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화
그것은 감정이었다.
다만 유더의 감정은 아니었다. 일순 통증에 가깝다 느꼈을 정도로 강한 감정이 저 아름답고 평온해 보이는 사내의 얼굴 속에서 풍랑처럼 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유더는 당혹을 느꼈다.
“……단장님.”
“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일이야 많이 있었지.”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폐하께서 손에 쥐신 새 능력을 앞으로 자주 사용하실 마음이 있으신 듯하니 마병단장으로서 도움을 드릴 방법을 찾아야겠고, 침입 사건 때 획득한 몬스터 사체를 어떻게 써먹을지 의논도 해야 하고, 소식에 의하면 펠레타의 올해 작황이 너무 좋아서 창고가 가득 차 문제라니 해결책을 보내 줘야겠지. 그리고 넬라른에서 온 유물도 살펴야 해.”
나머지는 그렇다 치고, 마지막은…….
‘넬라른에서 온 유물……. 에제인 왕자의 말로는 대마법사 루마라 추정되는 눈먼 현자의 물건이라 했었던가. 그게 드디어 왔나 보군.’
다른 이라면 몰라도 루마의 물건이 맞다면 당연히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 말들만으로는 방금 느꼈던 키시아르의 심경이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유물 따위는 그것에 비하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각성하신 능력을 활용하고 훈련할 방법을 원하신다면 정과 단원들에게 효과가 좋았던 훈련법들을 정리하여 올리겠습니다. 몬스터 사체를 써먹을 방법은 모르겠지만 오늘 침입자들로 의심되는 나그란의 별 쪽에 대해 정보를 좀 더 얻었으니 지금 전달드리죠. 작황 문제는…… 왜 그렇게 보십니까?”
평소와 그리 다를 바 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키시아르의 눈빛이 묘했다.
“그냥. 정말로 이제 다 회복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이논도 아까 그렇게 말하더군요.”
사내가 유더의 침대 곁에 앉았다. 유더는 제 뺨을 향해 뻗어 온 손을 피하지 않았다. 엄지손가락 끝이 지금은 금빛으로 빛나지 않는 눈 아래를 간지럽게 쓸고는 도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손끝을 통해 유더는 재차 확신했다.
‘역시 평소와 뭔가 다르긴 달라.’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 때 딱히 주저하는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는 유더지만, 키시아르가 상대일 때는 달랐다. 그는 감추는 것이 너무나 능숙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다 힘주어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루산 사제님께 신성력을 받고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약사가 알려 주었겠군.”
“역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 아닙니까?”
“음…… 유물과 함께 왕자가 보내 온 편지가 있는데, 받겠나?”
키시아르의 주머니에서 작은 서신이 나왔다. 유더는 그것을 받자마자 살펴보지도 않고 옆에 내려놓았다.
“단장님.”
“그래. 무슨 뜻으로 묻는지 알고 있네.”
키시아르가 그제야 두 손을 살짝 들며 재차 웃었다. 다만 이번의 웃음은 아까까지와 달리 순식간에 힘을 잃고 사라졌다.
“꿈을 꾸었어. 그래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 신성력이 있어도 스스로를 치료할 수는 없으니 어쩌겠나. 폐하를 뵙기 전에 심려를 끼치지 않으려면 할 수 있는 건 해 두는 수밖에.”
“…….”
“그것뿐이라네. 정말로.”
그간 키시아르를 보아 온 경험상, 거짓말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미간과 눈을 가볍게 매만지는 키시아르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 눈에 서린 피로함이 이전 생의 언젠가를 떠올리게 했기에 유더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 움직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의 꿈…… 역시 연결의 여파가 또다시 키시아르에게도 미쳤던 건가?’
그가 꾸는 꿈이 보통 꿈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안다. 언젠가부터 키시아르는 점점 이전 생과 연관된 꿈을 꾸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깨어난 뒤 스스로 그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었지만…… 가장 최근에 그가 심상치 않은 꿈을 꾸었던 때는 어땠었던가?
그때 키시아르는 유더가 꾸었던 것과 거의 같은 꿈을 꾸었다. 이전 생의 유더가 막 키시아르에게 검을 배우기 시작했던 시기의 꿈이었다. 꿈에서 나누었던 대화 등은 떠오르지 않았다지만, 그 속에서 유더가 익히고 몸소 행했던 기초 검술교본 1번을 일어나자마자 새벽같이 나와서 해 볼 만큼은 기억했던 것도 확실했다.
‘내가 이번에 가장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이전 생의 기억은…… 황제를 치료하던 날 보았던 그것인데.’
키시아르를 죽이고 난 직후의 기억.
그것을 재차 떠올린 순간 가슴 속이 서늘해졌다. 손이 뻣뻣하게 굳고 눈앞이 조금 어두워지는 기분이 찾아들었다.
‘이전에 똑같은 꿈을 꾸었던 날은 둘 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잠을 잤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은 그렇지도 않았는데.’
누구도 답을 알지 못할 이 불가사의한 ‘연결’과 키시아르의 꿈 사이의 인과를 모르는 이상,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 유더 사이의 연결은 이번 일을 거치며 더욱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황제를 치유하던 때에 보았던 기억에 의하면 두 사람 사이를 얽고 있던 실 또한 몇 가닥 정도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난 상태였다.
‘만약 정말로 그걸 본 거라면.’
그 키시아르가 이후 다시 자지 못할 만큼 흔들렸던 것도, 신성력의 회복 효과를 필요로 했던 것도, 유더 자신에게는 숨기려 했던 것까지도 모두 이해가 되었다.
