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50화 (550/805)

550화

-휘이이…….

“폐하의 내부가 열렸습니다.”

방 전체를 휩싼 바람 속에서 모든 이의 머리칼과 침대를 반쯤 가린 얇은 커튼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유더는 케일루사 황제의 몸 위로 모습을 드러낸 아름다운 빛무리를 보며 내부가 열렸음을 선언한 뒤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적게 들었고, 속도도 빨랐다. 황제의 눈동자 속에서 엿보이는 의지의 방향이 바뀐 게 확실히 영향을 미친 듯했다.

유더는 이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상태의 내부를 살피며 사흘 전보다 그릇의 상태가 아주 조금 더 안 좋아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내부의 힘을 제대로 가두지 못하는 그릇이 자꾸만 흩어지려 할 때마다 몸 전체에 퍼져 있는 모든 빛의 흐름들이 일제히 경련하듯 떨리거나 외부로 터져 나올 듯 꿈틀대기를 불규칙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황제가 메말라 터진 입술을 지그시 악물며 숨을 토해내는 건 덤이었다.

그렇게 이마와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황제는 기어이 신음을 토하지 않고 고통을 참아냈다. 황제의 얼굴과 목에 식은땀이 맺힐 때마다 시종장이 다가와 따뜻한 물수건으로 그것을 살며시 눌러 닦아 주었다. 황제가 가느다랗게 호흡을 반복했다.

유더는 그가 진정된 듯 보일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그래……. 두 번째로 보고 나니 저번보다는 조금 덜 놀라게 되는군.”

황제가 금빛으로 변한 유더의 한쪽 눈동자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지금부터는 폐하의 내부에 퍼져 있는 힘 중에서 제가 보았던 붉은 힘을 찾아내 모을 것입니다.”

유더와 키시아르는 이 작업이 아마도 가장 시간이 길게 걸릴 일이리라 예상했었다. 유더는 그 점을 설명한 뒤, 키시아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빙긋 웃었다.

긴장한 티가 전혀 나지 않는, 평소와 똑같이 여유롭고 조금 장난기를 띤 듯한 미소였다.

“폐하. 지금부터는 저도 달라붙게 될 겁니다. 조금 아프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가능하면 부디 버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짐이… 고통을 버티지 못할 것 같으냐.”

황제가 느릿하게 물었다.

“물론 아니지요. 폐하께서 버텨 주셔야 할 것은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의 족쇄를 떨치고 일어나실 수 없도록 발목을 붙잡아 옥죄는 모든 생각으로부터입니다.”

“발목을 붙잡는 모든 생각이라.”

“그간 제 보좌가 고생하며 알아본 결과 각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각성자가 된 이후 새로이 발전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그것을 원하고 바라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말을 이어나가며 키시아르가 황제의 몸 위에 양손을 얹었다. 유더의 손끝을 조금 덮듯이 접촉한 길고 큰 손에서 서늘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러니 부디 지금 이 순간부터는 한 가지만 생각하십시오.”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은 채로,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신호했다.

“연결하겠네.”

“예.”

키시아르가 유더의 손을 완전히 잡았다. 유더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내리감았다. 키시아르의 몸을 중심으로 주변의 공기가 새롭게 일렁이며 유더의 눈 안쪽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불쑥 튀어 올라왔다. 맞닿은 손을 통해 이전에 느꼈던 것과 같은 기운이 유더에게로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기이한 감각이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의 연결이 지금 키시아르의 힘을 통해 재차 의도적으로 활성화되려 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황후 쪽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으나 어딘지 모르게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힘이 유더의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툭 건드렸다. 뒤이어 알 수 없는 힘이 그것을 그대로 쭉 끌어당기는 듯한 감각에 몸 전체가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아찔한 현기증이 쏟아졌다.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제 안의 무언가가 강제로 끌어당겨져 물 위로 부상하는 그 감각.

낯설고도 두려운, 그러나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이제는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것을 느끼며 유더는 키시아르의 손을 꽉 쥔 채 눈을 떴다. 그리고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마주했다.

그들의 사이로 실 몇 가닥이 서로 엉킨 채 하늘거리며 무게 따위는 없는 듯 신비롭게 나부끼고 있었다.

빛을 한없이 가느다랗게 꼬아내어 만든 듯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그것들은 두 사람의 몸 주변에, 맞잡은 손 사이에, 그리고 서로의 눈 속에도 있었다.

마주친 시선 너머로 키시아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느껴지나?”

“네.”

“나도 보이는군. 이전보다는 약하게 활성화될 수 있도록 최대한 조심했지만, 지나치게 이 현상에 집중하지 말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할 거야.”

“알고… 있습니다.”

키시아르가 작게 웃었다. 희미한 미소였지만 연결된 상태이기 때문인지 유더에게는 그 미소가 어느 때보다도 큰 파동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이곳의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할 사내의 향이 얇은 천처럼 다가와 유더를 빈틈없이 감쌌다.

