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55화 (555/805)

555화

이것이 죽음이라면, 그건 케일루사가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그려 왔던 그 어떤 예상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그가 상상해 왔던 죽음은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황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릇에 금이 간 황족들은 모두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다. 금이 가면 갈수록 그 고통의 주기는 점차 짧아지는데, 죽음이 가까워지는 때가 오면 며칠씩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그 어떤 진통제도 제대로 통하지 않을 만큼 거대한 고통을 홀로 감내해야 했다.

사람이라 볼 수 없는 꼴로 울부짖으며 차라리 어서 빨리 이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애원했다던 기록. 지나친 고통에 정신이 나가 끝내 백치가 되어 버렸다던 기록. 고통을 잊기 위해 집어 먹은 마약조차 효과가 없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약을 가져온 시종과 자신의 몸을 모두 짐승처럼 물어뜯었다던 기록.

제 배와 머리에 칼을 마구 찌르며 웃었다는 자, 어린 황녀의 그릇에 금이 가자 그것을 비관하여 별궁에서 함께 목숨을 끊은 유모, 젊은이였음에도 죽을 때는 악물었던 이와 긁어 대던 손발톱이 모두 빠져 노인과 같았다는 자.

그 기록들은 모두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지옥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때문에 케일루사는 자신의 마지막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들과 자신의 차이는 그저 나이를 좀 더 먹고 나서 금이 갔는지, 아닌지의 차이일 뿐 끝은 똑같을 터였다.

실낱같은 목숨을 붙잡고 끝까지 늘어진 끝에 남는 건 결국 그릇이 부서지는 날, 몸이 터져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끔찍하게 죽는 결말뿐이다. 조각난 몸 대신 관을 채우는 건 미리 주문하여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인형일 테고,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조차 역사에 남지 않게 되겠지.

스스로의 손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패배자가 되어, 등 뒤에 소중한 이들을 아프게 남긴 채…….

‘…….’

씁쓸함 속에서도 소중한 이들을 떠올리자 케일루사의 머릿속은 그들로 순식간에 꽉 찼다.

한때 그의 것이 될 예정이었던 자리를 빼앗은 못난 형을 원망할 만도 하련만, 그러지 않고서 오히려 다른 곳에서라도 같은 길을 함께 걷고 싶다고 말해 준 다정한 아우.

선황 때부터 황궁에 있었기에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음에도 아직 너무나 젊고 기댈 곳이 마땅치 않았던 황제를 걱정하여 자리를 지킨 나이 든 시종장.

이제는 곁에 없으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세상을 보는 눈을 물려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한때 그의 자식이 되어 제국의 미래를 이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어리고 당차던 소녀와.

그의 인생에 두 번은 없을 만큼 심장을 뒤흔들었던 어떤 여인.

마지막 사람을 떠올린 순간 케일루사는 귓가에서 겨울바람이 앙상한 가지를 뒤흔드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 여인이 물빛 드레스를 걸친 복숭앗빛 뺨의 소녀였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상대가 황태자라는 것도 모르고서 황태자비 후보 시험을 어떻게 해야 잘 그만둘 수 있을지 상담하며 멋쩍게 웃던 그녀의 미소 덕분에 책밖에 몰랐던 딱딱한 소년은 처음으로 타인의 손을 잡고 스스로 밖에 나가는 선택을 했고, 그녀의 손길 덕분에 이 세상이 얼마나 푸르고 넓은지를 깨달았다.

죽어 있다고만 생각했던 이 황궁에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지.

나무들은 얼마나 크며 그곳에 찾아와 몸을 뉘는 나비와 벌, 새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

늘 똑같다고 생각했던 새벽은 얼마나 새로웠는지.

사실은 단 한 번도 똑같은 적이 없었던 것들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그녀를 통해 배웠다.

그녀가 없어지면 그 모든 것도 다시 잃게 되리란 사실을 깨달았기에 있는 힘껏 붙잡았다. 생애 처음으로 욕심을 부려 무릎을 꿇고 매달린 끝에 그녀는 케일루사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나란히 앉아 있으면 세상의 모든 어둠이 주변에서 물러나 사라지는 것만 같았던, 케일루사 라 오르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 소녀.

이 평온이 죽음이라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가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디인지 모를 곳에서 거대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토록 바랐던 안식 속에 있음에도 케일루사는 자신이 이 평온함보다 그 소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햇빛을 받으면 잔잔한 호수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잘 익은 가을의 밀과 같은 머리칼. 사람을 어려워하지만 실은 누구보다 다정하게 웃을 수 있는 입술.

몇 번이고 상처받고 시들면서도 결국 다음 해에 다시 피어나는 꽃처럼 강인한 얼굴.

