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화
현자를 따르는 이들의 눈에 비친 나한은 참으로 대하기 어려운 작자였다. 그래도 그간 그들이 한곳에서 잘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현자와 나한의 역할이 분명하여 나그란의 별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협동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나한이 핍박받고 위험에 처한 각성자들이 많은 곳으로 침투해 그들을 구해 오면 현자는 사람들을 돌보고 교육하며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현자가 각성자들을 위해 거점을 안정시키는 동안 나한은 거점에 위협이 되는 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훈련시킨 각성자들과 함께 나그란의 별을 지켰다.
그 분담이 잘되던 시기에는 아주 좋았다. 외부가 온통 각성자의 적뿐이던 시기였으니 나한의 두렵고 무서운 능력이나 껄끄러운 성격도 든든하게만 여겨졌다.
‘그랬던 게…… 거점 수가 지역별로 늘어나고 사람이 늘면서 점차 이상해졌지.’
처음에 나그란의 별에 합류하던 이들은 대부분 목숨을 구하고 숨어 사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게 없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차차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시간이 흐르자, 자신들이 지닌 힘을 가지고 복수를 하길 원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각성자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향을 떠나온 이들에게 원망스러운 대상 하나쯤 없을 리 없다. 그중에서도 몸소 나서고 싶어 할 만큼 큰 원한을 지닌 이들의 복수 대상은 대부분 쓰레기 같은 귀족들이었다. 현자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막으려 했으나, 나한은 그들을 오히려 도왔다.
나한이 이번에 서부에 갔다가 거점 이사라는 임무를 마치고도 복귀하지 않은 이유가 서부의 귀족들에게 복수를 원하였던 에르시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나한은 슬픔과 복수심에 가득 찬 각성자들을 가까이했다. 그들의 분노를 돕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 믿는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자신이 지닌 힘을 대의를 위해 써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그런 나한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깊이 따랐다.
‘그놈이 적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만약 내가 위험에 처하거나 복수를 원한다고 말한다면 그놈만큼 나를 잘 도와줄 사람도 없겠지. 그치만 난 그놈이 무서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랭바튼. 당신은 나한이 두렵습니까?”
그때, 현자가 마치 각성자의 생각을 읽은 듯 나직하게 물었다. 초조하게 주먹을 쥐고 있던 각성자, 랭바튼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우물거렸다.
“솔직히…… 좋은 동료라 생각되진 않습니다. 나한이 저희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압니다만…… 그자가 귀족을 정말 싫어한다는 건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런 시기에 현자님을 만나러 온다는 게 좋은 뜻으로는 안 느껴지네요.”
그는 현자가 제 말에 온화하게 웃으며 평소처럼 같은 동료를 보듬어 안아 주어야 한다는 말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현자는 그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고 사랑과 따뜻함으로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들려온 반응은 달랐다.
“그래요. 아마 우려를 표하기 위해 오고 있을 확률이 높기는 할 것입니다.”
“아…… 혀, 현자님께서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역시? 그런데, 우려라니요? 그놈이 현자님께 우려를 표할 일이 뭐가 있다고…….”
“랭바튼. 당신이 나그란의 별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었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랭바튼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1년……은 확실히 넘었습니다. 제가 작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 현자님을 만났으니까요.”
“나한 형제가 이 사람을 만난 건 2년 전입니다. 나그란의 별이라는 이름조차 만들어지기 전이었지요. 네조 정도만 이 사람의 곁에 있었던 때였으니까요.”
“아…….”
네조는 현자를 따라 황태자 궁까지 온 네 명의 각성자 중 한 명이었다. 과거에 제법 글줄 깨나 읽었던 듯 안경을 쓰고 다니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네조라는 이름도 본명은 아니라고 들었다. 그래도 그는 그 누구보다도 나한을 위험하게 여기고 현자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나한이 나그란의 별에서도 가장 오래된 각성자 축에 속한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으나 설마 그게 진짜였다니. 랭바튼이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현자가 그를 도닥이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때의 나한은 굉장히 아프고 위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한 형제와 같은 이들을 돕기 위해 나그란의 별과 같은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지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한은…… 이 사람의 마음이 그때와 달리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따뜻하기 그지없는 현자의 눈을 본 랭바튼의 마음이 깊이 술렁였다. 배은망덕한 나한을 향한 분노, 현자를 향한 걱정이 뒤섞여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현자님께서 변하시긴 뭐가 변했다는 겁니까. 현자님보다 저희를 위해 주시는 분이 어디 계시다고요.”
그 말에 현자는 그저 씁쓸한 듯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리 말해 주어 고맙군요. 그렇지만 나한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이번에는 그렇게 되겠다는 쪽이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건…… 저희가 황태자 전하를 치료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현자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이들에게는 지나친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듯했다.
“내일 이 사람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형제자매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일은 당신을 믿고 맡기겠습니다, 랭바튼.”
결국 랭바튼은 힘없이 현자의 방을 나섰다. 그는 자신이 머물던 방으로 돌아온 뒤, 다른 각성자들의 말에 대충 답하면서 안경을 쓴 각성자를 눈으로 더듬어 찾았다.
“네조. 잠깐 이야기 좀 해.”
랭바튼은 네조와 함께 다른 이들을 피하여 사람 없는 곳으로 향했다. 어차피 이 황태자의 궁에서 그들 같은 허름한 이들을 신경 쓰는 시종 따위는 없었기에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편했다. 랭바튼은 현자와 나누었던 대화를 모두 설명한 뒤, 불만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현자님은 나한이 와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 물론 지금까지 나한이 현자님의 말이라면 다 듣기는 했다지만 이번까지 그럴지는 모르는 일이잖아. 내일 그분께서 디에먼 같은 바보만 데리고 위험한 곳에 가셔야 하는데, 나한 패거리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쩔 테야? 그분을 지켜야 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네조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그 망할 남국인 놈……. 정말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군. 나는 현자님께서 그놈을 거둘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것 같았어. 피에 굶주린 남국인 놈이 어딜 가겠어?”