만약 정말 제 예상이 맞다면…….
유더는 열기 어려운 입을 움직여 신중하게 재차 물었다.
“……무슨 꿈을 꾸셨는지, 여쭈어도 됩니까.”
“나는 늘 보좌의 질문에 무엇이든 답해 줄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번은 들어도 우리 둘 모두에게 그리 기분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 말이 유더의 생각이 맞다고 거의 확신의 도장을 찍는 듯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키시아르도 그 꿈에 대해서는 줄곧 모른 척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방금 짧게나마 느꼈던 사내의 숨겨진 감정들을, 그 복잡하고도 고통스러운 풍랑을 다시 떠올린 순간 유더는 그럴 수 없음을 알았다.
제가 키시아르의 꿈에 얽혀 있다면, 무엇이 되었든 제가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도 만약 그 꿈이 저와 연관되어 있다면 저는 알고 싶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물으면서도 답은 거의 예상했다. 유더는 눈을 내리깐 채 시시각각 긴장감으로 차가워지는 몸을 느끼면서 들려올 목소리를 기다렸다.
“……네가 죽는 꿈.”
그래서 이 답이 들려왔을 때는, 드물게도 스스로의 청력을 의심했다.
“죄인이 되어 광장 단두대 아래 서는 꿈이었어.”
“…….”
“폐하를 치유한 다음 날 처음으로 그 꿈을 꾸었을 때는 일어났을 때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었지. 그래서 곧 잊었지만…… 다음날 같은 꿈을 또 꾸었을 때는 무언가가 조금씩 더 보이고 떠오르기 시작하더군, 그리고 마침내 어제.”
키시아르의 입술이 잠시 멈추었다. 유더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망설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꿈에서 본 사형수가 누구였는지 드디어 깨닫게 되었네.”
어둡게 가라앉은 붉은 시선 앞에서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전에 내가 자다 말고 네 숨겨진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네가 숨기려 했던 것들이 나와 연결되어 공유되는 것 같다고 했었지. 우리가 이전에 같은 꿈을 꾸었을 때부터는, 어쩌면 그것이 예지몽의 일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
“…….”
“하지만 정말로 그것을 예지몽이라 이해한다면, 이번의 꿈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이 든 순간부터 잠이 오지 않더군.”
키시아르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져 마침내는 거의 속삭임 정도로 변했다. 그렇지만 유더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대고 바로 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꾼 꿈은 유더가 그를 죽이던 날이 아니었다.
그가 본 것은 그때의 키시아르 라 오르가 죽고 나서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오직 유더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할 날의 일이었다.
대답을 끝낸 키시아르가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그와 유더밖에 남지 않은 듯 사위가 고요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더가 가장 걱정하던 날의 꿈을 꾼 것도 아니니 그를 안심시킬 만한 말쯤이야 얼마든지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유더는 그러지 못했다. 희게 변한 머리는 평소와 같은 냉정함을 찾을 수 없었다.
***
“현자님. 지금 혹시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황태자가 치료사들에게 편히 머물라며 내준 방은 몹시도 호화로웠다. 그러나 현자가 홀로 머물 수 있도록 내어 준 방은 그중에서도 최고였다.
들어서자마자 기가 질릴 만큼 엄청난 방을 흘긋거리며 몸을 움츠린 각성자는 그 모든 화려함에서 유리된 듯 앉아 있던 온화한 얼굴의 현자를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숨이 막힐 만큼 가득한 부와 명예의 냄새도 저 초연하고 현명한 얼굴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 밤중에.”
“내일 디에먼과 둘이서만 디아카 공작을 만나러 가시는 일 때문에 모두 불안해합니다. 역시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걱정 말아요. 이 사람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디에먼이 가져온 그 능력을 보여 주어야만 그분들께서도 우리를 믿을 것입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디아카 가의 아들이라는 그 호위기사가 저희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현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여기 머물기 시작한 이후로는 대놓고 말을 걸며 꼬치꼬치 무어라 묻는데, 겁이 나 견딜 수 없습니다.”
현자가 웃었다.
“지나친 걱정은 마음을 갉아먹고 육신마저 해칩니다. 키올레 경 또한 결국 그리하면서도 우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는 않았지요. 그저 궁금한 것뿐일 겁니다.”
지나친 걱정은 마음을 갉아먹을 뿐이다. 그 말을 듣자 각성자는 마음이 나른해지며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꾸만 그들을 찔러 대던 키올레 때문에 초조해 죽을 뻔했던 불안감이 사라지자 한결 호흡이 나아졌다.
“그래요.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너무 걱정이 심했습니다.”
“이해합니다. 이토록 이 사람을 걱정해 주는 이가 당신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현자님…….”
감동에 젖어 있던 각성자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 그리고 말씀드릴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실은 이걸 먼저 전했어야 했는데…… 남부 거점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다들 잘 지내고 있다고 합니까?”
현자가 온화하게 물었으나 각성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게…… 나한이 돌아왔다더군요.”
“나한이? 모두와 함께 돌아왔다고 합니까?”
“아뇨. 나한 혼자서만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 만에 몸을 조금 회복시키자마자 자신을 따르던 놈들과 함께 도로 사라졌다더군요. 어디로 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는데, 소식을 보내 준 세라의 말로는 그가 현자님을 찾아 수도로 향한 것 같다고 합니다.”
순간 현자의 온화했던 웃음이 조금 사라졌다. 각성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정말 여기로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