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68화 (568/805)

568화

“저쪽 책상 아래에 공작님께서 부탁한 것들을 두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공작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건 당신뿐일 테니, 살핀 뒤에 판단하십시오.”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몇 개의 책더미와 자료가 숨겨져 있었다.

유더는 하나같이 오래되어 반쯤 썩은 듯한 냄새를 풍기는 그것들을 눈으로 훑은 뒤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책 몇 권을 집었다.

고어는 잘 모르지만, 다행히도 그 책들의 표지에는 현재의 글로 적힌 제목도 작게 붙어 있어 뜻을 알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성서 첫 번째 장의 시대. 신의 권능은 열 번 찢긴 사지를 어떻게 부활시켰나? 신성력의 금기를 범한 한계 실험>……. <죽음을 초월하는 마법의 고찰과 증명-인간을 대상으로->…….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 <생명의 완벽한 보호와 죽음의 보존까지 원하는 이를 위한 마법의 방법론적 사고>…….’

언뜻 보면 중구난방으로 아무 주제나 집어 온 듯 보였다. 하지만 진짜로 그럴 리는 없다. 이 책들을 가져오라 시킨 이에게는 그것들을 골랐어야만 했던 분명한 의도가 있었을 테니까.

유더는 그것들을 도로 내려놓고 다른 책과 자료들의 제목도 빠르게 읽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몇 권을 제외하면 대부분 제목이 비슷비슷했다.

‘치료, 죽음, 보호, 그리고 시간.’

유더는 유독 많이 보인 단어들을 차례로 되뇌었다.

‘시간은 내가 초대 타인 공작의 실험 일지에서부터 신경 쓰인다고 언급했었던 주제니 그렇다 치고 나머지는…….’

누군가를 절대적으로 보호하거나, 혹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한 강력한 치유를 할 수 있는 금기의 방법을 고찰한 듯 보이는 책들뿐.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키시아르는 꿈에서 본 유더가 왜 사형수였는지 알아내려 하기보다는 그런 일이 다시 찾아올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을, 혹은 같은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해결할 수 있을 답을 찾고 있었던 듯했다.

아주 직접적이고도 과격하게도, 이런 위험한 책들마저 뒤져 가면서.

유더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생명의 완벽한 보호와 죽음의 보존까지 원하는 이를 위한 마법의 방법론적 사고>를 재차 집어 들어 펼쳤다.

그 책은 제목이 고어로 적혀 있지 않은 책 중 하나였다. 제목이 그럴싸하고 내용을 쉽게 읽을 수 있을 듯하여 선택했는데 뜻밖에도 내부에는 그림이 글보다 더 많았다. 그리고 하나같이 황당무계하고 잔인한 내용뿐이었다.

유더는 그려진 삽화를 훑으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책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여기서 뭔가를 얻어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럴 수 있는 이라면 아마 쾌락을 위해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 내지는 이 책을 쓴 마법사만큼 미쳐 버린 또 다른 마법사뿐이리라.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책을 덮고 거칠게 내던졌다.

‘여기 있는 책이 전부 금서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건 분명히 금서겠지. 왜 금서로 지정되었을지 알 만하다.’

하나만 훑었을 뿐이지만 다른 책들을 더 살피고 싶은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유더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이, 그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키시아르 라 오르가 이번 꿈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어느 정도의 각오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이 책만 보아도 확실해졌다.

그는 그야말로 그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려 하는 중임이 틀림없었다.

오직 유더 아일을 위한 답을 찾기 위해서.

각오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감았다.

“……마차가 오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유더가 책들을 통해 파악할 건 전부 파악하기를 기다렸던 듯이 나단 주커만이 입을 열었다. 유더의 귀에는 아직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나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오감이 발달한 소드마스터가 그렇다면 그 말이 맞을 터였다.

대신전으로 향했던 키시아르가 곧 돌아온다. 유더는 책을 본래의 자리에 돌려놓았다.

“주커만 경의 조언, 대단히 감사합니다.”

“판단은 내리셨습니까.”

“저는 어차피 단장님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드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들을 보지 못했더라면 제가 지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갖기는 힘들었겠지요.”

어차피 이 책들을 보든 말든 유더가 하려던 일이 변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가 너무 늦게 오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과 아닌 건 차이가 컸다.

“그러니 주커만 경 쪽에서 크게 중요한 용건이 없다면 나중에 다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단 주커만의 시선이 유더의 얼굴을 응시했다. 충직한 기사는 잠시 후 조용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폈다.

“그러죠.”

기사가 자리를 비우고 유더는 홀로 남아 단장실을 돌아보았다. 키시아르의 취향대로 꾸며진 이곳은 그에게도 지난 생 내내 함께했던 공간이라 익숙하기 그지없는 장소였다.

