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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60화 (560/805)

560화

그 말을 듣고서야 황제는 비로소 아우의 말이 진실이라 판단했다. 진심을 숨기고 거짓으로 겉을 덮는 능력이 숨겨진 검 실력보다 대단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동생. 그러나 지금의 눈빛에는 웃음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정도라면 정말 엄청난 꿈을 꾼 모양이지.’

키시아르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황제도 억지로 그 내용을 물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대신 황제는 짧게 흠 하고 숨을 내쉰 뒤 평소와 다름없는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나 때문에 그리 애를 써 주었으니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만도 하지. 갑자기 좋지 않은 꿈을 꾸었다면 그 연장선일 것 같구나. 오늘은 이쯤 하고 돌아가서 쉬거라.”

“아직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남지 않았습니까.”

“되었다. 꼭 오늘 끝내야 할 일도 아니고, 짐의 손만으로 처리해도 충분한 안건들이니까.”

그 말속에서 무언가 느낀 듯, 키시아르가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드물게도 얼굴의 근육을 편안히 누그러뜨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젠 내게도 시간이 많지 않느냐.”

그 말의 의미를 형제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간사하지. 짐은 분명 하고자 하는 계획에 대한 확신도, 그래야 할 이유도, 그리고 그에 대한 욕심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보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알겠더구나.”

키시아르의 눈꺼풀이 움찔 움직였다. 그것은 그가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유더를 데리고 식사 자리에 왔을 때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그대로 돌려준 황제는 몹시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마지막 말을 이었다.

“이제껏 네가 짐을 도왔으니, 이제는 그 반대가 되어야지. 꿈자리가 계속 사나워 쉬고 싶거나 하고 싶은 말이 생긴다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키시아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던 사내는 잠시 후 깊은 한숨과 함께 웃음을 흘렸다.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제자리로 돌아오셨다는 사실이 드디어 실감이 나는군요. 아우를 염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 돌아가기 전에 저것도 챙겨 가거라.”

황제가 키시아르가 오기 전부터 테이블 위에 두었던 작은 상자를 향해 시선이 돌아갔다. 작은 상자에는 암호를 아는 이들만이 알아볼 만한 비밀스러운 문양이 찍혀 있었다.

“넬라른에서 온 것입니까?”

“그래. 이번 서신에 2왕자가 아일 남작에게 전하는 편지가 있더구나. 그리고 약속했던 유물도 같이 왔는데…… 알다시피 이제 그것은 짐에게 그리 필요가 없어졌지. 그래도 연구를 해 볼 필요성은 있을 듯하니 그것도 네가 가져갔으면 한다.”

넬라른의 2왕자 에제인은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간 이후로 협력을 위하여 황제에게 자주 서신을 보냈다. 그와의 긴밀한 협력을 주고받으며 황제는 오르 제국 귀족파와 연이 깊은 넬라른의 타 왕자나 그들을 따르는 세력들이 왕위에 오르는 일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왕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대로 에제인 왕자의 세력이 공고히 지지를 확립한다면 항복 선언도 곧이겠지.’

넬라른으로 돌아간 이후, 왕자는 전에 없던 단호함으로 자신의 진짜 편이 되어 줄 이들을 믿고 선임했으며 효과적으로 내부의 적을 단속하여 단기간에 넬라른 내부에서 확고하게 힘을 다졌다.

본래도 그는 국민들의 폭넓은 신임을 얻고 있었으되 확신과 단호함이 부족했을 뿐이었기에 그 부분이 해결되자 나머지는 완전히 날개 돋친 듯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넬라른 주변의 다른 나라들이 각자 그 싸움에 한 발을 걸치고 어떻게든 내부의 혼란을 부추겨 한탕 해 먹으려 노력 중인 듯하나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마 아무것도 없을 터다. 케일루사 황제는 ‘몇 달 내로 내전 없이 모든 일을 마무리하게 될 것 같으며, 주고받은 도움에 대한 감사의 뜻은 결코 잊지 않겠다’고 적혀 있던 왕자의 마지막 서신을 떠올렸다.

한때는 넬라른의 상황이 왕자들 간의 본격적인 내전으로까지 번지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엄청나게 빠르고 안정적인 결말이었다.

넬라른은 국토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으나 기후와 지형이 훌륭하여 오랜 역사 내내 안정적으로 서부 소국들의 중심이 되었던 나라였다. 최근에는 문제가 많아 국민들이 다수 이탈했었다지만 에제인 왕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그것도 옛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케일루사 황제는 이대로 왕자가 흔들림 없는 동맹이 되어 주기를 바랐고, 현재의 결과에 몹시 만족했다. 오르의 썩은 귀족들이 이익을 얻는 주된 길목이 넬라른을 비롯한 서부 국가들에 있으니 그곳을 잘 틀어막기만 해도 황제 측에는 큰 힘이 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황제의 기분은 썩 괜찮았지만, 상자를 집어 들어 열어 본 키시아르의 표정은 방금보다 조금 더 묘하게 가라앉아 보였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사안이라도 있나?’

그리 생각하며 다시 한번 상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던 황제의 귓가에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혹 왕자가 2성을 발현했다고 합니까?”

