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화
마주친 시선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 유더가 보여 준 게임 방식은 키시아르 라 오르의 방식과 거울처럼 똑같았다. 그건 단순히 사람을 잘 꿰뚫기에 할 수 있는 행동과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달랐다.
그의 모든 대응이,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놓는 모든 수가, 패를 택하는 순간순간의 선택마저도 키시아르와 같았다는 뜻이었다.
여간해서는 쓰지 않는 자살수를 빙자한 함정에도, 일부러 승리를 포기하면서 엉망으로 둔 수에도 한 점의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전율이 키시아르의 전신을 꿰뚫었다.
설령 미래를 이미 알고서 둔다 해도, 상대 스스로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발휘되는 작디작은 습관들까지 똑같은 모습으로 받아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건 증거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오감 따위로는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져 완벽하게 몸에 새긴 굳은살과도 같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통찰력의 결과도, 예지의 결과도 아니었다.
이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모든 것들이 한데 뭉쳐져 작은 패의 모습을 하고서 육각형의 작은 판 안에 하나의 우주처럼 펼쳐졌다.
키시아르는 유더 아일을 만난 뒤로 느꼈던 수많은 비현실적 감각들을, 그리고 유더가 흘려 왔던 불가사의한 발언들을 모두 떠올렸다. 살아서 미래를 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달았던 순간. 그 열망. 욕망. 그리고 두 사람 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던 연결들.
그간 끊임없이 추측하였으나 알 수 없었던 것. 혹은 알았으나 미루어 두었던 것. 그리고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것들이 일제히 뒤섞였다.
그 생각 하나하나들은 본디 가늘고 연약한 끈과 같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로 모여 마침내 하나의 결론으로 완성되자, 연약한 끈들은 서로를 얽어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단단한 패 하나를 새로이 만들어 냈다.
키시아르는 그 패를 놓지 않도록 쥔 채 하나의 말로 결론지었다.
“네게 이 게임을 가르친 사람이, 나였던 거군.”
실로 비상식적인 결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이 되지 않을 일이라 해도 눈앞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답이라면 믿을 수밖에.’
어차피 만난 순간부터 그와 키시아르의 세상에는 불가능이 없었으므로.
유더는 답을 기다리는 키시아르의 앞에서 들고 있던 패를 내려놓았다.
딱.
“네.”
그 순간, 유더의 흰 패들 사이의 빈틈이 완벽하게 메워지며 아름다운 진형이 완성되었다.
본래는 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었을 일반패였다. 그러나 유더가 내려놓은 패의 아래쪽에는 특별패를 표기하는 표식이 빛났다.
그것은 키시아르가 전술 게임을 하면서 가장 먼저 배우고 가장 선호했던 ‘날개의 진형’이었다.
본디 물러나야 할 패들을 전진시키고, 전진시켜야 할 패들을 물러나도록 만드는 힘겹고도 어려운 작업 끝에 비로소 빛을 발하는 형태의 전술. 적을 포위당한 줄도 모르도록 포위하여 허를 찌르고 안과 밖의 색상이 반전되도록 만드는, 그리하여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케 만드는 승리의 기적 같은 진형이었다.
키시아르도, 유더도 한참 동안 그 완성된 진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실 이 진형을 완성해 본 건 배운 이후로 지금이 처음입니다.”
유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날개의 진. 좋아하시지요.”
“……좋아하지.”
누구에게도 알린 기억은 없지만.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낮게 가라앉았다. 유더는 드물게도 떨리는 붉은 눈동자에서 눈을 돌렸다.
키시아르는 전술 게임이라는 이 작은 세상을 통하여 비로소 유더의 비밀을 확신하게 되었다.
키시아르가 꾸고 있는 꿈이 단순한 예지나 지금의 시간대에 존재하는 정보가 아닌, 이미 이루어졌으나 다가오지 않을 또다른 미래라는 사실을.
유더가 여태껏 홀로 노력했던 모든 행동의 이유를.
그리고 증거를 위하여 내민 유더의 불가사의한 게임 방식이 어디서 왔는지조차도.
답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을 믿기는 쉽지 않으며, 믿더라도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받아들일지는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키시아르는 아무런 분노 없는 눈빛으로 그저 유더를 조금 슬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늘 평소와 같은 표정을 유지하는 아름다운 얼굴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그 눈빛 하나가 유더의 가슴을 소리 없이 뒤흔들었다.
그는 정말로 유더가 보여 준 모든 것들을 믿었다. 그리고 왜 지금에야 비로소 그것을 밝히기로 했는지도 어렵지 않게 눈치챈 듯했다.
유더는 그가 들고 있던 말을 판 밖에 내려놓는 모습을 보았다.
“패배를 선언한다.”
무거운 목소리와 함께 두 번째 판은 키시아르의 기권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두 사람 중 누구도 판 위에 완성되어 있는 진형에 손을 대지 않았다.
“꿈속에서, 나는 너였으나 네가 아니었어.”
불현듯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유더는 그것이 키시아르가 막연하게 꿈꾸었다 말했던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좀 더 자세한 이야기임을 곧바로 깨달았다.
“꿈이 반복되며 어둠이 점차 밝아지고, 끌고 가는 이들의 눈에 비친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게 누구인지 알았을 때.”
그럼에도 확신하고 싶지 않았을 때.
“만약 그것이 이후에 일어날 일이라면 반드시 막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 하지만 나를 더 두렵게 한 건.”
