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화
태양궁의 분위기가 요즘 심상치 않다.
디아카 공작의 귀에 그러한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처음에 디아카 공작은 그것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희소식의 징조이리라 생각했다.
지병을 앓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며 틀어박힌 황제가 드디어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이리라고. 비록 황태자의 상태가 아직까지 그리 좋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세상의 흐름은 디아카 가가 짠 판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여겼었다. 오랜 시간 황궁에 여러 눈과 귀를 두고 관찰해 온 결과에 의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마병단이 서부에서 돌아오고 황제가 몇 년 만에 두문불출하던 몸을 일으켜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디아카 공작의 기대는 깨졌다.
무지몽매한 평민들의 앞에서 마병단을 치하하던 황제의 모습은 그럭저럭 멀쩡해 보였다. 그는 심지어 황제의 권위를 휘두르며 보란 듯이 대장군과 궁중마법사청장을 포함한 여러 인사들을 데리고 나타나기까지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병단의 얼굴에 금칠을 해 준 뒤 제 아우의 콧대를 하늘 높이 세워 주고 돌아가는 황제와 황후를 보며 디아카 공작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그래. 그가 아우와 마병단에 헛된 희망을 걸고 있다는 건 이미 마병단을 만들려 했을 때부터 추측했던 바였으니 이런 요란한 짓을 벌인 이유 정도는 납득할 만했다. 하지만 그것도 고작 한 번뿐이다.
이번에 서부에서 일어난 몬스터 이상 발생은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도, 그리고 하필 도박에 한창 미친 탓에 스스로 그 일을 해결할 여력이 못 되었던 타인 공작이 그들을 끌어들인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마병단이 그걸 찾고 해결한 건 그저 운이 좋아 일어난 우연의 결과일 뿐 두 번 얻을 만한 행운은 아니었다.
운으로 얻은 결과가 도박에서 얻은 의미 없는 승리와 무엇이 다른가? 진짜 승리는 오래도록 때를 기다리며 준비해 온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운 좋게 어느 날 갑자기 힘을 얻은 멍청한 자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천박한 냄새로 가득한 파티에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디아카 공작의 심기를 건드리는 데 아무런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파티 이후 디아카 공작은 입 안의 혀처럼 굴던 뒤르망 남작을 비롯한 몇 명의 주변인을 잃었다. 혹여나 다른 이들이 디아카 가를 우습게 보거나 헛생각을 하지 않도록 주변의 물갈이를 대대적으로 하기도 했다. 어차피 조만간 해야 할 일이긴 했지만 자의로 한 일이 아니다 보니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공작은 분노와 짜증 속에서도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해야 할 일들을 했다. 그는 파티를 통해 얻은 교훈을 십분 활용했다. 각성자가 된 평민 놈들은 자신들의 쓸모를 알아 주는 이에게 상상 이상으로 충성을 다한다는 점을 알았기에 쓸모없는 자들을 내친 자리에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각성자들을 채워 넣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첫걸음으로 그간 우습게 보고 관심조차 주지 않던 마병단에 드디어 제대로 된 눈과 귀를 심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생긴 지 1년도 안 된 오합지졸 집단 주제에, 마병단 놈들은 한 명도 호락호락하게 디아카 공작이 보낸 이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속해 있는 집단에 불만이 없을 리가 없건만, 돈에도 명예에도 거의 흔들리는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디아카에서 보낸 이들을 수상하게 보며 정체를 추궁하려 해 심부름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일이 다수 일어났다.
‘공작 전하. 송구하오나 그 평민 놈들의 자만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옵니다. 분에 넘치는 치하를 받아 기고만장해진 상태에서는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일 확률이 낮아 보이니, 추후의 때를 노리심이 어떠하실지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천한 것들은 분수를 모르니 시간이 모든 해결책이 되어 줄 것입니다.’
결국 마병단원들을 매수하여 마병단 내에 눈과 귀를 만들려 했던 1차 계획은 실패했다. 디아카 공작은 마병단이 처음 생길 때부터 애초에 사람을 심어 두었어야 했다고 뒤늦게 아쉬워했다. 하지만 마병단이 언제까지나 지금의 인원만으로 유지될 리 없으니 추후 인원을 새로이 뽑을 때 수작을 부려도 되는 일이고, 놈들도 눈이 제대로 달려 있다면 자신들이 썩은 줄을 잡았다는 건 금세 알게 될 터였다.
디아카 공작은 마병단원들 대신 다른 각성자들로 사병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마음에 차지는 않았으나 어차피 세상 모든 일이 단숨에 완벽하게 진행될 수는 없는 법이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기다림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공작의 철없던 막내아들 키올레조차 그 기다림 끝에 드디어 철이 들어 제법 사람 구실을 하고 있지 않던가?
물론 그건 그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하게 된 막내 아들놈’의 진실을 알았더라면 하지 못했을 생각이었으나 디아카 공작은 개의치 않았다.
