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69화 (569/805)

569화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전술 게임의 본래 이름은 ‘이므란 유트 메시스’라고 한다. 고어에서 파생된 길고 어려운 이름이라 그것을 제대로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임의 패는 기본적으로 8종 24개로, 2인이서 할 때는 대부분 거기에서 2종의 패를 빼고 6종 18개로 진행한다. 유더는 군주, 장군, 재상, 기사, 사제, 그리고 일반패로 이루어진 6종의 패를 차례로 훑었다.

물결 같은 무늬를 지닌 매끄럽고 아름다운 돌을 깎아 만든 이 말들을 유더는 이전 생에 전술 게임을 배우며 여러 번 만진 적이 있었다.

키시아르는 단장 자리에서 물러나 펠레타로 떠날 때 단장실에 있던 물건 대부분을 그대로 두고 갔는데, 이 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더는 이후 키시아르가 단장실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게 되면서 쓸 일이 없어진 전술 게임 판을 서랍에 넣어 두고 영원히 꺼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건 그저 기억일 뿐이며 지금의 몸으로는 분명 처음 만지는 패들임을 알면서도 말들이 손에 익숙하게 감긴다고 느끼는 건 어째서일까.

희고 검은 패. 서로를 마주 보고 앉은 단장실의 풍경. 그리고 눈앞의 키시아르 라 오르. 모든 것이 이전과 같았고, 또 달랐다.

유더는 손에 쥔 말을 움직였다. 일반패 하나를 전진시키자 키시아르도 손을 들어 자신의 하얀색 일반패를 움직였다. 검지가 도드라지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패를 쥐는 모습도, 말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단 하나도 바뀌지 않는 표정도 유더가 기억하던 것과 모두 똑같았다.

‘그래……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키시아르가 처음 게임을 시작하고 상대의 의중을 가볍게 살피고자 할 때 어떻게 하는지.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패를 사용하는지. 어떤 종류의 패를 어떤 식으로 잘 움직이는지도 유더는 모두 알고 있었다.

키시아르와 나누었던 수많은 게임 경험이 쌓이며 체득했던 정보들이 수면 위로 발버둥 쳐 올라오듯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 익숙한 궤적들 속으로 유더는 망설임 없이 침잠해 들어갔다.

딱. 키시아르가 놓은 하얀 패가 곧바로 유더의 검은 패에게 잡혔다. 그러자 검은 패의 뒤에 있던 또 다른 하얀 패가 같은 편의 희생을 딛고 기회를 잡으려 움직였다. 하지만 검은 패는 그조차도 꿰뚫어 보고 있었던 듯 유유히 다른 말을 움직여 피했다.

키시아르가 패를 놓는 속도는 느린 듯 일정했으나 유더는 거의 고민하지 않고 바로바로 공격을 받아 쳐 냈다. 덕분에 게임 속도는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순식간에 세 개나 되는 패를 잃은 뒤, 비로소 손을 멈춘 키시아르가 시선을 판 위에 고정한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전술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군.”

그의 시선이 움직여 유더의 손을, 그리고 뒤이어 얼굴을 보았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지를 이미 예측하고서 대응하는 쪽에 가까워 보이는데.”

일순, 유더의 심장을 타고 짜릿한 감각이 번졌다.

‘역시.’

키시아르 라 오르라면 충분히 이 게임만으로 이면의 진실을 읽어 낼 줄 알았다.

유더는 서서히 크게 뛰는 심장 박동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패배를 선언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수야 없지.”

키시아르가 새로운 패를 놓았다. 딱 소리를 내며 판 위에 올라선 패는 이전과 다소 다른 방향성을 띠고 있었다.

“어디, 이번 수에 대한 반응은 어떻게 돌아올지 볼까.”

이번에 키시아르가 움직인 것은 사제의 패로, 보통은 군주와 장군의 사이에 놓고 게임의 후반이 될 때까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 것을 잡아먹어 보란 듯 내민 건 그가 평소라면 두지 않을 수를 사용하여 유더가 어디까지 자신을 읽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함이리라.

‘그래. 평소의 키시아르라면 쓰지 않을 수지.’

보통 사람이라면 키시아르가 생각 없이 자살수를 놓았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빈틈을 파고들기 위해 다른 패들을 전진시켰으리라. 하지만 유더는 반대로 자신의 사제패도 내세워 다른 패들을 보호하는 위치에 놓았다.

‘여기서 전진하면 바로 잡아먹혔겠지. 떠보느라 놓는 수인 척하면서 사실 뒤에 칼을 숨겨 놓는 방식을 쓸 때 사제패를 잘 쓴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고.’

유더가 이번에도 자신의 수를 꿰뚫었음을 알아본 키시아르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것도 안다 이건가. 그러면…….”

키시아르의 패들이 전부 다 목적도, 의지도 없이 그저 판을 어지럽히기 위한 의도만을 띤 것처럼 마구잡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쯤은 정말로 키시아르 본인조차 아무 생각 없이 혼란을 위해 놓은 수인 듯했고, 나머지 반은 그런 척하며 의도를 품은 수였다. 마치 전술 게임을 처음 배운 아이들이 두는 게임처럼 판 위가 어지러워졌다.

