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화
“……유더. 내가 너에 대해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될 뭔가를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그것과 관련된 게 지금 네가 그렇게 고민하는 이유야?”
그 말은 맞기도 했고 틀리기도 했다. 칸나는 아직 유더가 감추고 있는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될 뭔가’를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유더가 지금 이렇게 반쯤 정신이 빠져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뭔가를 보아 버린 한 사내 때문이니 크게 보면 틀리지도 않았다.
그 어떤 고문이나 무기보다 효과적으로 유더를 입 다물게 만드는 데 성공한 칸나의 표정이 몹시 심각하게 변했다.
“알겠어. 그렇게까지 그것 때문에 고민된다면 말할게. 하지만 먼저 이해해 주었으면 싶은 게 있는데, 그걸 읽은 건 절대 내 본의가 아니었단 거야.”
정말로 의도한 바는 하나도 없었으며, 그건 그저 능력이 갑작스레 멋대로 튀면서 발생하게 된 사고에 가깝다는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던 칸나가 이마에 맺힌 땀을 문질러 닦아 냈다.
“그러니까…… 듣고 나서 날 너무 꺼리거나 피하진 말아 줘. 난 진짜 아무것도 읽고 싶지 않았단 거…… 꼭 믿어 줘야 해.”
“……알겠어.”
스읍, 후우. 칸나가 두 주먹을 움켜쥔 채 깊이 심호흡을 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이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진실을 고백했다.
“…이 ……는 걸 봤어.”
“뭐라고 말했는지 안 들려, 칸나.”
“단장님이! 네 그 장갑을 입으로 물어서 벗기는 걸 읽었다고!”
“…….”
일순 유더의 표정이 멍해졌다. 칸나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그 장갑을 낀 채로 단장님 어, 어, 얼굴을 막 만지고! ……그게 전부야! 너와 스친 순간에 장갑에 손끝이 닿아서 딱 그것만 읽혔으니까! 진짜로 이것 말고는 없어!”
말을 끝내자마자 필사적으로 제 눈을 피하며 얼굴을 감싸 감춘 칸나를 향해 유더는 짧은 숨을 토해 냈다.
과연 이전에 대화를 나누었을 때 예상했던 대로, 칸나가 그에게서 읽어 낸 정보는 이전 생과 조금도 연관이 없었다. 다만 그동안 생각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개인적이고 내밀했으며 남부끄러운 장면이었다는 사실이 추측의 영역을 뛰어넘었을 뿐이었다.
이 기분을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간 왜 그토록 칸나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래. 서부에서 키시아르가 그런 적이…… 있기는 했지.’
하필 그때도 유더는 키시아르가 유드레인이라는 이름을 꿈꾸다 말고 입에 올린 일로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었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유더 아일이 오직 당신만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말하였을 때, 자신 또한 마찬가지임을 고백하던 사내의 한 점 흔들림 없던 눈동자가 연이어 생각났다.
그 뜨거운 격정. 짐승처럼 장갑 끝을 물어 벗겨 내고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이처럼 거친 손가락과 흉한 손등에 입을 맞추던 순간 느꼈던 충격적인 자극. 그때 느꼈던 견뎌 내기 벅찰 만큼 거대한 감정들.
유더는 검은 장갑으로 감싼 제 손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제가 그때와 똑같은 두려움에 또다시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 우습도록 실감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깊겠지.’
그렇다면 말없이 물러났던 키시아르 또한 같은 심경을 느끼고 있을까. 두려움 속에서 익숙하게 자기 자신을 고통스레 내리누르며 그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 생각을 한 순간, 추위와 어둠 속에 갇혀 영원히 굳어 버린 것만 같던 심장이 욱신 조였다.
이 모든 벽과 고통이 마땅히 외면하지 않고 해결해야 할 자신의 몫임을 안다. 그러나 알면서도 지금만은 모든 걸 다 없었던 듯 모른 척한 채 키시아르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그와 자신 사이에 처음부터 아무런 비밀도, 벽도 없었던 듯 살 수 있다면. 그럼에도 지금과 같은 것들을 편히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익숙해진 체향이 몸을 감싸는 안온함 속에서 망설임 없이 눈을 감고 잠들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유더?”
칸나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상념이 끊겼다.
‘…알아. 그저 망상일 뿐이지. 나답지 않은 짓을.’
유더는 머릿속을 떠돌던 찰나의 망상을 집어치우고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화난 거 아니지?”
“왜 네게 화내겠어. 안 그럴 거라고 했잖아.”
“……그, 내가 그런 걸 읽은 게… 껄끄럽지 않아? 아, 아니면 내가 혹시 뭘 오해한 건가? 사실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는데 내 능력이 잘못 발휘되었다든가……!”
칸나의 눈 속에 흔들림과 걱정, 그리고 묘한 희망이 공존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유더와 단장이 사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며 자신이 뭔가를 잘못 읽어 오해했다고 말해 주는 쪽을 더 바라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유더는 이전 생의 마병단원들을 떠올렸다. 이맘때쯤 그들은 유더가 키시아르와 자주 몸을 섞는다는 소문을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암암리에 계속해서 제 등 뒤에 따라붙는 데 너무나 익숙했기에, 유더는 저와 키시아르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이토록 조심스러워하는 칸나의 반응이 상당히 특이하게 여겨졌다.
