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53화 (553/805)

553화

‘침입자군.’

태양궁 내에서 일어나는 일의 정보가 어딘가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판단하여 호위를 늘렸을 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리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단순히 예상하는 것과 진짜로 그 일이 일어나 피부로 느껴지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했다.

‘침입한 배후야 뻔하겠지만 어떤 놈들을 보냈을지가 문제인데…… 이렇게 큰 소리가 올라오는 건 단순한 암살자 같은 건 아니란 거겠지.’

이곳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가케인과 칸나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그들이 호락호락하게 당할 이들이 아님은 알지만 방금 들려온 게 워낙 큰 진동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건 케일루사 황제 쪽도 마찬가지였던 듯, 방금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부드럽게 순응하던 내부가 순식간에 조금씩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폐하. 하나만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렸었지요. 지금이 그때입니다.”

키시아르가 말을 걸자 황제의 내부는 다시 본래의 흐름을 되찾았다. 그러나 잠시 후 무언가 터지는 작은 소리와 진동이 계속해서 불규칙적으로 발밑을 울리기 시작하자 겨우 가라앉았던 분위기도 재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쿠웅, 펑. 아스라한 소음이 울린 다음 이어지는 진동이 벽과 침대를 조금씩 흔들고 사라질 때마다 황제의 내부도 계속해서 뒤흔들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유더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하여 힘을 발휘했으나, 황제의 내부가 점점 더 혼란해지는 통에 몇 번이나 붉은빛을 놓쳤다.

그리고 그 혼란은 이전보다 더 큰 소음과 진동이 퍼진 통에 황후가 비틀거리며 의자를 붙잡고 주저앉은 순간 극에 달했다.

“아…….”

“황후……!”

누운 채 황후를 지켜보고 있던 황제가 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몸을 움직이려 했다. 순식간에 그의 내부가 정신없이 흐트러지며 유더의 힘이 반발력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폐하!”

시종장이 황제의 몸을 누르며 소리쳤다.

순수한 붉은 돌의 힘을 따라 반응하던 붉은빛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휩쓸려 사라지고, 키시아르가 긴 시간을 들여 힘겹게 끌어모았던 기운들 또한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요동쳤다. 전신의 힘이 요동치는 듯한 기분과 함께 눈 안쪽과 몸속 어딘가에서 익숙한 고통들이 느껴졌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키시아르의 안색도 무섭도록 창백해졌다. 그의 관자놀이와 콧날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마치 피처럼 턱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본 순간 유더의 눈앞에 번쩍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을 이은 실들이 요동을 쳤다. 연결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안 돼.’

유더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몸에서 좀 더 많은 힘을 뽑아내어 파고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잃어버린 붉은빛들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유더는 금빛으로 변한 제 눈동자에 무섭도록 핏발이 서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폐하!”

여기서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황제의 내부는 가라앉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윽……. 끄윽.”

고통을 이기지 못한 황제가 시트를 부드득 긁었다. 부러진 손톱 사이로 새어 나온 피가 검붉은 얼룩을 그렸다.

“폐하!”

진땀에 젖은 채 몸부림치던 케일루사 황제의 얼굴에서 안경이 벗겨져 나갔다. 유더는 그의 짙은 적색 눈동자가 어딘지 모를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는커녕, 이미 끌어모은 힘까지 잃어버리고 나자빠질 판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던 바로 그때, 유더는 문득 가쁜 호흡 속에서 제 손을 붙잡는 강한 힘을 느꼈다.

“…….”

키시아르가 그를 보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채로도 자신은 괜찮다는 듯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비로소 치솟았던 격앙이 조금 가라앉으며 눈이 터질 듯했던 고통도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눈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서야 금빛으로 변한 눈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트를 적신 피는 케일루사 황제의 것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괜찮아. 키시아르가 입술만을 움직여 속삭였다.

“이때를 위해 계속 준비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너는 잠시 눈을 감아도 좋아.

거부할 수 없는 명과 함께 유더의 몸을 감싸고 있던 향이 움직였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그와 동시에 한쪽 눈에서 또다시 뜨거운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 떨어졌다.

“황후 폐하!”

강제로 혜안의 힘을 차단한 검은 시야 너머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귀를 두드렸다.

“이쪽으로 와 폐하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어서.”

가쁜 호흡과 함께 황후가 몸을 일으켜 달려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유더를 지나쳐 황제의 곁에 꿇어앉아 손을 잡으려 했으나, 황제는 그녀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피로 젖은 손끝으로 간신히 황후의 손길을 쳐 낸 케일루사 황제의 입술 사이로 무어라 달싹이는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여, 긴. 위……험. 나……가요.”

