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화
“아까 네가 말했던 것처럼 알고 싶지 않은 걸 알게 되는 게 물론 좋은 일만은 아니야. 하지만 모른 채로만 사는 것도 행복하지만은 않지 않을까? 난 내 능력을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해.”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 말은 유더의 마음속에 어떤 파문을 남겼다.
‘전부 아는 것도 좋지 않지만 모른 채로 사는 것도 행복하지만은 않다…….’
자신이 뭘 모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면 모를까, 인간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 앞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당장 유더 자신조차도 이전 생의 진실을 알기 위해 골몰하고 있지 않던가.
그리고 그 진실 속에는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그에게 다 알려 주지 않았을 어떤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전의 나도 키시아르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던 걸 상당히 답답해했었는데.’
키시아르가 야밤을 틈타 나가는 곳들은 어디인지, 왜 유더에게 단장 자리를 넘기고 펠레타로 갔으면서도 잊을 만하면 자꾸 몰래 찾아오는지, 정말로 반역을 준비하기는 했었는지……. 잊었던 기억 속에서 젊었던 유더 아일이 궁금해했던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뒤엉켜 머릿속을 흐르기 시작했다.
알고 싶어 했기에 카치안 황제의 명에 그대로 따르지 않고 키시아르에게 기회를 주려 했으리라. 모르는 채로 사는 게 그리 좋지 않았기에 키시아르를 볼 때마다 답답한 기분을 느꼈겠지.
그 모두가 답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온 결과였다.
심지어 그 마음은 그때 이후로 많은 걸 잊었고, 또 잊으려고 노력하다 죽고 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한때는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아쉬워하지 않으려 했지만…… 정말로 아쉽지 않았다면 지금 이러고 있을 리 없다.
그래. 칸나의 말이 확실히 맞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사는 건 그리 행복하지 않다.
‘그리고 지금의 키시아르도 당연히 그렇겠지.’
유더가 이전 생에 대한 진실의 파편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변화를 겪기 시작했듯, 유더의 비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 이상 키시아르 또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지적 유희와 호기심을 즐기고, 벽을 무너뜨리는 게 재미있다며 유쾌하게 웃었던 사내지만, 동시에 그가 ‘유더 아일’에 한해서는 얼마나 평소와 달라질 수 있는지 유더는 이제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그가 아는 부분은 단순히 감정적인 부분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고민을 했던 이전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제 유더와 그의 사이에 마지막 남아 있던 망설임의 벽조차 모두 사라졌고 감정을 넘어 서로의 육신조차도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유더는 현생의 다른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상대를 간절히 원했던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제가 어디까지 내어 줄 수 있는지, 그리고 또 상대의 어디까지를 원할 수 있는지 그 모든 걸 집념에 가득 차 알아냈던 순간들을, 그리고 그때에 얻었던 환희와 눈물까지 모두 기억했다.
그건 고작 몸을 나누었던 경험일 뿐이라기에는 너무나 큰 변화였다. 몇 번이고 계속 얽혀 있는 동안 끊임없이 느꼈던 일체감을, 주고받던 고통을 제쳐 놓고서 그에 대해 판단할 수는 없었다.
유더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래…… 상황이 내게 완벽하게 유리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건 과도한 욕심이라는 걸 인정하자.’
어차피 이 세상이 유더에게 친절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키시아르나 황제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유더 또한 행운보다는 불운 쪽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예기치 못한 불운들 앞에서 유더의 대응은 항상 같았다. 그저 평소의 자기 자신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쓸데없이 복잡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 복잡하게 굴지 말자. 유더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자꾸만 뒤로 물러나려 하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현재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번 일이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럭저럭 예상한 대로 일이 굴러갔던 지금까지가 신기했던 거겠지. 당장 내일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몰라.’
설령 유더가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알아낸다 하더라도 키시아르가 꾼 꿈의 진실을 알렸을 때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다. 불확실한 부분을 두려워하며 회피해 보았자 제게 생길 이점이 없다는 뜻이었다.
‘키시아르가 본 건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내 죽음이었어. 아직 의문점이 많이 남아 있는 키시아르 쪽이 아니니 굳이 말해야 한다면 이쪽부터 언급하는 게 내게는 다행일 수도 있지.’
물론 그것을 알게 된 키시아르가 그간 해 왔던 추측들을 토대로 수많은 생각을 하기야 하겠지만, 확실한 답을 알 수 없는 일에는 매몰되지 않기로 했다.
‘본래는 내 쪽에서 모든 걸 다 알아낸 다음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무슨 상황이 닥쳐도 이전 생보다 나빠질 것도 없고.’
이 상황이 아무리 두려워도 예전보다 나빠질 건 없다는 생각은 상황을 오히려 제법 긍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데 몹시 도움이 되었다.
