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화
“어서 오십시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유더는 다시 만난 시종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표정에 실린 무게조차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이는 들었으나 꼿꼿한 자세만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노인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유더의 뒤를 이어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의 얼굴을 훑었다.
훈련받은 기사들 외에도 궁을 지켜야 할 사람이 필요하니 마병단에서 적절한 인물을 데려와 달라는 명이 날아온 건 어젯밤의 일이었다. 본래 예정에 없던 명이 내려온 이유는 뻔했다.
태양궁 내에서 요즘 벌어지는 일의 정황이 외부로 새어 나간 듯하다는 판단을 황제 측에서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조심하여 움직였음에도 안심하고 움직이기가 이토록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끼며,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의논해 두 사람의 조력자를 추가로 뽑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정보를 읽을 수 있는 칸나는 당연히 포함. 가케인은 그런 칸나를 잘 지키면서 전투와 추적 및 이동을 모두 균형 있게 맞출 수 있는 인재이니 추가로 포함.’
칸나의 능력은 지금 같은 상황일수록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전투 능력이 약한 탓에 스스로를 지키기 어렵고, 빠르게 이동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럴 때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가케인의 그림자 분신이 붙으면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적절하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둘 모두 성격이 신중한 데다 유더와 가장 친밀한 동료들이기도 하니 오늘 같은 날 최소한의 인원을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 이상의 적임자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러고 나서 이전과 달리 키시아르가 먼저 홀로 황궁으로 향했고, 유더는 궁의 호위를 돕기 위한 비밀 임무라는 명목으로 호출한 칸나와 가케인을 데리고 조금 더 늦은 시각에 마차를 탔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보가 외부에 새어 나갈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신중을 기한 결과였다.
유더의 기대대로 두 사람은 이제부터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예정인지 정도 이상 묻지 않고 잠자코 유더의 뒤를 따랐다. 궁의 경직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느껴진 듯 연신 긴장된 눈동자를 깜박이기는 했으나 임무를 하지 못할 만큼 떨고 있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경험이 쌓이니 침착함도 많이 늘었어.’
두 사람 모두 입단 시험을 치르던 때만 해도 지극히 평범했던 이들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냉정함과 차분함이 대폭 상승했다. 그간 해 온 훈련과 임무가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들이 가는 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그러나 유더는 궁 곳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도록 몸을 숨긴 호위들의 기척이 평소의 몇 배는 늘었다는 사실을 예민한 감각을 통해 느꼈다.
‘아직 칸나와 가케인이 이런 걸 느낄 정도는 아니겠지만… 몇 년이 지나면 그것도 충분히 할 수 있게 되겠지.’
못 하리라는 가정은 생각지도 않았다. 못한다면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훈련을 시키면 되는 법이었다.
미래를 위한 훈련 계획을 습관적으로 짜기 시작한 상태로 얼마나 걸었을까. 시종장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두 분께서는 이곳에서부터 들어오는 모든 이를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방문객도 이곳을 지나지 않으면 올바른 길로 갈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의심스럽다면 곧바로 제압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아일 남작께서는 이쪽으로.”
유더는 가케인과 칸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두 사람이 긴장된 얼굴로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우리하고는 다른 일을 맡은 거지? 잘해, 유더.”
“아직까지는 여기서 이상한 게 읽히진 않아. 혹 이상한 게 느껴지면 사전에 들은 대로 움직일게. 그러면 유더도 임무 잘하고, 이따 봐!”
“…그래.”
두 사람에게서 멀어져 향한 곳은 벌써 세 번째나 방문하게 된 케일루사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유더는 닫혀 있는 집무실 앞에 서 있는 장신의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유더보다 먼저 태양궁으로 향했던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시간을 잘 맞춰 왔군.”
“왜 안에서 기다리시지 않고 여기에 계십니까.”
“우리가 사전에 전달한 조건 때문에 말이야. 폐하께서 받아들여 주시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면 치료 시작도 전에 심기가 대단히 어지러워지시겠다 싶더군. 보좌라도 방패로 두르고 들어가야 한소리를 듣지 않을 듯해 여기 있었네.”
‘음…….’
조건. 그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유더는 문 쪽을 흘긋 바라본 뒤 납득했다.
여태까지 조용히 유더를 안내했던 시종장이 방글거리는 키시아르를 향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그 조건 때문에 얼마나 염려하셨는지 모르실 겁니다.”
“설득해 주느라 애썼다고 들었지. 고맙네, 율리버.”
키시아르가 미소와 함께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이 잘 끝나고 나면 그 노력에 한 점의 후회도 없게 될 거야. 약속하지.”
“전하는 정말 변함이 없으시군요.”
