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화
이논이 돌아간 뒤, 마치 교대라도 하듯 정보부원들이 들이닥쳤다.
“유더! 우리 몰래 임무 처리하고 와서 다쳤다며! 진짜야?”
대외적으로는 개인적 사유로 남는 휴가를 쓰고 있을 뿐인데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뻔했다. 엘더 남매 사이에 한 팔씩 붙잡힌 채 반쯤 넋이 나간 가케인이 정보의 출처일 터였다.
‘원하는 정보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얻어 내는 건 정보부원으로서 좋은 자질이기는 한데……. 가케인 쪽은 동료들에게 너무 물러지지 않도록 뭔가 훈련을 더 시켜야 하나.’
고심 끝에 그래도 가케인 본인까지 그 비밀 임무에 한 발 걸치고 왔다는 것까지는 안 들킨 모양이니 봐주기로 했다.
피를 많이 본 칸나는 아직 의료부에 누워 있었지만 가케인은 기력이 쭉 빠진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부상이 없어 큰일을 치르고 온 티가 나지 않았다.
가케인을 살리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것을 비튼 유더의 입장에서는 몹시 다행한 일이었다. 서부에서 목숨이 위험할 만한 부상을 입었던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다쳤다면 지금의 칸나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왜 대답을 안 해 줘? 진짜냐니까.”
“대답 못 해.”
“왜?”
“비밀이니까.”
“그럼 맞다는 거지!”
혹 자신들은 빼고 정보부원 중에서 가케인만 부른 걸 섭섭해하느라 온 건가 싶었지만, 그들은 항의 대신 유더에게 간식을 선물했다. 요즘 수도에서 인기가 높다는 버터 쿠키였다. 태어나서 이런 낯간지러운 선물은 처음 사 보았다며 얼굴이 새빨개진 데브란을 엘더 남매가 낄낄 웃으며 놀렸다.
그들은 다 같이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그간 각자의 힘을 발휘하여 살핀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에 대해 짧은 정보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우선 그들은 황태자를 치료하러 갈 때 외에는 정말 얌전하게 살았다. 술을 마시거나 난동을 부리는 등의 눈에 띄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고, 밖에 나가는 일도 식료품을 살 때 외엔 거의 없었다. 순례자들끼리 모여 산다고 해도 될 만한 경건함이었고 실제로도 주변에서는 그렇게 인식했다.
“하지만 암만 조용히 살아도 말이야, 사람이면 자기들끼리는 이야기를 한단 말이지. 그리고 내가 또 그런 걸 잘 듣잖아.”
대담한 관찰력을 높이 평가받아 정보부원이 된 데브란이 자신 있는 얼굴로 턱을 쳐들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그놈들 중 한 명은 따돌림당하고 있어.”
“진짜? 어떻게 알았어?”
힌의 질문에 데브란이 흔쾌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동안 그놈들이 가장 자주 다니는 식료품점 근처에서 남는 시간마다 물건 나르는 일을 도와주면서 관찰했어. 현자 소리 듣던 아저씨를 제외한 네 사람은 늘 일정한 시간대에 사러 와서 지켜보기 쉽더라고.”
“와, 마병단 훈련을 하고 나서도 그런 일을 할 기운이 남는단 말야? 데브란 대단하네~.”
“무슨 소리야. 내가 요즘 훈련을 안 들키고 빼먹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데브란이 유더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 그 훈련 계획을 누가 짰는지 기억하고 있다면 그래야지.’
하지만 유더는 관대하게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훈련도 중요하지만 정보부는 실전이니 더 중요했다. 본인이 말할 때까지는 아무도 그가 훈련을 빼먹고 있다는 걸 몰랐을 정도였으니 어떤 면에서는 감탄스러웠다.
“으, 크흠! 아무튼 네 명 중에 한 명만 늘 대화에서 겉돌아. 무리에 제대로 끼질 못하더라. 나머지 세 사람도 그 사람을 좀 무시하는 기색이고.”
“성격 문제인가?”
그러자 데브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것도 있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능력 때문인 것 같아.”
“능력?”