“폐하…….”

이곳을 피해 나를 두고 나가라고, 황제는 오직 한 가지 말만을 반복하여 중얼거렸다.

그것은 그릇에 문제가 생긴 순간부터 제 곁이 그 어느 곳보다도 주변인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은 사내의 끊어질 듯 고통스러운 진심이었다.

“……키시, 아르. 안 돼. 짐은… 황후를 데리고…….”

“폐하……!”

황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세상이 무너질 듯 일그러진 얼굴 너머로 억눌린 흐느낌이 목울대를 울렸으나, 그녀는 간신히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내어 울지 않도록 참아 냈다.

대신 황후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키시아르를 향하여 돌아갔다.

키시아르는 마치 황후가 자신을 볼 줄 알았다는 듯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느리게 입술을 열어 황후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말들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황후의 머릿속에 선명히 새겨지듯 들어왔다.

“……무슨 말이라도 좋습니다. 무엇이든 폐하께 말해 주십시오. 황후 폐하가 아니라면 하실 수 없는 말들을. 화를 내셔도 좋고 원망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뒷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

황후의 눈동자 사이로 망설임과 흔들림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다시 한번 양손을 내뻗어 황제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필사적으로, 간절하게 붙잡은 손은 황후가 기억하던 것보다 너무나 앙상하고 메마른 상태였다.

그녀는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간신히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가기는 어디를 가라고 그러시는 겁니까.”

시체처럼 차가운 손에 이마를 맞댄 황후의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가지 않아요. 계속 여기 있을 겁니다.”

“…….”

“절대로 그때처럼 폐하를 두고 피하지 않을 거예요.”

“…….”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두 번 다시 혼자서 새벽을 보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손을 잡고 나란히 누워 셀 수 없이 많은 날들이 밝는 모습을 함께 보자고……. 그게 저희가 만들 가족이라고.”

기억하십니까. 황후가 중얼거리며 눈물 젖은 눈가와 뺨을 붙잡은 황제의 손끝에 비볐다. 그렇게 조금씩 미끄러져 내려가다 마침내 흐느낌을 삼키며 떨리는 입술로 손가락에 입을 맞춘 순간, 황제의 손끝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강하게 떨렸다.

***

가케인은 칸나와 함께 나단 주커만의 뒤를 따라 달렸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는 동안 차오르는 숨결 너머로 어이없는 감정과 열기가 머리를 두들겼다.

‘침입한 놈들이 사람만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니…….’

혼란을 정돈한 뒤 그들이 그대로 조종자를 찾아 밖에만 시선을 두었더라면 아마 놈들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당했을지도 몰랐다. 칸나가 무리해서라도 많은 정보를 읽어 낸 덕에 그것을 알아내어 정말로 다행이었다.

칸나는 비록 너무 많은 정보를 한 번에 읽어 내고 뽑아낸 탓에 코피를 흘리는 중이었지만 표정만은 기운차고 흉흉했다.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괜찮아. 읽어 냈으니까.’

처음에 조종당하는 이의 정보를 읽을 수 없었을 때 칸나는 조금 당혹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이 도움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급박하게 재차 발휘된 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넓고 강력하게 궁 전체를 뒤덮어 한계 이상의 정보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순간적으로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었지만 요즘 들어 미친 듯이 했던 정보 차단과 분류 훈련이 빛을 발하며 간신히 원하던 정보를 걸러 낼 수 있었다. 그 정보 차단 훈련을 왜 시작했는지 떠올리면 약간 미묘한 기분이었으나 아무튼 그 훈련을 위해 몰두했던 시간들은 헛되지 않았다.

칸나는 달리는 내내 전신을 통해 능력을 발휘하며 머리로는 끝없이 정보를 걸러 내고 분류하기를 반복했다. 손끝을 통해 스치는 벽, 창문, 그리고 공기마저도 스쳐 지나간 과거의 모든 정보를 끊임없이 토해 내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간 이들. 그들이 했던 움직임. 내비친 말들. 그로 인해 추정 가능한 생각. 궁에 배치된 이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무의식 속에서 뒤섞이고 분류된 뒤 합쳐지며 보통 사람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시간 안에 ‘옳은 답’만을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가케인, 주커만 경. 동물을 찾아내요. 새, 아니면 쥐 같은 작은 동물. 혼란에 섞여 창 안으로 숨어들 수 있는 것들. 분명히 이 안에, 근처에 있어요.”

“알겠습니다.”

“알겠어.”

그녀는 제게 맡겨진 이 임무를 절대로 실패할 생각이 없었다.

‘어떤 놈이든 절대로 이 이상은 못 넘어가.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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