그녀가 그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정말로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예전에는 유더가 단장과 몸을 섞게 된 이유를 알고 싶어 한 이도, 그게 사고였다는 걸 아는 이도 없었다. 유더 또한 그런 일들이 입에 오르내리는 걸 원치 않았다. 어차피 말해 보았자 아무도 듣지도, 믿지도 않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해가 아니라면.”
유더는 칸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네가 읽어 낸 게 전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맞다고 인정한다면 네 쪽에서 오히려 나를 껄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안 그래!”
칸나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무, 물론 엄청 놀라기는 했지. 내가 잘못 읽은 거였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몰라. 네가 혹시 단장님의 하룻밤 장난감이 되어 버린 건 아닐지 잠깐 심각하게 의심한 적도 있었고, 단장님의 소문과 신분 문제 같은 걸 생각하면 그게 정말 괜찮은 관계인지… 난 이대로 모른 척하고 지내도 되는지 엄청 고민을……… 아, 아니!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심상치 않은 말들을 빠르게 중얼거리던 칸나가 유더의 눈을 보고서야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단장님이 너랑 춤추겠단 발표를 하셨을 때, 그분이 네게 정말 진심이라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사실 내가 읽어 낸 정보 속에서 느껴진 그… 너의 분위기와 감정 같은 게……. 이거, 말해도 돼?”
“이제 와서 더 비밀로 할 것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귀가 붉어진 칸나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 네가…! 단장님한테 너무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단 말이야.”
“……내가?”
“그래! 네가! 그 유더가!”
칸나가 또다시 얼굴을 가렸다. 우으윽, 으아아악.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몸을 비틀며 스스로가 내뱉은 말에서 얻은 충격을 어떻게든 흩어내 버리려 노력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푹 빠졌다는 설명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지만, 생각해 보니 사실은 사실이었다. 제가 키시아르 라 오르에게 거리를 조금도 지키지 못할 만큼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는 건 이미 입을 맞추었던 날 자각한 바다.
애써 지키려 했던 모든 거리도, 비밀도 물에 녹은 모래처럼 무너져 가는 이 상태를 푹 빠졌다고 말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할 터였다.
“네가 이걸 비밀로 하려고 했던 건 알아. 나도 가능하면 정말 모르고 싶었어. 하지만…… 알게 되어 버린 뒤로 자꾸 보이고 생각나는 걸 어떻게 해?”
“…….”
“그래도 잊으려고 노력할게. 내가 본 것 이상으로 자세한 걸 묻지도 않을 거야. 다른 사람한테 말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비밀로 하겠다고 신과 어머니와 내 성을 걸고 맹세할 테니까 믿어 줘!”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칸나는 순식간에 손을 쳐들고 짧은 맹세의 말까지 읊조렸다. 마치 수백 번쯤 이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상상해 본 사람처럼 망설임 없는 태도였다.
“하, 말하고 나니까 속은 시원하네.”
맹세를 마친 칸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의 모습을 거의 회복했다. 붉어진 귀는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으나 마음이 편해졌다는 건 진심인 듯했다.
그리고 유더 또한, 이상하지만 이 대화를 통해 방금까지 느꼈던 가슴 속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듯한 착각을 느꼈다. 진짜 고민하던 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유더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칸나.”
“응.”
“사실 나는 네가 나에 대해 더 깊은 걸 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어.”
“……이거보다 더 깊은 게 있다고?”
칸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래. 있어. 그리고 많아.”
“심지어 하나도 아니야?”
“다른 사람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는 건 역시 좋은 기분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때가 오더라도, 나는…….”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너와 지금처럼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게 욕심이라는 건 잘 알았다. 키시아르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
“내 편이 되어 주겠다고 해 주어서 고마워. 덕분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
대체 이보다 더 깊은 게 뭐가 있느냐며 손을 떨던 칸나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유더를 멍하니 바라보던 큰 눈에 갑자기 물기가 어렸다.
울린 줄 알고 놀랐지만 칸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재빠르게 눈가를 가린 그녀의 손 아래로 드러난 활짝 미소 지은 입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밝았다.
“……아, 뭐야.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유더 안 같아서 이상하잖아. 그치만, 나도 그래.”
“…….”
“네가 내 능력을 체감하고 나서 멀어질까 봐 정말 걱정됐어. 그러지 않아 줘서 고마워. 네가 뭘 숨기고 있든, 내가 뭘 읽게 되든, 변하는 건 없을 거야. 네가 바라는 게 곧 내가 바라는 거니까!”
이제 능력 조절이 예전에 비해 훨씬 좋아져서 아무거나 마구 읽는 수준은 아니게 되었다며 자신 있게 손을 뻗은 칸나가 유더의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 함께 접촉해 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랜만이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아까 네가 말했던 것처럼 알고 싶지 않은 걸 알게 되는 게 물론 좋은 일만은 아니야. 하지만 모른 채로만 사는 것도 행복하지만은 않지 않을까? 난 내 능력을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해.”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 말은 유더의 마음속에 어떤 파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