“당연히 그런 얘길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지. 않는데, 그…… 각성자들끼리 능력 가지고 대화할 때의 분위기란 게 있잖아. 다들 알지?”
데브란이 너희도 당연히 알지 않느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따돌림을 당하는 한 명의 능력이 다른 놈들에겐 굉장히 꺼려지는 능력인 게 분명해.”
데브란은 따돌림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거기까지만 파악했다고 말했다.
유더는 곰곰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데브란. 따돌림을 당한다는 그놈, 인상착의를 말해 줄 수 있을까.”
“어? 물론이지! 피부가 좀 붉어서 남국계처럼 보이는 사람이야. 그리고 한쪽 귀에 긴 흉터가 있어. 좀 소심하게 생겼는데, 호칭까지는 아직 못 들었어. 워낙 겉돌아서 이름 부르는 걸 들었어야 말이지.”
확실하다. 무리 내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그 각성자는 분명 유더가 알고 있는 미래의 ‘현자’였다.
하지만 그놈의 능력은 분명 타인의 기분을 조금 바꾸는 정도의 능력이 아니었던가? 능력 자체는 별것 없지만 말을 잘하여 효과를 낸 놈이었는데, 능력 때문에 겉돌고 있다니.
‘……내가 알고 있는 능력이 놈의 진짜 능력이 아니었던 건가?’
죽기 전에 받아 낸 자백이라 거짓말일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혹시 앞으로는 그놈에 대해 좀 더 집중적으로 알아봐 줄 수 있을까.”
“따돌림당하는 놈 말야? 왜?”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서. 내가 몰랐던 정보를 네가 알려 주었거든. 좀 고생이겠지만 부탁한다.”
유더도 몰랐던 정보를 자신이 파악했다는 말에 데브란의 얼굴이 감격으로 조금 붉어졌다. 그 감정을 눈치챈 엘더 남매가 재빠르게 그를 놀렸으나, 데브란은 개의치 않았다.
“좋아. 나한테 맡겨!”
기운찬 데브란의 곁에서 가케인이 조금 자신감 없는 태도로 중얼거렸다.
“으음…… 난 그 사람들이 오고 가는 걸 알 수 있는 그림자를 붙여 놓기만 해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알아보진 못했는데 어쩌지.”
“넌 요즘 바빴잖아. 괜찮아.”
“으응. 그래도 우리가 처음 그 사람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던 때보다 요즘 들어 점점 더 황궁에서 보내는 시간과 빈도가 늘었다는 건 알아냈었어. 이젠 며칠째 숙소로 돌아오지 않아서 좀 쓸모없는 정보가 된 것 같지만…….”
“아니야 아니야, 가케인! 덕분에 우리가 움직일 용기가 생겼거든.”
우리라고 놀고만 있었던 줄 아느냐며 엘더 남매가 가케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케인이 불길한 표정으로 물었다.
“용기? 무슨 용기……?”
“우리가 이 능력으로 뭘 하겠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괴력에 이어 이제는 혼자서도 물체를 순간 이동 시킬 수 있도록 능력을 발전시킨 남매가 똑같은 얼굴로 악당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 사람들이 며칠째 집에 안 돌아오고 있고, 가케인의 능력으로 누가 집에 드나드는 걸 바로 알 수 있다면 당연히 이럴 때 슬쩍 들어가서 관찰 좀 해 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
“그럼 이 기회를 그냥 놓칠 거야?”
“유더, 뭐라고 말 좀 해 봐!”
유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확실히, 지금이 가장 해 볼 만한 때인 것 같다.”
“그렇지? 유더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니까. 믿어 봐, 우리 완전 잘할 자신 있어.”
“그러면 너희 세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길게. 그리고 가능하면 거기서 작은 물건들을 하나씩 가져와 줘. 칸나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알겠어.”
남매가 흔쾌히 수락했다.
과자를 모두 먹은 정보부원들은 유더의 몸을 걱정하는 말을 한마디씩 남긴 뒤 방을 떠났다. 다만 가케인만은 마지막까지 조금 미적대며 남아 있었다.