역시 네조는 가장 오랫동안 현자를 모셔 온 이답게 나한에 대해서도 잘 아는 듯했다.
“대체 나한 그놈은 뭐가 문제라서 그러는 거야?”
“그래, 너도 여기에 올 정도로 현자님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니 알 권리가 있겠지.”
잠시 고민하던 네조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나그란의 별이 처음 생겼을 무렵에 현자님께선 우리 모두를 데리고 제국을 탈출하려 하셨어. 나한이 맡은 일은 우리가 탈출하여 정착할 땅을 찾을 때까지 함께할 동료들을 구하는 거였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
“그거야…….”
각성자가 막 나타났던 때에는 모두 살아남기에 급급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펠레타 공작 같은 각성자 귀족이 나타나고, 마병단이 생겨나면서 각성자에 대한 제국 내의 분위기는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랭바튼은 마병단이 좋은 단체라 생각지는 않았으나 귀는 멀쩡했기에 수도에 온 뒤로 여러 소문을 주워들었다. 뭐가 어쨌든 사람들이 현재 그들의 활약 때문에 각성자를 덜 두려워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마병단이 생긴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아직도 마병단 같은 단체는 오르 제국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남쪽으로 이전한 서부 거점의 동료들은 입을 모아 하나같이 ‘서쪽 나라들은 오르 제국보다 더욱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멀쩡한 사람들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는 판에, 그곳에서 살고 있는 각성자들의 삶이 어떨지는 안 들어도 뻔했다. 제국 내보다 제국 밖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머리가 있다면 누구든 할 테다.
‘나라도…… 나그란의 별에 들어오기 전처럼 위험하게 살았다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당장 제국 밖으로 도망치자고 하면 안 갈 거야.’
랭바튼의 얼굴을 보며 네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들 너처럼 내 말뜻이 뭔지 알 거야. 하지만 나한 그놈은 그걸 몰라. 그놈은 그간 몇 번이나 현자님께 약속을 지켜 달라고 말했었어. 마병단과 마주친 뒤로는 더 자주 그랬다지.”
“약속?”
“제국 밖으로 도망쳐 새로운 거점을 건립하자던 말을 그놈은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실제로 나한 놈에게 목숨을 구명받은 동료들도 현자님께 같은 말을 해. 새로운 곳으로는 언제 떠나냐고 묻더란 말이야.”
“나는 전혀 몰랐어.”
“넌 혼자서 들어왔잖아. 그리고 그럴 예정이 없다는 걸 현자님께서 설명하면 대부분은 잘 납득해 주거든. 아닌 녀석들도 있기는 하지만.”
네조의 안경 너머로 찌푸린 얼굴이 비쳤다.
“내 생각엔 현자님의 지금 행보가 우리 모두를 위해서는 당연히 훨씬 나아. 하지만 내가 보기에 나한 그놈은 현자님이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고 판단하면 당장 뛰쳐나가 모든 일을 망치고도 남을 거야.”
그럴 수는 없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랭바튼은 알았다. 그제야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어쩌면 현자가 그에게 믿고 맡기겠다고 말한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우리 쪽에서 먼저 나서자. 그놈이 현자님을 만날 수 없도록 막으면 되잖아.”
“우리가?”
“세라의 연락에 의하면 그놈은 서부에서 큰 부상을 입어서 거동조차 힘든 상태라고 했어. 이럴 때 노리지 않으면 어떻게 그놈을 잡겠어? 분명 그쪽에서 우리에게 먼저 연락해 올 테니, 그때를 노리자.”
네조의 얼굴 위로 조금 껄끄러운 기색이 드러났다. 그 또한 나한의 능력을 내심 두려워하던 이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놈의 능력이…… 너도 알잖아.”
“누구는 능력 없어? 이번에 성공적으로 일을 처리한 게 누구였는지 잊었냐고. 나한 그 녀석은 우리에게 절대 힘 안 써. 알잖아. 그놈을 따르는 밸도 없는 놈들이나 호산라처럼 껄끄러운 녀석들은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호산라도 없지. 그리고 우리 쪽엔 디에먼이 있잖아.”
“음…….”
“디에먼이 짜증 나긴 하지만 그 자식의 능력이라면 나한의 능력도 베낄 수 있을 거라고. 좀 약해지긴 하겠지만 그거면 충분해. 현자님을 지키기 위해선 우리가 나서는 수밖에 없어!”
결국 네조도 이 일을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알겠어. 그러면 그렇게 하자.”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가 나머지 동료들에게 상황을 공유하고 뜻을 함께하자고 권유했다. 고민하던 이들이 서로 손을 잡기로 마음먹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중에는 자신이 중심이 되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상기된 디에먼도 끼어 있었다.
***
“유더. 방금 내 말 들었어?”
유더는 눈앞에서 휙휙 흔들리는 작은 손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칸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는 중이었다.
“……아니. 무슨 말을 했었지.”
“호산라의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고 했는데…… 어디서부터 안 들은 거야?”
“…….”
그런 이야기를 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유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칸나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볼 때부터 내내 정신이 어디 팔려 있는 것 같더라니. 피곤하면 그냥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아니야. 한 번만 더 말해 줘. 이번에는 제대로 들을 테니까.”
“……진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라. 일이 있기는 했다. 다만 말할 수 없는 일일 뿐이었다.
어제 그가 사형당했던 날의 꿈을 꾸었다던 키시아르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유더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이내 답을 듣지 않고 쉬라는 속삭임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이후 유더는 밤새도록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는 지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