잠시 망설였던 키시아르가 유더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일이 사실 네게는 이미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며, 내가 알지 못한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나고서 내게로 왔을지도 모른다는 비상식적인 추측이었어. 만약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났고, 지금의 내 손으로는 아무것도 돕지 못할 상황이라면, 나는 무엇을 어찌하여 널 구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으로 머리가 꽉 차서…….”
버석한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가는 쓴웃음과 함께 이어졌다.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이 정도로 무력한 기분을 느꼈던 건 펠레타에 처음 도착했던 이후로 처음이었어.”
유더의 머릿속에 마법사 헬렘이 언급했던 소년 시절의 키시아르가 또다시 떠올랐다. 키시아르의 입으로 직접 들은 그때의 이야기는 아주 짧은 파편만으로도 가슴을 조이는 듯한 감각을 선사했다.
“그런 것치고는 하나도 티가 나지 않으셨습니다만.”
“숨기는 건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요즘은 잘 통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농담처럼 내뱉었지만 웃음기는 없었다.
유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 건조하게 물었다.
“드디어 답을 알게 되셔서, 어떠십니까.”
“진실에 가까울수록 맛이 없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지.”
“사실, 저는 단장님께서 기만을 이유로 저를 내치고 화를 내신다고 해도 감수할 생각으로 여기 왔었습니다.”
“스스로도 모를 버릇까지 전부 다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도 나를 아직 잘 모르나 보군.”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믿지 못할 답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신중을 기하는 건 기만이 아니라 미덕이네. 애초에 네가 쥐고 있는 비밀의 답을 찾겠다고 말한 건 내가 아니었던가?”
“…….”
“물론 화가 나고, 대단히 고통스러우나 그건 너를 향한 감정이 아니야.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말을 할 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늘하고 차가웠다. 그러나 그 시선은 이내 찰나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유더에게 향하는 간절한 시선만이 남았다.
“내가 네게 전하고 싶은 답은 하나뿐이야. 답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 주기까지 겪었을 모든 순간을 견디고서 내 앞에 건강히 살아 숨 쉬는 모습으로 서 주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
감사.
“그리고…… 허락한다면 지금의 너를 안고 싶다는, 사랑하는 사내로서의 무력한 갈구.”
그리고 갈구.
키시아르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모든 말들이 불에 타는 듯 뜨겁고도 고통스러웠다. 말에도 온도가 있었다면 유더는 이미 전신이 재가 되었을 터였다.
“지금 그곳으로 가도 될까.”
유더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대답 대신 제 쪽에서 먼저 의자를 박찼다.
키시아르의 목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꽉 끌어안은 순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흘러넘쳤다. 이곳까지 품고 온 두려움, 어두운 걱정, 과거에 부식되었다 여겼던 모든 낯설고 간절한 떨림들.
그것이 사랑이라면, 유더는 키시아르를 분명히 사랑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한 몸처럼 엉킨 채 숨을 몰아쉬었다…….
“제가 또 이겼으니 이번에는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참 뒤, 유더는 키시아르의 품에 안긴 채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승패와 상관없이 유더가 무슨 말을 해도 키시아르는 아마 들어주었을 테지만, 알면서도 굳이 그 이유를 댔다.
“말해 보게.”
“저기 있는 쓸모없는 금서들은 이제 그만 반납해 주십시오. 답은 제게 있지, 저런 책 속에 있지 않습니다.”
“……나단이 알려 줬군.”
“절 경계하기 위해서라며 알려 주시더군요. 주군을 망치는 외부인을 두고 보기 어려웠을 테니 그분다운 훌륭한 결단입니다.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키시아르의 입술이 씁쓸하게 비틀렸다.
“금서들만 있는 건 아니야. 시황제 시절 쓰인 초대 황후와 궁인들의 일기와 기록들도 있다고. 황궁 비고가 아니면 찾을 수 없는 희귀한 기록들이지.”
“그건 몰랐군요. 하지만 그래도 금서는 반납해 주시죠. 뼈만 발라낸 사람을 억지로 보존시키는 금단의 마법 따위를 아무리 보아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테니까요.”
“알겠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키시아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놓다 만 판을 내려다보았다.
“이걸 치우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아쉽군.”
그 말 속에 섞인 사감을 유더는 조금 다른 의미로 판단했다.
“두 번만 두고 끝내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세 번째 판은 언제든 요청하시면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아니. 생각해 보니 천천히 새로운 게임을 하는 쪽이 이야기하기에는 더 좋을 수도 있을까.”
고민하던 사내가 판을 재차 돌렸다.
“그래. 게임을 다시 시작하지. 다만 이번에는 말을 하나 잡을 때마다 내 질문에 답을 하나씩 해 주는 쪽으로. 어떤가?”
“좋습니다.”
어차피 유더 쪽에서도 이 정도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은 없었다. 게임을 토대로 한다면 전달하기 더 쉬울 테니 좋았다.
“내가 졌었으니 이번에도 내 쪽에서 먼저 두어도 되겠지?”
“그건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만…… 게임을 하려면 반대쪽에 앉아야 하는데 이제 놔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임을 다시 시작하려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유더를 무릎에 앉힌 사내의 팔은 영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특별패를 적용하지 않는다면야 이 자세로 두어도 상관없지 않나?”
“상관이 왜 없습니까. 멀어서 말을 잡기 불편합니다.”
“판을 계속 돌리면 돼.”
“그렇게까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결국 두 사람은 한자리에 앉아서 전술 게임을 두는 희대의 바보 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