 이믐은 두 개가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국의 법전에 황제와 황후가 각자의 자리에서 동등한 권한과 호칭을 지니고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천명된 것처럼, 이믐 또한 그러했다. 무늬에 따라 왕과 여왕으로 나뉘어 불리기는 했지만 두 개의 이믐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둘 중 하나만 잃으면 힘겹기는 해도 승기를 뒤집을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둘 모두를 잃으면 돌이킬 수 없는 패배였다.

그것을 키시아르 또한 분명히 알고 있을 터.

유더는 몸을 끌어안은 키시아르의 한쪽 팔에 묵직하게 힘이 들어가는 감각을 느꼈다. 깊이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 속의 감정은 한없이 어둡고 슬퍼 보였다. 그는 말없이 판 끝을 잡고 돌렸다.

하얀 패 몇 개가 유더의 말 앞에 쓰러졌다. 그러나 유더의 패도 멀쩡하게 남아 있지는 않았다. 여러 개의 검은 패가 쓰러져 판 아래로 퇴장한 뒤에야 키시아르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새로운 게임을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지 않고 이곳에 있는 이유는 여기에서만 이룰 수 있는 특별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나?”

“아뇨. 사실 꼭 이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시기상 마병단에 들어오기 직전쯤 다시 이 판에 돌아왔다는 뜻이겠군.”

“……네.”

“모든 존재는 자신이 잘 아는 곳에서 안정감을 되찾지. 마병단이 네겐 그런 곳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전 게임에서의 너는 분명…….”

키시아르의 손이 천천히 판 위를 더듬어 하나의 패를 잡았다. 흰색 위에 붉은색 무늬가 그려진 장군패였다.

병력을 통솔 가능한 장군패 ‘마카스’는 총 3개로, 각각 다른 색을 띠고 있다. 그중 키시아르가 잡은 것과 같은 붉은색 마카스는 장군패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를 지녔다는 설정이 있었다.

군주패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설 수 있는 고귀한 자.

그러나 장군패는 자신과 같은 위치나 보다 높은 패를 대신해 언제든 위치를 바꿔치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위험에 처한 왕 대신 죽는 용도로도 많이 쓰였다.

키시아르는 그 붉은 마카스를 한참 바라보다 새로운 위치에 내려놓았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선 패는 금방이라도 죽을 듯 위태로운 자리에 섰다.

키시아르가 차마 말로 내뱉지 않은 의도. 붉은 장군패가 의미하는 바를 유더는 알았다. 그리고 유더의 침묵을 통해 키시아르 또한 그만한 답을 얻었을 터였다.

“…….”

“같은 패배를 두 번 당하지 않을 거란 말 외에 바라는 건?”

“없습니다.”

“네게 패배를 안겨 준 상대를 향한 복수에는 관심이 없나?”

키시아르의 손가락이 판 끝을 돌릴 듯 말 듯 어루만졌다. 유더는 그의 손톱 끝에 서 있는 패가 군주의 패임을 알아차렸다. 여기서 그렇다고 말만 한다면 키시아르는 금방이라도 그 패를 낚아챌 것만 같다는 기이한 느낌이 문득 찾아들었다.

‘복수라.’

처음 죽었다 다시 돌아와 여관에서 잠도 자지 않고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그 비슷한 생각을 해 보기는 했다. 온갖 비밀 통로와 임무가 오가는 경로도 잘 알고 있겠다, 미친 척 황궁에 쳐들어가 카치안 황태자를 비롯한 놈들을 전부 죽이고 속 시원히 다시 죽는 건 일도 아닐지 몰랐다.

그러고도 살아남는다면 재앙이 닥치지 않은 북쪽의 깊고 깊은 섬 어딘가로 숨어들어 그대로 여생을 보내는 상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들은 결국 한없이 짧은 찰나의 망상만으로 끝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건 게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일을 제대로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것을 시작도 전에 스스로 망치는 건 도망치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요. 그러니 그것은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유더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키시아르를 살리고, 마병단을 다시 제대로 키워 내어 이번에야말로 세계를 지켜 내고 싶었다.

그것을 이룰 수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 생각을 한 뒤 유더는 갈 길을 잃고 들끓던 모든 허망함을 잊었다.

키시아르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어 꺼낸 질문은 이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감정을 띠고 있었다.

“그 승리 끝에 얻을 것들이 복수 따위보다 더욱 중요하다 생각하는 거군.”

“네.”

키시아르 또한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지 않던가. 그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적을 대하지 않고, 그가 지키고자 하는 이 나라와 사람들의 먼 미래를 바라보며 수를 두는 이였으니까.

그런 그가 유더의 말뜻 속에 숨겨진 의도를 몰라볼 리 없다.

키시아르의 입술 사이로 떨림과 억눌린 고통을 담은 긴 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유더를 깊이 끌어안고서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내가 네게 이 게임을 가르쳤다면, 다른 것도 무엇이든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었겠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나만큼 잘 아는 이는 없어. 그런데도 네가 게임에서 지는 동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건.”

“…….”

“나 또한 거기에 이미 없었던 거야. 그렇지?”

유더는 눈을 감았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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