과연 이때부터는 유더 또한 대응을 위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유더의 검은 패들도 하얀 패에 잡혀 죽는 개수가 늘기 시작했다. 유더는 이전의 두 배쯤 빠르게 움직이는 키시아르의 손에 연달아 쓰러지는 검은 패를 바라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파악당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아군까지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적을 상대하기란 두 배 어려울 텐데, 그 와중에도 여기까지 해내다니.’

역시 키시아르라고 해야 할까. 절대적으로 유리한 건 분명 유더 쪽임에도 이렇게 되니 다소 위기감이 느껴졌다. 유연하게 판을 흔들어 순식간에 자신 쪽으로 흐름을 가져가려 드는 솜씨가 그야말로 대단했다. 유더가 조금이라도 당황하여 실수했다면 그대로 흐름을 빼앗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내가 질 이유가 될 순 없지.’

유더는 철저하게 이전 생에 보았던 키시아르의 게임 방식을 떠올려 그대로 대응해 나갔다. 아무리 혼란이 눈과 머리를 어지럽히려 들어도 결국 같은 키시아르의 방식이다.

기억 속에는 분명 답이 있었다.

검은 말들이 혼란으로 가득한 판 위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서로 맞서며 이를 드러내는 두 개의 패들은 마치 거울을 마주한 듯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유더의 말들이 판을 어지럽히는 패들을 손쉽게 잡아채고 나자 키시아르에게 남은 것은 승기를 뒤집기 어려울 만큼 적은 수의 말뿐이었다.

여기서 가장 손쉬운 승리 조건은 하나였다. 본디 두 개 있었지만 지금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키시아르 측 마지막 군주의 패, ‘이믐’을 잡는 것이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군주패를 쓰러트리며 끝을 고했다.

“……승리를 선언합니다.”

“아쉽군.”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일반패를 툭 내려놓았다. 유더는 그 일반패가 그대로 움직였다면 자신의 이믐, 즉 군주의 패 하나를 죽였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게 언제 저기까지 가 있었지?’

유더가 왕 하나를 잃는다 해도 그것이 둘 다를 잃은 키시아르에 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 전쟁이라 생각한다면 이기기는 했어도 이쪽도 왕과 여왕 중 하나를 잃은 셈이니 완벽하게 기분 좋은 승리라 보기는 어려웠다.

잠도 제대로 자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너무나 잘 꿰뚫고 있는 적을 상대하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기어이 여기까지 해낸 눈앞의 사내를 유더는 고요히 응시했다. 키시아르가 짐짓 농담처럼 말을 걸었다.

“이겼는데 좀 더 기뻐하지 않고?”

그에게 이 게임으로 승리한 건 처음이었지만 애초에 이건 자신의 방식대로 싸워 이긴 게 아니었다. 승리하기 위해 게임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으니 기뻐할 이유가 없었다.

“제가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는 건 단장님께서 제일 잘 아실 텐데요.”

유더의 말에 키시아르가 말없이 웃었다.

“두 번째 판에서는 특별패를 적용하겠습니다.”

유더는 두 개의 패들을 다시 색깔별로 분류했다. 이번에는 판을 거꾸로 돌려 흰색 패가 유더에게로, 검은색 패가 키시아르에게로 갔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 두 사람은 각자의 패들을 제 위치에 놓고 나서 상대방 몰래 특별패를 골랐다.

유더는 일반패 중 하나를 특별패로 지정한 뒤 제자리에 놓았다.

‘키시아르의 특별패는 높은 확률로 기사패겠지.’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판에서 특별패 규칙을 적용하지 않은 건 우선 이 모든 걸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내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겠지.”

딱. 돌과 판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키시아르가 먼저 말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어떤 식으로 이 게임을 하는지를 이미 잘 알고 있어. 그렇지?”

“맞습니다.”

딱. 유더 또한 그의 말 앞에 자신의 말을 내보내며 대꾸했다.

“실력과는 다른 문제이지요.”

딱.

“이미 적에 대해 알고 있다면 고전할 일이 없을 테니까.”

딱.

“네. 그리고 그 꿈도 제게는 이와 비슷합니다.”

“…….”

다음 말을 움직일 차례였던 키시아르의 손끝이 잠시 멈칫했다. 유더는 그의 앞에 놓인 말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단장님이 보신 꿈은 제게 있어 패배했던 게임의 끝과 같다는 뜻입니다. 다음 패는 움직이지 않으실 겁니까?”

“……잠시 절묘한 수를 고민하느라 말이야.”

키시아르의 손가락이 패 하나를 잡아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 패와 판이 부딪치는 소리는 이전에 비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희미했다.

유더는 기다릴 것 없이 뒤이어 곧바로 자신의 패를 잡아 움직였다.

딱.

“저는 게임을 잘 두는 편은 아니었지만, 같은 방식으로 두 번 패배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키시아르가 새로운 패를 집었다. 느리게 움직인 손가락이 다시 딱 소리를 내며 판 위에 말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한 번은 패배했었다는 거고.”

“누구나 모든 게임에서 이기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네가 아까 두었던 방식은 수많은 패배를 딛고 익숙해진 사람의 방법이었지.”

키시아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건 내 방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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