“변함이 없다니? 내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데. 그리 말하면 내 보좌가 섭섭하다네.”
“…….”
무엇이 섭섭한지 모를 유더는 그저 잠자코 침묵만 지켰다. 다행히 시종장은 그 이상 대화를 잇지 않고 문을 열었다.
세 번째로 방문하여 익숙해진 집무실 내에는 케일루사 황제와, 또 다른 한 사람이 먼저 와 앉아 있었다.
“드디어 왔군요.”
본래대로라면 오늘 이곳에 올 예정이 아니었던 사람. 그러나 오늘이 오기 전 키시아르의 부탁으로 결국 함께 자리하게 된 황후가 그들을 향하여 조용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 로사 파리아 라 오르. 그녀가 바로 키시아르와 유더가 준비한 마지막 ‘조건’이었다.
유더는 각성 조건에 당사자의 의지와 염원이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린 다음 날, 키시아르가 자신을 불러 심각히 제의했던 순간의 대화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았는데, 우리가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해도 폐하의 염원을 현재 이상으로 상승시키는 건 한계가 있겠더군.’
‘지금 이상을 원한다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결국 요점은 폐하께서 각성의 힘을 간절히 원하여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실 만한 무언가를 제시하는 게 아니겠나?’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으십니까.’
‘황후 폐하를 부르지.’
‘예?’
‘이전처럼 같은 궁에 있으나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한 곳에 함께 있으실 수 있도록 하는 거야.’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야 황제의 감정이 어느 쪽으로든 크게 움직이기는 할 터다. 하지만 황제가 황후를 본다 해도 과연 그의 마음이 그들이 바라는 쪽으로만 움직일지는 알 수 없는데, 괜찮겠느냐는 우려에 키시아르는 그저 비밀스럽게 웃기만 했다.
‘그걸 위해 밤새 생각했지. 다 방법이 있네.’
그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유더는 황후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색이 연한 물빛 옷을 걸친 황후는 머리칼을 길게 풀어내려 평소처럼 기품 넘치는 귀부인이 아닌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싱그러운 소녀처럼 보였다.
‘아니. 소녀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로 결혼하지 않은 귀족 영애들이 입는 옷을 그대로 입고 온 것 같은데.’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 황후는 그 차림새가 상당히 쑥스러운 듯했으나, 그렇다고 당당함을 잃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 속에는 오늘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단단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케일루사 황제가 아무 말도 없이 고요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키시아르와 유더가 등장했음에도 거의 시선조차 주지 않고 황후를 바라보는 데 여념이 없는 그의 눈빛은 반쯤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리고 나머지 반은 복잡한 감정에 침잠한 듯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곳에 와야만 오늘의 거사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지요. 최대한 공작이 전달한 말에 맞는 차림새를 갖추어 왔는데, 정말 이거면 되는 것입니까?”
인사를 받자마자 건넨 황후의 질문에 키시아르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완벽합니다. 누구라도 오늘의 황후 폐하를 목도한다면 어둠을 밝히는 여명의 아름다움이란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겠지요.”
“공작. 그런 말을 하려고 귀한 이를 여기까지 부른 건 아니겠지.”
그제야 고개를 돌린 황제가 아우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솔직히 말해 이 상황이 어떻게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짐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으나… 황후가 이 이상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 염려는 거두어 주십시오. 일이 진행되는 동안 황후 폐하께서는 그저 저희의 곁에서 자유롭게 상황을 지켜보아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눈을 깜박인 황제가 손으로 눈가를 눌렀다. 긴 한숨이 메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러면 더 필요하거나 준비할 것은 없느냐.”
“예. 준비는 모두 갖추었으니 더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좋다. 그러면 시간을 끌 것 없이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황제가 자리에서 의연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누그러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정돈되며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황제는 오늘을 위하여 정돈된 침상에 누웠고, 유더는 키시아르와 함께 침대의 양옆에 마주 보는 위치를 차지하고 섰다. 머리맡 부근에는 물수건과 뜨거운 김을 뿜는 그릇을 준비한 시종장이, 그리고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황후가 홀로 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장소라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침실. 황제를 위하여 이 자리에 선 이는 고작 넷.
그러나 유더는 조금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선을 들며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마찬가지로 유더를 보고 있던 붉은 눈동자가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언뜻 고민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 미소 아래, 오직 유더만이 느낄 수 있는 깊고 오래된 고통들이 끝을 모를 바다처럼 잘게 일렁이고 있었다.
‘…반드시 해낸다.’
각오를 다지며, 마침내 유더의 손에서 장갑이 힘 있게 벗겨져 나갔다.
“시작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듯 꿈틀대며 움직이는 검붉은 핏줄이 드러난 창백한 손등 아래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