디아카 가는 파티 이후로 황제와 황후, 그리고 마병단의 주변에 더욱 많은 눈과 귀를 두었다. 가만히 있으면 거꾸러질 줄 알고 내버려 두었던 자들이 조금씩 기가 살아 날뛰는데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자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주변의 달라진 분위기들이 공작의 귀를 통하여 조금씩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펠레타 공작은 전처럼 망나니짓을 해 대며 온갖 파티에 참석하기는커녕, 마병단 내에 틀어박혀 제 단원들과 훈련 놀이에 제법 열성이라고 했다. 서부에서 그가 가진 신검이 진짜임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이야기도 수도에 전해졌던 수준보다 훨씬 더 평민들의 믿음을 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력하게 사람을 주변에서 물려 놓고 가끔 서면으로 귀족들에게 신경질이나 내며 지내는 줄 알았던 황제는 요즘 들어 수상하게도 여러 사람들을 궁에 들이는 중이었다. 태양궁과 넬라른의 고위층 사이에서 긴밀한 연락이 오가는 것 같다는 믿기 어려운 정보도 들려왔다.
사교 모임에서 늘 기를 펴지 못하고 얌전히 앉아만 있다 사라지던 황후 또한 의외로 자신의 출신 가문인 헤른 공작가와 자주 연통을 보냈다. 특히 헤른 가의 차기 공작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1공녀, 2공자와 골고루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소식에 디아카 공작은 아주 미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건 오랫동안 승리와 평화에 취하여 조금씩 녹슬어 가던 위험 감지의 감각이었다.
그럴 리 없다 생각했지만, 어쩌면 최근 일어난 아페토 가나 타인 가의 비극적인 사건에서 헤른 가가 유독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건 황후, 혹은 황후를 사이에 둔 황제 쪽과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던 탓이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디아카 공작은 자신이 여태 잘 알고 있다 여겼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간 황제와 펠레타 공작이 누구의 자비 속에 살아 있는지 잊지 않도록 제법 꾸준하게 손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대체 언제부터 자신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을까?
왜 이런 소식을 그가 이제야 알게 되었단 말인가?
‘공작 전하. 긴급한 사안이라 갑작스레 오수를 방해함을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젯밤 몰래 비밀 통로를 통하여 태양궁으로 들어간 이들이 있었습니다. 확실치는 않으나, 그들이 펠레타 공작과 아일 남작이라는 소식이 있어…….’
그리고 디아카 공작의 불쾌함은 바로 며칠 전, 그 보고를 들은 순간 최고조로 치솟았다.
‘새벽궁의 분위기도 전과는 무언가 다른 듯합니다. 얼마 전 심어 두었던 아이 중 하나가 발각되어 내쳐지는 바람에 정확한 확인은 어렵습니다만… 태양궁에서 뭔가를 준비 중인 건 분명합니다.’
‘혹 펠레타 공작이 드디어 황제의 지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게 아닐까요?’
‘말도 안 되는…….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간 이 제국에서 가장 많은 각성자를 만나고 뒤져본 이가 펠레타 공작이 아니겠습니까? 마병단이 회수한 뒤로 아무 소식도 없었던 붉은 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게 사실 쓸모가 없어서가 아니었다면…….’
피가 식는 추측이다. 하지만 확인해 볼 만한 일이었다.
디아카 공작은 그제야 예전에 붉은 돌 회수 소식을 접한 직후 쑤석거려 놓았던 진주탑의 원로, 타이스 율만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사람을 보내어 연락을 취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마련해 둔 곳에서 관련된 일을 준비하고 있는 줄 알았던 노마법사는 짐 몇 개만 거기에 두었을 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연락이 끊긴 지 몇 달이나 지난 터라 노마법사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이도 거의 없었다.
타이스 율만을 찾으러 간 공작의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다. 그들과 선이 닿아 있던 진주탑의 원로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걸 여태 몰랐다는 것은 진주탑과 마법사 전체의 지탄을 받을 만한 큰일이었다.
그들은 노마법사의 행방을 확실히 찾고 나서 보고하는 쪽이 공작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리라 여겼고, 찾는 이들이 마병단 내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에 일 진행은 한없이 늦어졌다.
그럴 시간에 진주탑에 연락하였더라면 멀쩡히 살아서 가끔씩 안부 연락을 취하는 노마법사의 생존 소식을 접할 수 있었겠지만, 세상에는 신중을 기하여 조심할수록 오히려 원하는 결과에서 빗나가는 일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렇게 서로 손발이 맞지 않는 사이, 디아카 공작은 또다시 비보를 접했다.
그건 바로 내일, 태양궁에서 또다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정보였다.
아직 정확히 어찌 된 일인지 사정은 알기 어렵다. 하지만 디아카 가 출신의 황태후 이넬라 라 오르가 건재하던 시절부터, 디아카 공작은 현 황제와 그의 아우를 어렵게 여겼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확실하든, 확실치 않든 어차피 내릴 결론은 하나.’
다 되었다 여겼던 일에 재를 뿌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일 태양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번에는 반드시 그 정체를 알아낼 마음으로, 공작은 제 주변을 지키던 이들에게 몰래 명을 내렸다.
“내일, 태양궁에 손님을 보낼 생각이니 준비하라 이르도록.”
“광휘궁에 계신 황태자 전하께도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되었다. 키올레에게도 아무 말 하지 말아라. 대신, 광휘궁에 드나드는 ‘치료사들’에게 연락을 넣어라.”
각성자의 힘으로 그들이 살기를 꾀한다면, 같은 힘으로 받아쳐 주면 그만.
디아카 공작은 그자들의 능력을 십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명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사들에게서 승낙의 뜻이 전달되어 돌아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