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61화 (561/805)
  • 561화

    “그놈들이 현자라고 부르던 그 대장 놈 말이야. 예전에 수도에서 살았던 놈 같다는 말이 있더라고.”

    “……현자가?”

    이논이 흥미롭다고 말하기에 보통 소식이 아니리라 생각했지만 이건 정말 의외였다.

    “그래. 그것도 관리.”

    관리. 유더는 얼핏 보았던 현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유더가 알고 있던 이전 생의 빌어먹을 ‘현자’ 놈이 아닌 이 시대의 진짜 현자는 인상이 무척 선량해 보이는 중년 사내였다. 수염도 곱게 기르고 안색이 깨끗해 어디서 고생을 하고 살았던 놈은 아닐 듯한 인상이긴 했는데…… 설마 수도에서 관리를 하던 이였다고? 어쩐지 잘 믿기지 않았다.

    “닮은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니고?”

    “정보 길드에서 일하면서 하급 관리들을 주로 상대했던 녀석이 물고 온 이야기야. 그놈이 다른 건 몰라도 사람 기억력 하나는 대단하거든.”

    “흠…….”

    유더의 눈빛이 변했다. 한 번의 작은 끄덕임만으로 더 말해 보라는 뜻을 전하는 태도가 조금 건방진 듯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윗자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사실 이논이 본 그는 처음부터 그랬었다.

    “그놈이 그러더라. 푸른얼룩 관에서 오래 일했던 관리가 하나 있었는데, 2년 전에 갑자기 집을 싹 정리하고 야반도주를 해서 잠깐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 현자란 놈의 인상착의가 그 관리와 상당히 닮았던 모양이야.”

    “야반도주?”

    “그래. 당시에 갑자기 그런 식으로 사라지는 놈들이 가끔 있었다지만 푸른얼룩 관의 관리들 중에서는 처음이었다고 해. 그래서 그 녀석도 오래 기억했던 거지.”

    “가끔 있었다고? 왜…… 아.”

    말하다가 2년 전이라는 시기를 떠올리고 이유를 깨달은 유더를 향해 이논이 입술 끝을 비죽 올렸다.

    “그래. 이유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산속에서 홀로 살던 유더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각성자가 막 나타나기 시작했던 때는 각성자를 신벌을 받은 이나 괴물이라 여겨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더러 있었다.

    그 혼란은 이후 붉은 돌에 대한 발표가 퍼지면서 나아졌지만 그 이후로도 고향을 떠나 도망친 각성자들이 적지 않았다. 여태 만난 나그란의 별이나 다른 각성자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라졌다는 관리의 주변에서는 그자도 갑자기 각성을 해서 야반도주를 했을 거라 의심했다는 이야기군.”

    황제의 손길이 가장 가깝게 닿는 수도에서도 그런 이들이 있었던 줄은 몰랐지만, 붉은 돌이나 각성자에 대한 정보 발표가 시작되기도 전인 초반에 각성했다면 이해는 되었다.

    “그래. 그래서 사라진 놈의 정보를 좀 더 파 봤지.”

    “그래서. 결과는?”

    “자. 받아라.”

    유더는 이논이 건네준 말린 종이를 폈다. 그건 푸른얼룩 관에서 일하는 관리들의 인적 사항이 담긴 서류 일부였다. 구석에 붉은색으로 폐기 서류를 뜻하는 도장이 크게 찍힌 걸 보니 본래는 쓰임을 다하고 버려진 서류였음에 틀림없었다.

    ‘관리들만 쓰는 잉크와 종이가 확실하군. 복제하거나 베껴 쓴 것도 아니고 틀림없이 원본이다.’

    폐기되어 어딘가에 처박힌 지 몇 년이나 지났을 서류를 대체 어디서 이리 잘도 찾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걸 어떻게 찾아서 가져왔어?”

    “이런 거 해 오라고 나를 그 정보부인지 뭔지에 끌어들인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어본 거야.”

    “그딴 건 됐고 아무튼 빨리 읽기나 해!”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하지만 유더는 이논의 입술 끝과 눈가가 흐뭇한 감정을 감추려 움찔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서류에 적힌 관리의 이름은 ‘칼 엔파일’. 푸른얼룩 관에서 장서 관리와 신전 관련 소통을 맡았던 8급 관리로 현재까지 살아 있다면 나이는 50대 중후반이 되었을 터였다.

    ‘나이대는 얼추 들어맞는군.’

    서류에 따르면 칼 엔파일의 인생은 아주 평범한 하급 관리다웠다. 이름은 있으나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작위 따위 없이 성만 가지고서 관리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관리가 된 지 30년이 넘었음에도 마지막까지 8급 관리였다는 건 승진도 거의 안 했다는 뜻일 테고. 가족……도 없었나.’

    그의 가족 사항란에는 배우자도 없었고 자식도 없었다. 그는 6구역에서 혼자 살았고, 딱히 공을 세우지도 죄를 짓지도 않는 관리 생활을 하다 이제는 거의 3년이 다 되어 가는 2년 전의 어느 날 갑자기 돌연 사라졌다.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놈에 대해 얻을 만한 정보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칼 엔파일은 사라졌어도 그자를 기억하는 이들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파 보면 뭐가 나와도 더 나올 터였다.

    이논 또한 당연히 같은 생각을 했던 듯 말을 이었다.

