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화
케일루사 황제에게 오랫동안 앓아 온 지병이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황태자 선정 시험 시기 때에 겪은 마차 사고 이후로 시작된 그 원인불명의 지병으로 인해 황제는 태양궁 밖으로 두문불출했고, 스스로 감금이라도 한 듯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큰일이 생기면 황제가 직접 작성한 서면을 통하여 의견을 내세우고 주변의 관리들을 움직여 뜻을 이루기는 했으나 그저 그뿐.
항간에는 황제가 앓는 병이 끔찍한 피부병이라거나, 광인이 되는 병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정확한 답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황제가 두문불출하던 시기를 기점으로 수도에 돌아와 제대로 된 망나니다운 활동을 시작한 펠레타 공작조차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한 디아카 가는 한없이 여유로웠고, 황제 대신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황후는 날이 갈수록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그 태도의 변화를 통하여 케일루사 황제의 지병이 영영 나아질 길이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어차피 곧 죽을 이를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이며, 그가 무슨 짓을 하든 힘들여 칼을 들 필요가 무어 있을까?
어차피 황가의 권위가 4대 공작가들과 맞부딪치기 어려워질 만큼 낮아지기 시작한 지도 벌써 수십 년째였다. 황자 시절부터 뛰어난 언변과 똑똑한 머리를 자랑하며 기대를 얻었던 케일루사 황제가 아무리 부딪쳐도 선대 시절부터 짓눌린 힘의 관계를 도로 뒤집기란 어려웠다.
몸이 멀쩡한 때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곧 죽을 지병까지 얻은 다음에야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황가는 더 이상 수백 년 전처럼 어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본디 황제를 따르는 관리들과 대대로 물려받은 영토를 수호하는 영주 귀족들의 협치 아래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던 오르의 체계는 귀족파를 더욱 강성하게 만들려는 디아카 공작과 타 공작가들의 묵인 아래 날이 갈수록 힘을 잃었다.
공작가들의 위상은 황자나 황태자와 다를 바 없이 불리는 그들의 호칭 하나에서도 표가 났고, 황가를 지켜야 할 황궁기사단은 황실보다 각자의 가문과 이권을 더욱 중요시하는 이들로 가득 찼다.
드넓은 영토를 차지한 수많은 귀족들은 혼란을 틈타 관리들과 협치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제 배를 채우려 욕심을 부렸다. 4대 공작가와 서로 견제하면서도 때로는 손을 잡으며 공생해 온 오르 황가의 천년 역사에서도 이 정도로 귀족들의 힘이 강력했던 때는 처음이었다.
‘어차피 지금의 황제는 곧 사라질 테니까. 새로운 황가가 올라오기 전까지 지금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최대한 챙겨야지.’
한번 자리 잡은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황제가 마병단 설립에 힘을 보태도, 그가 전보다 매서운 태도로 아페토 공작가와 타인 공작가의 변고를 조사하라 일러도, 심지어는 몇 년 만에 황궁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도 많은 이들은 그것을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래와 같은 소식이 태양궁에서 흘러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태양궁에 몬스터를 보내어 황제를 해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 범인을 반드시 잡아내어 배후에 죄를 물을 것.’
예전에는 이런 사건이 제법 흔했다. 케일루사 황제가 한창 대외적으로 움직이며 공작가들을 견제하던 시절에는 잊을 만하면 태양궁이나 새벽궁에서 각종 수상쩍고도 위험한 사건들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려 태양궁에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했다.
하필 마병단이 서부에서 몬스터 이상 발생을 해결하여 치하하는 파티가 열린 이후에, 하필이면 태양궁에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
누가 보아도 상징성이 뻔한 공격이었다.
‘어차피 끝도 얼마 안 남았을 텐데, 디아카 공작 측도 참 대단하군.’
‘굳이 이런 식으로 건드린 건 역시 이번 파티 때 마병단에게 얻은 모욕에 대한 보답이겠지. 황제가 마지막을 앞두고 무슨 짓을 하든 소용없다는 의지를 이런 식으로 드러내다니, 두렵구나.’