‘아…….’

가쁘게 뛰던 심장이 그 단단한 지지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황제를 향하여 시선을 내렸다. 실제로는 아주 짧은 순간이 지났을 뿐이나 몹시 긴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부터 붉은 기운을 찾기 위해 내부를 훑겠습니다.”

유더의 손이 황제의 몸 위를 덧그리듯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가 도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훑는 듯한 그 손길을 따라 손바닥 안에서 붉은 힘이 서서히 일렁였다.

유더가 지닌 순수한 붉은 돌의 힘을 통해 황제의 내부에 그간 흡수되었으리라 추정 중인 같은 성질의 힘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시작되고 있었다.

‘황제의 안에 붉은 돌의 힘이 있다면, 그 힘은 분명 이 순수한 힘에 이끌려올 수밖에 없다.’

이전의 경험들을 통하여 유더는 자신이 각성자의 내부에 존재하는 붉은 힘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제가 그 힘을 흡수했다면 아직 각성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 여기에 반응할 터였다.

이전에 그는 분명 이 안에서 홀로 붉은 기운을 보았다.

그것이 환상도, 착시도 아니라는 증거를 이제 찾아내야만 했다.

-후우우욱…….

붉은 힘이 유더의 의지에 따라 황제의 내부를 훑을 때마다 내부의 엉킨 힘들이 일제히 휩쓸리며 이리저리 움직여 댔다. 그러나 유더의 손이 쓸고 지나간 자리를 뒤따라 되짚듯 다가온 키시아르의 손에서 무형의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자, 속절없이 휩쓸리던 힘들은 지나치게 움직이지 않고 다시 제자리를 되찾거나 그 상태에서 멈추었다.

키시아르는 연결된 상태로 유더에게서 느껴지는 감각과 시야를 통해 황제의 몸에 흐르는 힘의 흐름을 섬세하고도 지나치지 않게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며 황제가 느낄지 모를 충격을 줄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황제의 호흡이 빨라졌다가 멈추기를 반복하자 말없이 앉아 있던 황후의 맞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시종장 또한 초현실적인 광경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바람과 함께 움직이는 힘의 흐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유더의 손과 얼굴로 향한 가운데, 유더는 점점 더 많은 힘을 손 밖으로 뿜어내며 바쁘게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였다.

‘여기는 아니야. 여기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

일순 황제가 몸을 덜컥 움직였다.

“폐하!”

시종장이 재빠르게 황제의 어깨를 붙잡아 눌렀다. 그러나 유더는 거기에 신경을 쓰지 못한 채 방금 눈앞에 잠시 보였던 붉은 빛의 잔상에 날카롭게 집중했다.

“그거군.”

“예. 찾았습니다.”

유더의 혜안이 본 것을 연결을 통하여 느꼈을 사내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끌어당기는 것을 도울 테니 계속해.”

유더의 손을 두른 기운이 다시 한번 황제의 내부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반짝인 붉은 빛 조각들을 키시아르는 놓치지 않고 힘을 발휘하여 일제히 끌어당겼다.

황제가 또다시 사지를 들썩이며 침상이 덜컹거렸다. 그러나 키시아르도, 유더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황제의 몸 전체를 같은 방식으로 훑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전부 흩어져 있었군.’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조각처럼 숨겨져 있기는 했으나 한번 찾기 시작하니 줄줄이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유더는 자신과 키시아르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는 사실에 묘한 쾌감을 느끼며 한치의 실수도 없이 황제의 몸에 퍼져 있던 붉은 기운들을 향해 힘을 발휘했다.

순수한 힘에 이끌려 황제의 몸속에서 붉은 빛이 반짝이면, 키시아르가 바로 능력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끌어모은다. 황제의 복부에서부터 상반신으로, 그리고 팔과 머리를 지나 다시 다리까지 내려가는 동안 그들이 끌어모은 붉은 기운은 눈뭉치를 굴리듯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순조로워.’

유더는 자신의 손길을 따라오는 길고 흰 손가락을 흘긋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키시아르는 그야말로 이 일을 처음 해 보는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자신의 능력들을 제어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유더의 얼굴도 땀에 젖어 있기는 했으나 황제가 느끼고 있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잘 참고 계시는군…….’

황제는 힘이 조금씩 끌려 나올 때마다 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으로 사지를 멈칫대면서도 결코 신음을 흘리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힘겨운 시선은 땀 범벅이 된 동생의 얼굴에, 그리고 그 뒤에서 내내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황후에게 내내 못박여 있었다.

‘이대로라면…….’

모든 힘을 잘 끌어모아 큰 문제 없이 예정대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쿵…….

닫힌 문 바깥 어딘가에서, 문득 둔중한 울림이 느껴졌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