“음? 아…… 그런 소식이 이번에 있었던 것도 같구나. 2성을 발현한 시기에 적을 만나 위험할 뻔했으나 괜찮았다지. 어떻게 알았느냐?”

“향이 느껴져서 알았습니다. 아마 왕자의 2성은 알파일 것 같군요.”

“그게 그리 확실히 느껴진다고?”

황제도 각성자가 되었다지만 그는 2성을 발현하지 않았기에 2성 발현자에 대해서는 여전히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조금 놀라움을 느끼며 키시아르의 얼굴을 돌아본 황제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손끝을 멈칫 굳혔다.

에제인 왕자가 고국으로 향하는 동안 접했던 위험에서 유더 아일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그와 친우가 되었다던 정보.

그 유더 아일은 눈앞의 아우가 유난스럽게도 아끼는 보좌였으며 황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던진 용감한 자이기도 했고,

그리고…… 황궁 한복판에서 아우와 함께 춤을 춘 유일한 상대이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사람들 사이에서 온갖 말이 오가는 그 대단한 사건이 어떻게든 용납될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의 2성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

키시아르가 누구인가.

본디 선황이 비밀스레 내정했던 황태자 자리를 빼앗기고 선대 황태후의 모략에 몰려 펠레타 공작이 되었을 때도 그저 웃기만 했던 이다.

곱게 자란 소년의 몸으로 춥고 황량한 펠레타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고 그곳을 가치 있는 땅으로 바꿔 내는 데 기어이 성공했던 그가.

그릇에 금이 가고 제가 가진 힘을 단 한 번도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묵묵히 가야 할 길을 위하여 걸었던 존경스러운 아우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가.’

아무리 눈과 피부로 느끼면서도 설마 싶었던 모든 것들이, 이토록 실감이 난 건 또 처음이었다.

황제는 자신이 각성하고 난 뒤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눈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늘어져 있던 유더를 품에 안고 있던 키시아르의 얼굴을 아직 생생히 기억했다.

자신도 손끝을 떨 만큼 엉망진창이었으면서도 상대를 팔 안에서 내려놓지 않고 머리를 기댄 채 끊임없이 피를 훔쳐내던 그 눈빛.

그때는 금세 다시 정신을 잃느라 환상처럼 여겨졌던 그 눈빛이 또다시 지금 여기에 재림한 것만 같았다.

물론 그것은 황제가 그의 혈육이기에 겨우 알 수 있었을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고, 키시아르는 이내 ‘어차피 살펴보려 했던 물건이니 가져가도록 하겠다’는 답과 함께 유물과 서신이 든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폐하께서도 부디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을 일보다 우선하여 돌보아 주십시오.”

“……그래. 아일 남작의 상태가 좋아지고 나면 그와 다시 한번 오거라. 드러내 놓고 상을 줄 수는 없다 해도 감사의 뜻은 전하고 싶으니.”

황제는 아우가 사라진 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같은 핏줄이기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이상 더 파악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제 아우는 완전히 진심이었다.

***

유더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열고 들어온 이는 손에 묽은 스프를 든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이논이었다.

“점심이다, 먹어.”

약사가 휴식을 취하는 이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간수가 죄수에게 하는 말과 더 비슷하게 들렸다.

“내려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기껏 가져와 줬으니까 그냥 먹어. 눈이 안정되려면 무조건 안 움직이는 게 좋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유더가 무얼 하고 왔는지 알게 된 뒤로 심기가 썩 좋지 않았던 이논을 상대로 이 이상 대꾸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듯했다. 유더는 경험에 따라 얌전히 거대한 스프 그릇을 받아 들었다. 어쩐지 방에 있는 세수용 그릇과 재질이 같은 듯도 했으나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먹는 동안 눈 좀 들어서 여기 봐 봐.”

“…….”

“내 손가락 따라서 눈동자만 움직여.”

유더는 얌전히 이논의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피를 줄줄 흘렸던 혜안 쪽이 조금 욱신대긴 했지만 이전에 비하면 아주 멀쩡했다.

“이제 거의 다 회복되긴 한 것 같네.”

“그렇다니까.”

“그래도 약은 먹어야 되니까 먹어라. 그리고 할 이야기 하나 또 있어.”

“뭔데.”

“네가 시킨 귀찮은 일 관련.”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채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간 정보부가 조사했던 황태자의 치료사들. 즉 나그란의 별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유더의 수저질이 잠시 멈추자 이논이 날카롭게 경고했다.

“손 쉬지 마. 다 먹고 나서 얘기해 줄 거야.”

“……알겠어.”

결국 그 많은 수프를 감시의 눈길 아래 다 비우고, 산더미 같은 약까지 먹고 나서야 이논은 뜻대로 입을 열었다.

“너희가 그놈들을 따로 계속 감시하는 동안, 나는 나대로 주변 놈들의 도움을 받아서 살펴봤거든. 별로 대단한 정보는 없었지만 꽤 흥미로운 걸 하나 듣기는 했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건 이제부터 판단하면 되겠지. 알려 줘.”

“그놈들이 현자라고 부르던 그 대장 놈 말이야. 예전에 수도에서 살았던 놈 같다는 말이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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