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58화 (558/805)

558화

눈에 비친 광경들은 온통 일그러져 있었다.

가슴을 움켜쥔 채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끔찍한 감각에 떨던 유더는 문득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가 낯설게 생각했다.

방금, 뭐였지?

무슨 일이 일어났었지?

모르겠다. 느껴지는 거라곤 오직 가슴 속에서 무언가 강제로 뽑혀 나간 듯한 욱신거림과 텅 빈 구멍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듯한 추위뿐이었다.

하지만 다친 곳은 아무 데도 없는데, 그럴 리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동안 끔찍하다 여겼던 감각들은 점차 환상처럼 사라져 갔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듯 모든 고통이 사그라지고 제가 그런 것을 느꼈다는 사실조차 거짓말처럼 무감각해질 때쯤, 유더는 비로소 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깨달았다.

닫힌 창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어둡고 비린 물 냄새.

이곳은 펠레타 공작이 머무는 펠레타 성이었고, 유더는 검을 쥔 채 두 발로 멀쩡히 서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

가슴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며 앉아 있는 한 사내.

창백한 이마 위로 늘어진 금빛 머리칼이 보였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잠든 것처럼 그렇게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누가 보아도 숨이 이미 끊어졌다는 사실이 확연했으나 계속해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유더는 천천히 눈을 내려 제 손을 보았다. 그의 몸과 손, 그리고 검 끝은 얼룩덜룩한 피로 엉망이었다.

그제야 제가 무엇을 했는지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유더는 황제의 첫 임무를 성공시켰다. 펠레타 공작은 황제가 원하는 대로 죽음을 맞이했으니, 이제 남은 건 흉기를 버리고 탈출하는 것뿐이었다.

유더는 손에서 검을 놓았다. 오늘을 위하여 지급받은 평범한 싸구려 검이 무거운 쇳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누가 저 검을 조사해도 흉수가 누구인지는 확신할 수 없을 터였다.

등을 돌려 걸었다. 불씨가 꺼진 채 흉물스레 입을 벌린 마석 난로를 스쳐 지나갔다. 들어온 곳과 같은 비밀 통로를 향하여 빠져나가는 동안 알 수 없는 스산한 감각이 끝없이 등골을 훑었다.

마치 두고 와서는 안 될 무언가를 두고 온 것처럼…….

“…….”

유더는 번뜩 눈을 떴다. 얼굴이 젖어 축축했다. 숨을 몰아쉬며 손을 휘젓자마자 누군가 그의 팔을 붙잡아 부드럽게 내렸다.

“진정하게.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자세를 바꾸려던 것뿐이니까.”

“……단장님?”

목구멍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몹시도 낯설었다. 유더는 메마른 목을 타고 터져 나오는 잔기침을 삼키며 저를 부축한 키시아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땀에 젖어 엉망이 된 머리칼과 짙은 피로가 묻어나는 붉은 눈동자. 하지만 뺨에는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열기와 생기 넘치는 감정들이 묻어났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부터 발목을 끌어당기는 듯했던 스산한 추위가 일제히 환상처럼 멀리 물러났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황제가 누워 있었고, 황후가 그의 손을 잡은 채 무어라 말을 하는 중이었다. 시종장이 바쁘게 오고 가며 뜨거운 물수건으로 황제의 얼굴과 손발을 닦고 주물렀다.

‘아……. 잠깐 정신이 가물하다 싶더니, 또 기절할 뻔했던 모양이군.’

그것을 보고서야 유더는 키시아르도 그를 부축하지 않은 다른 쪽 손에 물수건을 쥐고 있음을 알았다. 깨자마자 어째 축축하다 싶더라니 그사이 키시아르가 그것으로 피로 얼룩졌던 유더의 얼굴을 닦아 준 모양이었다.

‘황제와 황후의 앞에서 이런…….’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더는 고개를 저으며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황제의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유더의 경우 앉았다기보다는 거의 키시아르의 품에 기대어 누운 상태였지만 침대 쪽에 있는 귀하신 분들 중 그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으며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다.

“폐하께서 완전히 각성자가 되신 것을 확인하고 우리의 연결을 거두었네. 그릇 위를 덮어씌운 힘의 보호 또한 완벽하게 효과를 발휘하고 있더군. 내 힘이 타인에게 언제까지 적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아.”

혹 문제가 생길 듯하다면 즉시 와서 살펴보며 끌어당기는 힘을 보강해 주면 될 듯하다는 말을 한 뒤, 키시아르는 바깥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나단과 다른 이들에게 신호를 받았네. 예상외의 침입자가 있었지만 잘 정리했다더군. 남은 증거물 정리가 끝나는 대로 올 테니 곧 자세한 보고를 받게 될 거야.”

“……다행이군요.”

“그래. 다행이지. 앞으로가 아주 기대도 되고.”

기대라. 참 신기한 단어가 아니느냐고 중얼거리며 키시아르는 황제 쪽을 향하여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미소 속에 켜켜이 쌓인 시간과 감정을 전부 다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거기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기쁨이란 사실만은 확실했다.

유더는 조용히 그 얼굴을 응시했다. 어쩌면 이 일을 반드시 해내야겠다고 결심했던 순간부터 그는 저 얼굴을 보길 원했었던 것도 같았다. 한계까지 쥐어 짜내어 죽을 것처럼 메마른 상태일 텐데도 어쩐지 그리 목마른 기분이 들지 않았다.