‘뻔하긴 하지만 어차피 이번에도 꼬리만 잘라 내고 끝날 거야. 그 디아카가 아닌가.’
때를 맞추어 태양궁 내부에서는 황제의 지병이 시해 미수 사건 이후로 더욱 악화되었다는 소문이 은밀히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여기며 디아카 공작가를 두려워하는 한편, 황제만 믿고 있던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은 움츠러들 것이라 예상하였다.
“……키시아르. 짐이 보낸 편지는 재미있었느냐?”
그리고 케일루사 황제는 침대에 반쯤 누운 채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얼굴로 아우와 마주하는 중이었다.
“정말 놀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폐하께 장난으로는 진 적이 없다 생각했는데,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그렇겠지. 짐도 처음에 이 힘을 깨닫고는 제법 기겁했었으니.”
담담히 대답한 황제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가는 사라졌다.
“그 편지를 통하여 설명하고 몸소 보여 주었듯, 짐은 이 손이 닿은 물건에 짐의 눈과 귀를 잠시 옮길 수 있다. 그 물건을 받은 이가 행하는 일을 가만히 앉아서도 바로 보고 들을 수 있더구나.”
키시아르가 마병단에서 받았던 황제의 서신은 겉보기에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것을 받는 즉시 짐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소리 내어 말하라. 다만 짐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던 것만이 기묘했을 뿐이었다.
키시아르는 이것이 황제의 능력과 관련된 서신임을 깨달았다. 그가 유더와 함께 고민한 끝에 심각하게 내뱉은 질문은 ‘황후 폐하께 드레스를 더 보내 드려도 되겠습니까?’였다. 그리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날아든 새로운 전서조의 다리에는 ‘물색 옷은 안 된다. 더불어 아일 남작을 쉬게 하라’는 답이 적혀 있었다.
바로 곁에서 보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정확하고도 소름 돋는 답신이었다.
“능력을 깨달으신 건 역시 황후 폐하 덕분이십니까?”
“……그런 셈이지.”
황제는 자신의 옆자리를 지키던 황후가 자신의 궁으로 돌아간 이후, 평소와 다름없이 그녀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기이한 힘이 펼쳐지며 자신의 눈앞에 실제로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누워 있던 침대에서 황급히 도로 일어나려다 굴러떨어질 만큼 놀랐다.
물론 그 힘은 오래지 않아 꺼졌으나 황제는 몇 번의 시험 후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를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아직까지는 이 힘을 어떻게 해야 더 오래 발휘할 수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더 활용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분명 도움이 되겠지.”
“이를테면 황제 폐하께서 지병이 악화되어 몹시 위중한 상태라 오해하고 있을 이들의 반응을 살피기에도 아주 제격이겠군요.”
“사실 이미 보내 두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형제의 마주친 눈동자 사이로 익숙한 감정들이 오갔다. 정도는 달라도 누군가를 향한 서늘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만은 그린 듯 똑같았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도 벌써 알아내었다. 이번 침입 미수가 디아카 공작의 성격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여겨 이상했는데, 주변의 반응을 보니 과연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닌 듯하더구나.”
“역시 그랬군요.”
“태양궁에 침입하려는 자들은 제법 여러 경로로 들어왔었지. 그날의 정보가 새어 나간 것만은 분명하나, 여기서 일어날 자세한 일을 알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알았다면 그렇게 탐색하고 위협하며 들여다보려 노력하지 않고 훨씬 확실한 방법을 썼을 테니.”
“나단과 마병단원들의 조사 결과로도 그렇습니다. 다른 길로 들어온 평범한 자들은 전부 기사들 선에서 걸러져 나갔고, 마지막까지 남아 침입할 수 있었던 자들이 이번 일을 저지른 각성자들이었으리라 판단됩니다.”
“그자들에 대해서는 파악했느냐?”