눈만 감으면 이곳의 어느 장소에 어떤 물건이 있었는지 지금도 선명히 떠올랐다. 그 자취를 쫓아 걸음을 옮긴 그는 이내 아름다운 곡선을 띤 장식용 서랍장 앞에서 멈추었다.

첫 번째 칸을 열자 상자 속에 가지런하게 정리된 어떤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유더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들고서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면 단장님.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드물게도 들뜬 듯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술과 단장 스티버 렌들리의 목소리와 함께 단장실의 문이 열렸다. 홀로 들어서던 장신의 사내는 마석 난로 뒤쪽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림자를 보고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셨습니까.”

“누군가 기다리는 기척을 느끼기는 했지만, 오늘은 당연히 나단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아쉽게 되었습니다만, 접니다.”

유더가 무표정하게 대꾸하자 겉옷을 벗던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쉬울 리가. 이 경우는 예기치 못한 행운이라고 해야겠지?”

어제 그렇게 헤어진 뒤 처음으로 보는 얼굴이었고, 처음 나누는 대화였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듯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매끄럽기도 했다.

“대신전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교황께서 부르셨다고요.”

“그래. 신검의 새로운 주인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셔서 말이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신의 곁으로 떠나기 전 신검의 주인을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하시더군.”

“생각보다 시원하게 인정해 주셨군요. 다른 이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았겠습니다.”

지금의 교황은 나이가 무척 많고 정치적인 생각은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성향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조용하고 독실하지만 달리 보자면 그 어떤 싸움에도 끼어들지 않는 중립적인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사실은 정말로 개인적인 자리였을 뿐이지만, 공교롭게도 오늘의 만남이 소문을 탔는지 굳이 그 자리까지 끼어들어 온 이들이 많더군. 덕분에 내가 신검의 주인임을 증명하기 오히려 편해졌지. 수많은 증인 앞에서 그저 검을 꺼내 보여 주기만 하면 되었으니 말이야.”

그 말의 이면을 유더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교황 측에서는 오늘의 만남을 극비리에 추진하려 했지만, 아주 공교롭게도 소문이 퍼진 덕에 모두의 앞에서 신검을 뽑는 모습을 보고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는 거군.’

그 ‘공교로운 소문’이 어디서 나왔을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이 되었다.

‘황제와 키시아르의 합작품이겠지…….’

교황과 그 측근들만 이 사실을 알았다면 몰라도, 다른 이들도 그 모습을 보았다면 소문은 더 이상 소문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키시아르는 수면제와 두통약의 힘을 빌리고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여유로운 얼굴로 그가 가야 할 길을 걷고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나를 기다린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나? 그 전술 게임판은 또 뭔지도 말이야.”

검집을 풀어 마석 난로 위에 올려 둔 사내가 유더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색으로 타닥이는 마석 난로 앞에 선 사내의 그림자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아른거렸다.

“단장님께 드릴 이야기가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눈에 띄더군요.”

“그게 그리 눈에 띌 만한 장소에 있지는 않았을 텐데.”

“제 눈에는 잘 띄었습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서랍에서 꺼내 온 전술 게임의 판과 패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두 사람이 게임을 할 때의 규칙을 기준으로 꺼낸 패의 숫자와, 시작 위치를 모두 완벽하게 맞춰 세운 판을 보며 키시아르의 눈이 일순 조금 가늘게 휘었다.

“어릴 때 조금 배웠었다더니, 너무 익숙해 보이는걸.”

“거짓말은 아닙니다.”

유더의 기준으로는 이전 생의 10년 전에 배운 게임이니 어릴 적이라 해도 틀린 건 아니다. 키시아르가 죽은 뒤로는 그 게임을 즐긴 적도 없으니 정말로 교양 삼아 조금 배운 셈이었다.

키시아르가 손을 뻗어 가장 가까운 위치에 놓인 군주의 패를 건드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불쑥 흘러나온 것은 제국의 오래된 격언이었다.

“-전술 게임만큼 이야기를 쉽게 만들어 주는 도구는 없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 라 오르도 유더에게 전술 게임을 가르치며 같은 격언을 말한 적이 있었다.

‘세크리트 황제 시대의 명재상 파르나시시스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상대와 전술 게임을 했다지. 진실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때로는 게임을 하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야.’

물론 유더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듣자마자 곧 그 말을 거의 잊었다. 하지만 오늘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어째서인지 그 말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래. 오랜만에 해 볼까.”

키시아르는 더 묻지 않고 유더의 앞자리에 앉았다.

빛나는 금빛 머리칼이 평소와 달리 조금 흐트러진 채 이마 위를 덮은 광경이 홀릴 듯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더는 자신의 앞에 놓인 검은색 패를 잡았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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