“……폐하와의, 그리고 나와의 약속을 모두 지켜 주어서 고맙네.”

키시아르의 얼굴을 보고 있느라 그 말은 조금 늦게 유더의 귀로 들어왔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이 말을 전하고 싶었어.”

황제에게서 눈을 뗀 사내가 고개를 숙여 유더의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이 손으로 어떤 일들을 해냈는지, 나는 결코 잊을 수 없겠지. 잊어서도 안 되고.”

“…….”

“이제 우리는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니 곧 돌아가야 해. 돌아가면 몸이 괜찮은지 검사를 먼저 받고…… 치료도 하고, 그리고 나서 내가 네게 마음껏 마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겠나?”

부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정중히, 그러나 간절한 열망을 담아 청하는 그 낮은 속삭임이 가슴속에 불꽃의 씨를 싹 틔우는 듯했다.

유더는 조용히 제 손을 붙잡은 온기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단장님께서도 검사와 치료는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지.”

정신이 잠시 가물거렸던 동안 느꼈던 희미한 기억 속의 추위를 눈앞의 사내는 알지 못한다. 그 사실이 유더에게 아직까지는 약간의 위안으로 다가왔다.

그때의 기억이 갑자기 지금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아마도 오늘 내내 키시아르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일 터다. ‘연결’이 정신을 잃은 다음에도 오래 유지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키시아르가 또 무언가를 공유하여 느꼈을지도 모르니까.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폐하께서 어떤 능력을 각성하셨는지는 말씀해 주셨습니까?”

“정신이 없어 보이셔서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지는 않더군. 황후 폐하가 보고 싶었다는 말씀만 하다 막 잠드신 참이네.”

아무렇지 않게 황제의 내밀한 모습을 입에 담고도 키시아르는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유더가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도 된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렇군요.”

“깨어나서 상태가 안정되면 소식을 전해 알려 주시겠지.”

케일루사 황제의 각성 능력이라. 유더는 그간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 보았다. 혈육끼리는 비슷한 능력을 각성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는데, 키시아르의 능력이 다소 특이한 편이어서인지 황제의 능력도 쉽게 짐작이 되지 않았다.

‘에제인 왕자처럼 방어나 보호에 특화된 능력이라면 앞으로 지내시기는 확실히 편할 텐데……. 어떨지 모르겠군.’

그 답은 그들이 마병단으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게 되었다.

황제가 자신의 ‘눈’과 ‘귀’를 붙여 보낸 편지를 통해서였다.

***

“……그러니까. 그날 태양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아낸 이는 아무도 없고, 침입할 수 있었던 이들조차 치료사들뿐이었단 거로군. 그런데 그놈들조차 예상에도 없던 큰 사고를 쳤고 말이야.”

“송구합니다, 공작 전하.”

디아카 공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혹한 얼굴로 측근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귀족들은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는 기분으로 고개를 숙여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멍청한 놈들이 황궁 내에 몬스터를 들여 황제 측에게 빌미를 주다니. 내가 명한 건 분명 적당히 은밀하게 손을 써서 내부의 사정을 알아내라는 것뿐이었는데, 대체 말이 어떻게 전달되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이…….”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겁에 질린 이들도 많았다. 디아카 공작이 혀를 차자 그 공포는 더욱 넓게 전염되었다.

“어차피 황제 측에서 무엇을 알아내든, 그자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라 던져 주면 그만이니 문제가 될 일은 없지. 하지만 누가 그때 그놈들에게 내 뜻을 전달했었는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아야겠어. 누가 그놈들과 현재 연락을 맡고 있는가?”

“……접니다.”

“렌보우 자작.”

이제는 없는 뒤르망 남작 대신 치료사들과 디아카 공작 사이의 연락을 맡게 된 렌보우 자작이 비교적 침착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래, 말해 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공작 전하의 뜻은 분명히 더함도 덜함도 없이 그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제 이름과 신을 걸고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번 일이 겉으로는 실패한 듯 보여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더군요.”

디아카 공작의 눈썹이 불쾌하게 움찔거렸다. 귀족들이 찌푸린 얼굴로 웅성거렸다.

“그렇지 않다?”

“예. 그자들을 이끄는 ‘현자’라 불리는 이가 있습니다. 그가 공작님을 직접 만나 뵙고 싶다며 요청을 해 왔습니다. 이번 일에서 알아낸 정보를 오직 공작님께 직접 보고드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건방지고 위험한 작자로군…….”

“감히 그런 말을.”

수군대던 목소리들이 디아카 공작의 의자를 두드리는 작은 소리 하나에 순식간에 썰물처럼 사라졌다.

늙은 공작은 귀족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바로 화를 내거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렌보우 자작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 큰 사고를 치고도 목소리가 크다는 건, 그만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 자신하기 때문이겠지.”

“…….”

“좋다. 오라고 전하도록.”

“정말이십니까, 전하? 그런 천한 자들을…….”

“그냥 바로 처리해 버리시는 쪽이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디아카 공작은 귀족들의 말을 무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황태자를 치료하고 있기는 한 놈들이다. 궁금했었으니 한번 얼굴은 보고 나서 결정하도록 하지.”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렌보우 자작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순간 그의 눈 속에서 몽롱한 빛이 반짝였음을, 그리고 대화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떠난 자작이 곧바로 ‘치료사들’이 머무는 숙소로 향하여 현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이야기를 전했음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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