아,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울고 있었던 것 같지만 닦아 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이제 이 어둠 속에서 그녀를 잃고, 그녀의 얼굴조차 떠올리지 못하게 되고, 그저 영원히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그런 안식이라면 필요 없는데.’

단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고, 나는 지금 평온하다고 전할 수 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정말로 한 번만.’

그 이후에는 그녀가 평온해질 테니, 대가로 영원히 다시 고통받더라도 감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폐하.’

목소리가 들렸다.

벼락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방금까지 케일루사가 그토록 생각하였던 그녀였다. 그녀가 어딘가에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슬픔과 격정으로 떨리는 그 목소리는 몇 번이고 폐하, 폐하. 하며 같은 부름을 반복하다가는, 마침내 꺼질 듯 작게 다른 이름을 불렀다.

‘케일루사…….’

아. 더 이상 이 평온 속에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다면 그 어떤 안식도 케일루사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케일루사 라 오르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양부모가 억지로 가져다 붙인 어설픈 이름이 아닌, 그녀가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났던 단 하나의 이름을.

‘……파리아.’

그 순간,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변화했다.

보이지 않는 변화의 씨앗이 순식간에 개화하여 모든 것을 뒤집어 바꾸어 버렸다. 육신을 이루는 아주 작은 알갱이 하나까지도 이전과 다른 새로운 무언가로 바뀌고 싹이 터 생장하는 듯한 감각 속에서 케일루사는 엄청난 고통에 신음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어떤 힘이 자신의 내부를 억지로 끌어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더기가 된 천을 간신히 기우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으나 그의 몸에서 깨어난 씨앗은 그 고통을 막지 않고 오히려 달려들어 힘을 보탰다.

산산조각 난 파편들이 모인다. 인지할 수 없는 소리들이 폭우처럼 귀를 때렸다.

시간도, 공간도 인지할 수 없는 영원 같은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고,

“…….”

“폐하!”

황제는 마침내 다시 눈을 떴다.

그것은 정말로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신비한 순간이었다.

유더는 황후의 입맞춤이 닿은 순간부터 급속도로 떨리기 시작한 황제의 몸 때문에 반사적으로 재차 눈을 떴다. 그때 그의 혜안에 비친 건 다른 이들이 보고 있을 광경과 전혀 다른 무언가였다.

키시아르가 애써 놓지 않고 있던 황제의 몸속 붉은 기운들이 일제히 물속에 풀어진 가루처럼 녹아내리며 전신으로 퍼지고는, 이내 모든 빛이 암전된 듯 툭 꺼졌다. 처음에는 혜안이 꺼진 줄 알고 재차 힘을 일으키려 했으나, 키시아르가 그를 막았다.

그의 붉은 눈에 비친 유더의 눈은 여전히 금빛으로 빛나는 중이었다.

‘실패인가?’

그리 생각하여 저도 모르게 숨을 쉬지 않았던 순간, 키시아르가 고개를 저었다.

“…들리나? 바깥의 소리가 멎었어.”

“…….”

“우리가 뒤를 믿고 맡긴 이들이 제 역할을 다 해 주고 있다는 뜻이네.”

유더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키시아르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역할을 다 해야지.”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고 계시다면…… 아시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다는 건 불이 꺼지기 직전일 수도 있겠지만 켜지기 직전일 수도 있지. 애초에 네가 사람의 몸속 기운을 보던 건 붉은 돌의 힘으로 일으키던 기적이었잖나.”

“…….”

“그렇다면, 갑자기 폐하의 내부를 볼 수 없게 된 것도 붉은 돌의 힘이 일으킨 것이라 생각하는 쪽이 맞지 않겠나? 폐하는 아직 숨을 쉬고 계셔. 정신을 잃으셨을 뿐, 살아 계시다는 뜻이네.”

그리고 살아 있다면 무엇이든 아직 해 볼 수 있다.

피로와 초조함에 젖어 있던 머리가 그 말을 듣고서야 가쁘게 삐걱대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유더는 제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훔쳐 내는 사내의 손 앞에서 비로소 유순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폐하!”

황후의 외침과 함께 황제가 손끝을 움찔거렸다. 그가 신음을 내뱉으며 호흡을 크게 들이마신 순간, 늘어졌던 몸 안에서 스르르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유더는 그 빛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서 마침내 다시 떠올라 재차 구축된 빛의 흐름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건…….”

황제의 배 아래쪽에 이전에는 없었던 붉은 빛의 응어리가 보였다. 그것은 키시아르가 붙잡아 두었던 붉은 기운들이었다. 계속해서 몸속에서 흘러나온 붉은 기운들이 그 응어리를 향하여 스며들었고, 전신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유더는 지금 자신이 각성자로 변화하는 사람의 순간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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