“칸나의 말로는 그자들 중 정보 차단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었던 듯하다고 합니다. 동물과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자의 힘 또한 또 다른 제3의 다른 능력자의 도움을 받아 발휘되어 최초 발현지를 읽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군요. 개개인에 대해 확실히 파악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정보를 읽는 능력자가 있어도 그 정도라니, 보통 치밀하게 움직인 게 아니군. 이쪽에서 마병단을 불러 대비하리란 정보까지는 몰랐을 텐데도…….”
턱을 문지르던 케일루사 황제의 안경 너머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추측들이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육신을 건사하는 것만 해도 힘겨워 다른 건 거의 할 수 없었던 이전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이 명석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네게는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구나.”
“폐하의 현명하신 눈은 속일 수가 없나 봅니다.”
키시아르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제 보좌 쪽에서 유력한 범인 후보를 짚어 냈습니다. 이전부터 다른 일 관련으로 뒤를 쫓고 있던 각성자 집단이 현재 황태자의 곁에 있는 것을 확인했더군요. 목적은 아직 알 수 없으나, 그들이 이번 일을 위해 일시적인 도움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생각됩니다.”
디아카 공작 측은 이번 사건 직전에 상당히 많은 각성자들과 접촉했다. 각성자들로 사병을 늘리고, 용병들과 계약을 맺었으니 그들 중 하나가 이번 일을 저질렀을 확률이 높기는 했다.
하지만 유더는 다른 이들을 지목했다. 지금쯤 마병단에서 반강제로 휴식을 취하고 있을 키시아르의 소중한 보좌는 그간 마병단 내 정보부를 만든 후 해 왔던 개인적인 조사를 토대로 가장 의심스러운 자들을 단숨에 골라냈다.
‘디아카 공작 주변에 있을 각성자들 중,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자들을 찾아야 한다면 저는 이들이 단연 의심스럽습니다.’
그가 짚어 낸 이들은 황태자와 그를 치료하고 있다는 각성자 치료사들이었다. 그들의 정체는 현재 마병단과 펠레타 기사단이 뒤를 쫓고 있는 위험한 각성자, 나한의 본거지인 나그란의 별로, 심지어 그들이 그토록 따르던 ‘현자’란 자도 현재 와 있는 듯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키시아르의 설명을 들은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자들에 대해서도 조사해야겠구나.”
“그자들은 때마침 그 침입의 날 전날부터 현재까지 줄곧 광휘궁에 머물고 있는 중이더군요. 재미있는 우연이지요.”
“짐은 재미가 없다만, 그렇다면 이 힘으로 알아보는 쪽이 좀 더 쉽겠군.”
“괜찮은 연습 상대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한동안은 위중한 척을 계속하며 주변을 살필 생각이다. 그러니 너도 박자를 잘 맞추도록 하거라.”
“맡겨 주십시오.”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흠집 하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고개를 기울이며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런데, 키시아르.”
“예, 폐하.”
“혹 그날 이후로 잠을 제대로 못 잤느냐?”
불시에 치고 들어온 질문은 아무리 키시아르라 하더라도 빈틈을 보일 수밖에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 여유로워 보이기만 했던 키시아르 라 오르의 미소가 일순 멈칫했다가는 다시 본래대로 돌아갔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모른 척하지 말거라. 다른 사람의 눈은 몰라도, 짐을 속이기는 어렵지.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면 말하거라.”
그제야 키시아르의 표정이 조금 변화했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야기하던 때의 기대 어린 표정을 지웠다. 그 자리에서 드러난 것은 스스로도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한 미묘하고도 조금 피로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아뇨,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지?”
“……조금 묘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황제가 물었다. 그는 제 아우가 이런 이유를 대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기에 다소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파악하려는 날카로운 눈빛이 얼굴을 낱낱이 훑었다.
“예, 꿈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악몽이라 할 만했지요. 아무래도 그래서 조금 피로했던 모양입니다.”
키시아르가 웃는 얼굴로 미간을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