    “일단 지금까지 알아본 결과 칼 엔파일은 제법 대외적 인망이 있었던 놈이었어. 아는 게 상당해서 주변의 자문을 많이 받았고, 신전과 일할 때도 사제들 대신 사람들에게 교리 강의를 자주 해 주었던 모양이야.”

    이 말을 유더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해석했다.

    ‘잡학에 능하고 혀를 잘 놀렸다는 뜻이군.’

    “그런 놈이 왜 승진은 못 했지.”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거 아닐까. 서류에는 안 나와 있는데, 푸른얼룩 관 장서관 관리직은 내부 세력 싸움에서 거하게 밀려난 놈들이 가는 한직 중 하나라더라.”

    ‘흠. 인망이 높았다는 놈이 세력 싸움에는 또 열심히 참여했던 모양이군.’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멀리서 보면 마냥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알고 보면 별로 그렇지 않은 일이야 얼마든지 있는 편이니까.

    유더가 마병단 시험을 칠 때 접수를 하기 위해 찾아가기도 했었던 푸른얼룩 관은 하급 관리들이 주로 일하는 곳이었다. 하급 관리는 어중간하게 태어나 아는 건 있어도 펼칠 곳이 없는 이들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 중 하나였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내부의 분위기는 더욱 욕심으로 들끓었다.

    이전 생에 입단 시험 접수를 할 때도 느꼈지만 일을 열심히 하는 놈들보다는 귀찮음에 찌들어 제 안위 지키기에 열성인 놈들이 더 많았다는 뜻이었다.

    “이상한 건, 내게 그놈의 얼굴이 기억난다고 말해 준 녀석 외에는 칼 엔파일이란 자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거야. 정보를 알려 준 놈의 말로는 칼이 사라졌을 때 제법 화제였다고 했는데 정작 다시 찾아보니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어. 이름도 마찬가지고.”

    이논이 고생해서라도 칼 엔파일의 존재를 증명하는 서류를 찾아낸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닐 텐데 모든 이들이 그토록 누군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유더는 이런 일을 설명할 수 있는 답을 하나 알고 있었다.

    “정신계 능력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겠군.”

    “그래. 그래서 좀 더 알아보려고.”

    “더 알아보는 건 좋은데, 일단 기억이 없다는 사람들 명단도 좀 줘.”

    “그건 왜?”

    “정말로 정신계 각성자의 소행이라면, 그때부터는 내 담당이니까.”

    “기억 못 한다는 사람들의 기억을 도로 불러낼 방법이라도 있어?”

    이논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유더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것도 결국 각성자의 힘이야. 나보다 그 힘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정신계 능력이 대단한 듯 보여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나한의 환상 능력에도 약점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결국 같은 힘을 쓰는 이상 막아 낼 길도, 깨트릴 길도 찾아보면 반드시 있다. 마법사끼리는 마법에 잘 당하지 않고, 소드마스터가 다른 검사들에게 질 일이 거의 없는 것과 똑같았다.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던 이논이 이내 손을 뻗더니, 유더의 뺨을 꽉 잡아당겼다.

    “……왜 이래?”

    “시끄러. 그렇게 잘 안다는 힘 때문에 피나 철철 흘리며 실려 온 놈은 잘난 척하는 거 금지야.”

    “무슨 소리야.”

    “잘난 척, 멋진 척 죄다 금지라고. 너 같은 놈 때문에 덩달아 맛이 가서 무리하다 실려 오는 환자가 날이 갈수록 는다는 것만 알아 둬라.”

    알 수 없는 연유로 혼이 난 뒤, 이논이 툴툴대며 입을 열었다.

    “명단은 나중에 넘길 테니까 너도 그 현자란 놈과 다른 놈들 능력이 정확히 뭔지 알아내는 대로 알려 줘. 그런 것까지는 내가 하는 조사로 알기 어려워.”

    “알겠어.”

    유더는 키시아르가 알려 준 정보를 통해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이 현재 황태자의 광휘궁에서 며칠 동안 머무는 중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만날 이는 이제 정해진 셈이다.

    ‘키올레가 그간 놈들을 잘 조사했기를 바라야지.’

    “그런데 너희 단장, 무슨 일 있었어?”

    나눌 대화를 모두 마치고 그릇을 챙겨 나가려던 이논이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묻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

    “오늘 아침에 루산을 찾더니, 기력 회복용 신성력을 조금 부어 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더라고.”

    ‘……키시아르가 그런 부탁을 했다고?’

    키시아르는 황제가 각성했던 날 이후로 유더와 나란히 회복에 전념했다. 그는 유더의 부탁대로 이논에게 상태를 진단받았고, 자신의 침실에서 약을 먹고 자는 시간 이외에는 대부분 유더가 머무는 곳에 와 있었다. 낯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간병인 노릇을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오늘 오전에 황제를 만나러 나간다는 말을 전하기는 했으나 그때도 크게 이상한 모습은 눈치채지 못했는데.

    ‘기력 회복이라.’

    단순히 생각하자면 황제를 보러 나갈 때 좀 더 건강한 모습으로 나가고자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면.

    단장 침실 바로 옆의 다른 곳에서 푹 쉬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제 방에서 쉬겠다고 주장한 건 유더였다. 그러나 이논의 말을 듣고 나니 차라리 다른 이들에게 이상하게 여겨질지라도 그냥 키시아르의 바로 곁에서 계속 상태를 지켜볼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알겠어. 알려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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