이런 배부른 고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그간 이 지나친 온기에 너무 익숙해졌다는 데 있었다. 지금이 너무나 만족스러운 나머지 욕심이란 게 가슴에서 크게 싹을 틔운 탓이었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와는 이런 식으로 물러나 서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유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나 버렸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그런 우려를 느낄 일은 없다. 그걸 위해 여태까지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키시아르가 늘 말했듯, 사람은 살아 있어야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설령 진실을 알게 된 키시아르가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그것만은 변치 않을 터였다.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리고 여태까지 보아 온 키시아르 라 오르를 믿자.
결론을 내린 뒤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장님. 유더 아일입니다.”
단장실 문을 규칙적으로 두드린 뒤 문을 열었다. 칸나의 말대로라면 아까 전까지는 분명 이곳에 있었을 키시아르가 보이지 않았다. 일을 할 때는 늘 옷걸이에 걸려 있던 단복 겉옷이 없는 걸 보면 자리를 비운 지 꽤 된 듯했다.
‘어디에 간 거지.’
유더는 조심스럽게 내부를 훑었다. 그리고 평소와 다른 점 하나를 새로이 발견했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음을 알리듯 미약하게 타오르는 마석 난로의 불씨 위쪽, 늘 신검이 올라가 있던 투명한 검대가 비어 있었다.
‘신검이 없어. 가지고 나간 건가.’
어디로? 의문이 들었으나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아일 경?”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익숙한 나단 주커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는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물었다.
“단장님께서 신검을 가지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교황께서 신검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요청하셨기에 대신전에 가셨습니다.”
“혼자 가셨단 말입니까.”
“마병단의 다른 분들과 함께 가셨습니다만.”
몰랐느냐는 듯 의문을 미약하게 드러낸 남국인 기사의 눈을 보며 유더는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런 일이라면 내가 아직 업무에 복귀하지 않은 상태니 당연히 다른 사람들과 갔겠지. 상황이 상황이라 쓸데없이 너무 동요한 티를 냈어.’
“알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깐 앉으시죠.”
물러나려 했던 유더를 붙잡은 건 뜻밖에도 나단 주커만 쪽이었다.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기사가 눈짓으로 소파 쪽을 가리켜 보였다.
“어차피 곧 돌아오실 테니 차를 드시며 기다리시는 쪽이 낫겠습니다. 저도 당신과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 잠깐 이야기나 하시죠.”
“……알겠습니다.”
나단 주커만이 제게 할 말이라. 짐작 가는 게 많다면 너무 많고, 없다면 또 없어서 문제였다. 유더는 아무 말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앉았다.
잠시 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능숙하게 찻잎을 우려낸 사내가 손 크기에 비해 다소 조그맣게 보이는 찻잔을 유더의 앞에 내려놓았다. 어디선가 가져온 과자도 함께였다.
유더는 과자에는 손을 대지 않고, 찻잔에만 손을 올렸다. 몇 모금 정도 마시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언제쯤 먼저 입을 열지 미약하게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을 때쯤, 나단 주커만이 비로소 말을 꺼냈다.
“공작님께서 어제부터 제게 다소 평소와 다른 부탁들을 하시더군요.”
“……어떤 부탁 말입니까.”
“각성자가 되신 이후로 끊었던 수면제를 요구하셨고, 두통약도 가져가셨습니다. 몇 가지 고어로 된 마법서와 성서를 기반으로 연구한 오래된 역사서를 가져오라 시키시기도 했지요. 주로 금서로 지정되어 황궁 서고가 아니면 제목조차 볼 수 없는 희귀한 서적들이었습니다.”
“…….”
“저는 그 이상한 부탁들이 아일 경과 어쩐지 관계가 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면제, 두통약, 그리고 금서.
하나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역시 키시아르는…… 이후로도 그 꿈을 계속 꾸고 있었던 건가?’
마시는 차에서 향기로운 아지랑이가 올라오는데도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유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주커만 경의 추측이 틀리지 않을 것 같군요.”
“당신이 이전에 제게 그리 말하신 적이 있었지요. 늘 당신을 경계하고, 공작님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입니다.”
“…….”
“공작님께서 제가 이 건에 대해 아무 조언도 하지 않기를 원하셨기에 본래대로라면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당신을 경계하기 위해 말씀드립니다.”
무뚝뚝하고도 반듯한 얼굴로, 남국인 기사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이 어쩌면, 이 마병단과 펠레타 기사단을 넘어 저와 공작님, 그리고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느낌이란 건 때로 보이는 것을 뛰어넘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일순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공기가 멈추는 듯했다. 유더는 조용히 나단이 내뱉는 말들을 들었다.
“저조차 했던 생각을 공작님이라고 아주 생각지 않으신 적은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아무 말 않고 계신다는 건 당신이 누구든,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의지시겠지요.”
“…….”
하나하나 무게를 실어 내뱉는 말들이 귀를 깊이 파고들었다.
“저쪽 책상 아래에 공작님께서 부탁한 것들을 두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공작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건 당신뿐일 테니, 살핀 뒤에 판단하십시오.”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몇 개의 책더미와 자료가 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