“가케인, 무슨 할 말 있어?”
“음, 그게…… 이번에 우리가 다녀왔던 그 비밀 임무 말이야.”
“네가 그걸 힌과 핀에게 쉽게 들켰다는 건 사과 안 해도 되는데.”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면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그런가 했는데, 아무래도 그가 바랐던 건 전혀 다른 쪽이었던 듯했다. 잠시 주저하던 가케인이 이내 주먹을 꽉 쥐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야, 내가 주커만 경에게 검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받아 줄까?”
“……나단 주커만 경?”
“이번에 임무를 하다가 보니까…… 그분이 검을 정말 잘 쓰시더라고! 진짜로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는 처음 봤어.”
‘……아, 그렇군. 이번에 마지막 몬스터는 나단 주커만이 혼자 잡았다고 했지. 본 실력을 보여 줬나.’
가케인의 솔직하게 경의로 빛나는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나단 주커만이 소드 마스터임을 알게 된 게 분명했다.
“나는 펠레타 기사단원이 아니라 이런 요청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부탁이라도 해 보고 싶어. 그런데 주커만 경이 평소엔 어디 계신지 잘 모르겠더라고. 계속 찾았는데 안 보여.”
유더는 키시아르의 보좌였으므로 나단 주커만의 얼굴도 몹시 자주 보았다. 아무래도 가케인이 거기에 기대를 걸고 물어본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해지는 데 그 어떤 단원보다도 강한 집착을 지닌 가케인이다. 그동안에는 그림자 분신을 주로 훈련하느라 검은 자주 쓰지 않았으나, 기사가 되기 위해 오래 노력했다던 그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사실은 일부러 검을 멀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에게 진심으로 배울 의지가 생겼다면야…… 키시아르라면 분명 주선해 줬겠지.’
키시아르 라 오르는 누구보다도 제 아랫사람들의 배움에 후했고, 스스로 가르치는 것을 즐겼다. 그런 이에게 몸소 검을 배워 정점이 된 나단 주커만이라면 딱히 거절하지는 않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 만나면 너한테 가 보라고 말은 전해 둘게.”
“고마워!”
가케인이 물을 잔뜩 먹은 장미처럼 생생해진 얼굴로 일어났다. 그는 드물게 몹시 신난 태도로 문을 열고 나가려 했으나, 운이 나쁘게도 마침 그 앞에 서 있던 키시아르와 부딪칠 뻔하고는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단장님! 거기 계신 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괜찮아. 뭔가 기분 좋은 이야기라도 나눈 모양이지?”
“그게…… 하하,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유더가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거든요.”
키시아르가 가케인을 보며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과연. 기쁘겠는걸.”
“네. 그러면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유더, 푹 쉬어!”
“…….”
가케인이 사라지고 나자 사내는 몸에 비해 작게 느껴지는 문간을 성큼 넘어 들어왔다. 분명 흠잡을 곳 없이 적당한 크기의 1인용 숙소를 0.5인용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장신이었다.
유더는 아무런 근심도 없어 보이는 말끔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루산에게 신성력을 받을 정도로 피로해 보이는 기색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궁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폐하께서 네가 모두 회복되는 대로 한 번 더 보자고 하시더군. 감사의 인사를 제대로 하고 싶으신 것 같아.”
혹시나 싶어 던져 본 말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답이 돌아왔다. 유더는 그가 제 곁에 앉은 순간 느껴지는 희미한 체향을 들이마시며 계속해서 태도를 관찰했다.
체향조차 그저 평온한 상태처럼 가라앉아 있지만, 정말로 내면까지 그런 게 맞을까?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 ‘연결’이 지금 이 순간만큼 필요하다 생각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키시아르가 무언가 의아함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친 그 순간, 유더는 아주 짧고도 강렬하게 가슴 속을 꽉 쥐었다 펴고 지나가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감정이었다.
다만 유더의 감정은 아니었다. 일순 통증에 가깝다 느꼈을 정도로 강한 감정이 저 아름답고 평온해 보이는 사내의 얼굴 속에서 풍랑처럼 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유더는 당혹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